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4. 전(傳) 공민왕, ‘천산대렵도’

기자명 조정육

신념은 흔들리지 않으니 매번 넘어져도 매번 일어나리

▲ 전(傳) 공민왕, ‘천산대렵도’, 고려, 비단에 색, 24.3×22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왕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아직 세연(世緣)이 남았거늘 어떻게 돌아가셨다는 게냐?”
“척살(刺殺)당하셨다 하옵니다.”

보우, 중국서 공민왕과 인연
여러 가지 국가 쇄신안 건의
국사 참여하면서도 본분 다해
수행자로 사는 것 가장 중시

그림과 글씨에 능했던 공민왕
노국공주 잃고 실의에 빠져
총기 잃고 국정에 관여 안 해

1374년 10월27일이었다. 태고(太古) 보우(普愚,1301~1382) 스님은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죽음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 왕의 나이 아직 한창때인 45세였다. 떠나기엔 너무 일렀다.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9년 전에 왕비인 노국공주(魯國公主)가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뜨자 예전의 총기를 놓아버렸다. 저 사람이 진짜 예전에 알던 왕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변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왕은 모든 권한을 신돈(辛旽)에게 넘기고 국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개혁과 자주를 위해 펄펄 날아다니던 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국정을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보우 스님과 공민왕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공민왕은 18세 청년이었고 보우 스님은 47세였다. 보우 스님은 속성이 홍(洪)씨로 13세에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출가했다. 가지산문의 총림에서 수행할 때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를 참구하여 크게 깨쳤다. 26세에는 교종의 화엄선과(華嚴選科)에 합격해 경전을 공부했다. 그 후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와 송도의 전단원(?檀園)에서 차례대로 크게 깨달음을 얻고 삼각산에 태고암(太古庵)을 짓고 머물렀다. 그 후 4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청공(石屋淸珙)을 만나 임제종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연경의 황실에서는 보우 스님을 초청해 법회를 열었다. 법회는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성대히 치루어졌다. 이때 연경에 와 있던 공민왕이 법회 장면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공민왕은 만약 자기가 고려에 돌아가 정치를 맡으면 반드시 보우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5년 후에 귀국해 왕이 된 공민왕은 약속대로 보우 스님을 스승으로 모셔 설법을 부탁했다.

그때부터 보우 스님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여러 차례 궁궐을 드나들었다. 공민왕은 혼란한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불교를 국가 이념의 근거로 세우고자 했다. 불교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을 국사나 왕사로 책봉함으로써 구심점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보우 스님은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불심도 깊었던 공민왕은 정치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심을 증장시키기 위해서도 보우 스님을 가까이했다.

보우 스님은 공민왕에게 여러 가지 쇄신안을 건의했다. 첫째는 구산선종을 통합하여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자고 했다. 둘째는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했다. 공민왕은 보우 스님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 통합에 착수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양에 궁절을 짓고 천도를 준비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비록 보우 스님의 건의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각은 언제나 현실에서 떠나지 않았다.

보우 스님은 어디서든 결코 선승(禪僧)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공민왕이 왕도에 대해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만 봐도 보우 스님의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임금 되는 도리는 교화를 닦아 밝히는 데 있는 것이지 반드시 부처를 믿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국가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님을 지극히 받들어도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꼭 하시겠다면 다만 태조께서 설치하신 절터를 개수할 뿐이지, 새로 절을 창건하지는 마십시오.”

