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응 스님, 스스로 불교관에 의문 던져야”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9.17 10:29
  • 수정 2015.09.17 21:24
  • 댓글 13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반박
연기법은 선정과 불가분 관계
부처님도 선정수행으로 발견
깨달음은 체득과 경험에 의존
‘깨달음은 이해차원’과는 달라
진리를 범부수준으로 끌어내려
경전 근거 없는 견해 재고 권유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최근 ‘깨달음과 역사’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으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해 큰 논란을 일고 있다. 초기불교 전공자인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가 법보신문 기고를 통해 현응 스님의 주장을 비판한 데 이어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이 현응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고문을 보내와 게재한다. 이 원장은 지난 1980년대 초부터 포교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가법사로 ‘금강경 대강좌’ ‘수행으로 가는 길’ ‘법수로 배우는 불교’ ‘완전한 깨달음’ ‘왕초보 금강경 박사되다’ ‘불교, 기독교를 말하다’ 등 저술을 펴내기도 했다. 편집자

▲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이 글을 쓰기 전에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께 먼저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평소 스님께서는 필자의 불교활동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점들을 잘 알기에 처음에는 스님에 대한 비판을 굳이 해야 되는지 망설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정법의 문제라는 판단 아래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아마 스님께서도 이 점 널리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필자는 솔직히 드러난 몇몇 내용만으로 스님의 전체적인 불교관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얼마 전 ‘깨달음과 역사’라는 주제로 열렸던 토론회에서 스님이 보여준 불교관은 스님의 전체적인 불교관을 파악하는 데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스님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불교의 지엽 말단의 부분이 아닌 불교의 근간이며 핵심부터 곡해가 심각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님의 불교관 가운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깨달음과 선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단순 이해로 해석하는가 하면 부처님이 선정을 통해 깨닫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스님에 따르면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은 연기를 이해하는 것으로 끝냈을 뿐 체험을 하거나 증득하지 않았으며,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선정을 지도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부처님 당시 불교수행의 극과(極果)인 아라한의 경지에 대해 연기를 이해한 수준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우선 스님의 이러한 주장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이 최소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의 교육 수장이라면 자신이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불교관에는 경전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종단 교육의 방향이나 정책 수립 문제가 아닌 불교의 교리를 해석하는데 있어 경전에 근거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주장하는 내용이 경전과 일치하지 않다든가 다른 각도로 빠져 나갔다면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스님의 견해들 가운데에 부처님이 선정을 통해 연기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성도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여러 경전 가운데 ‘디가니까야’의 ‘뽓타빠다경(Potthapada-sutta)’이 있습니다. 이 경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연기법 발견은 선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부처님은 초선정에서 시작해 높은 단계인 색계 선정을 지나 무색계 선정에 듭니다. 무색계는 주지하다시피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부처님은 초저녁에 무색계, 선정인, 무소유처에 들어 연기를 사유하고 순관을 합니다. 이때에 부처님의 마음 가운데에 삼명육통(三明六通) 가운데에 하나인 천안명(天眼明)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한밤중에 선정의 최고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러 자신이 발견한 연기를 역관합니다. 여기서 숙명명(宿命明)이 열리게 됩니다. 이어 부처님은 새벽에 부처님만이 들 수 있는 상수멸정에 이르러 연기를 순역 쌍관을 합니다. 이때 부처님에게는 최고의 신통이라 할 수 있는 누진명(漏盡明)이 열리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선정 속에서 연기를 자유자재하게 관찰하고, 번뇌가 다한 누진명이 열리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 부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선정을 통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스님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내용인 것입니다.

▲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는 주장에 대해 이제열 경전연구원장은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떠난 체득과 경험에 의존한다"고 반박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연기는 이해로써 끝난다는 스님의 주장도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이 역시 경전의 내용과는 거리가 멉니다. 부처님은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떠난 체득과 경험에 의존한다고 가르칩니다. ‘쌍윳따니까야’ 2권을 보면 싸비따 존자가 무씰라 존자에게 연기를 상세히 설명하자 무씰라 존자는 연기에 대해 “단순한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분석이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도로 특별히 체험적 지혜를 지니고 있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싸비따 존자는 “그와 같은 부분들에 대해 알고 본다”고 대답하면서 목마른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막을 걸어온 사람이 우물을 보고도 두레박이 없다면 한 방울도 목을 축일 수 없듯 연기는 단순한 이해만을 가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 체험적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달음이 이해로 충분하다는 스님의 생각은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반과 해탈을 연결해서 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 열반, 해탈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십이연기를 깨달았다면 자연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와 집착이 파괴되고, 생사를 비롯한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십이연기 중 무명이 타파된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갈애가 타파된 것을 열반이라 하며, 노사 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가 타파된 것을 해탈이라 합니다. 스님 말씀대로 연기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연기를 이해한 사람들은 열반과 해탈을 얻어 자유자재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스님은 초기불교의 수행 사과(四果)에 대해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연기를 바르게 이해한 차원은 아무리 잘 이해했어도 범부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연기를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단계는 성인의 첫 단계인 수다원에 이르러서입니다. 수다원은 스스로가 계발한 지혜에 의해 오온 속에 흐르는 연기의 이치를 발견합니다. 수다원은 진리를 확인하였으나 아직 탐진치 번뇌를 소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위(初位)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연기를 완벽히 깨달았을 뿐 아니라 탐진치 등의 미세번뇌들까지 완전히 타파했으므로 수다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라한을 범부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고 있는 스님의 주장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선정 지도를 하지 않았다는 스님의 주장도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초기경전 곳곳에서 부처님은 물론 장로 비구들까지도 비구들에게 선정을 가르치는 장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쌍윳다니까야’ 3권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집중을 닦아라. 수행승은 집중에 의해 여실지견(如實知見)한다”고 하셨고 ‘담마파다’ 372장에서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이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자에게 열반이 가까이 있다”면서 수행자들에게 선정을 닦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역시 ‘담마파다’ 금세공사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이 사리풋타를 시켜 젊은이에게 선정을 가르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깨달음과 선정에 대한 중요성은 비단 초기불교의 입장만은 아닙니다. 대승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 선정과 깨달음을 열반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부처님이 누리고 계신 경지 그 자체로 표현합니다. 대승에 등장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니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니 여환삼매(如幻三昧)니 입적정삼매(入寂靜三昧)니 하는 수많은 종류의 삼매는 선정과 관련된 용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의 연기설은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과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입니다. 이 두 연기설은 대승불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불성사상으로부터 전개됩니다. 불성사상은 대승교리의 기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승에서는 불성에 대한 깨달음을 수행의 목표로 삼고 선정을 닦으라고 요구합니다. 대승의 수행단계인 십지설은 선정의 깊이에 따라 불성이 현전하는 과정을 설하는 내용입니다. 수행에 의해 불성을 완벽히 깨달으면 부처의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대승에서도 깨달음을 불교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으며, 선정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초기경전뿐만 아니라 대승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필자는 스님께 자신의 불교관에 의문을 던지기를 권청드리며 다시 한 번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