자신이 승려의 본분을 다하듯 왕은 왕의 본분을 다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할 때 국가는 저절로 평안을 얻고 안정될 것이었다. 정치는 불교 신앙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는 가르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보우 스님은 공민왕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 궁궐로 향했지만 일이 끝나면 곧 다시 산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산으로 향한 것은 푸른 산을 좋아해서도 아니요, 붉은 티끌이 싫어 달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산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본래 산중의 사람이니, 마땅히 산중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세는 신돈의 탄핵을 받아 속리산에 유폐될 때도 변하지 않았다. 어디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라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사는 것이 중요했다. 4년 전에 신돈이 주살되고 보우 스님이 다시 국사로 책봉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우 스님에게는 수행자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며 사슴 한 마리를 쫓고 있다. 두 사람은 활을 들고, 한 사람은 창을 들고 목표물을 잡기 위해 맹렬하게 달리며 포위망을 좁혀 나간다. 다리를 쫙쫙 벌린 말에서 속도감이 느껴진다. 녹(綠), 청(靑), 홍(紅)의 사냥복을 입은 인물들은 세필(細筆)로 정교하게 그렸다. 옷과 활 통에 그려진 금색문양은 마치 고려불화의 인물을 보는 듯 섬세하다. 바탕에 그린 문양은 박락(剝落)이 심해 거의 확인하기가 힘들다.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 화가의 솜씨를 충분히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정조 때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볼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쓴 ‘앙엽기(?葉記)’에서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를 보고 이렇게 적었다. “헤진 비단이 너울너울 나는 나비날개와 같이 되었고 다만 사슴 두서너 마리만이 남았다. 그림이 마치 연(藕)의 실처럼 세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조화옹의 솜씨라고 할 수 있다.” 이덕무가 실견한 작품이 이 ‘천산대렵도’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헤진 비단이 나비 같다는 표현이나 세밀하게 그렸다는 느낌은 이 그림에도 적용된다.

규장각에 소장된 ‘천산대렵도’는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밖에도 공민왕 작품으로 전해지는 수렵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두 점이 더 있다. 모두 한 작품에서 잘려 나간 편화(片畵)다. 두 점의 수렵도와 규장각에 소장된 ‘천산대렵도’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필치와 채색법에서 조금 차이가 있어 한 사람의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 듯하다. 두 곳의 작품 모두 공민왕의 진작(眞作)인지는 규정하기 어렵다. 이덕무가 살았던 시대까지도 공민왕의 그림이 인기가 있었던 만큼 여러 점의 임모본이 제작된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천산대렵도’에서 보듯 공민왕은 산수화와 더불어 인물화를 잘 그렸다. 공민왕의 서화제작에 대해서는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편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근역서화징’은 우리나라 서화가의 인명사전이다. 기록에 따르면 공민왕은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탄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석가모니가 고행림을 나서는 모습을 그린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달마대사가 갈대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 등의 불화(佛?)를 그렸다. 그의 불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아내 ‘노국대장공주초상화(魯國大長公主肖像畵)’도 직접 그렸다. 문신 윤택(尹澤)과 염제신(廉悌臣) 등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림을 좋아한 왕은 많았지만 직접 신하의 초상화를 그려준 왕은 많지 않았다. 왕의 권위에만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가를 적극적으로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작품들은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기록만으로도 그의 인물화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공민왕은 예술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반면 거칠고 호방한 것을 싫어했다. 그는 고려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사냥을 하지 않았고 말조차도 타지 않았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경도된 왕이 아닌가. 불심이 깊은 왕으로서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사냥장면을 그렸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설 수 없으니 대리만족을 위해 붓을 든 것일까. 아니면 사냥꾼이 사슴을 쫓듯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작품이 공민왕의 이름만 빌린 다른 사람의 작품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 작품이다.

공민왕은 인물화를 잘 그렸지만 용과 말 그림도 잘 그렸다. 한번은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그린 용과 말 그림을 보고 홍득구(洪得龜)가 놀라서 말했다. “공민왕 이후에는 이런 작품이 없었다.” 이 감탄문은 윤두서가 ‘동식물을 그릴 때 반드시 종일토록 눈이 뚫어져라 보고서 그 진짜 모양을 똑바로 본 뒤에야 그렸다’는 작화태도를 칭찬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윤두서가 나오기까지 용과 말 그림의 일인자는 공민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의 영모화(翎毛畵) 실력이 300여 년이 지난 조선후기까지도 인정받을 만큼 유명했음을 말해준다.

공민왕은 글씨도 잘 썼다. 공민왕은 큰 글씨로 ‘直指堂月潭(직지담월담)’이라 써서 회암심선사(檜巖心禪師)에게 내렸다. 이 글씨가 얼마나 훌륭했던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마치 천년 묵은 곧은 나무를 깎아서 대들보를 만들고 만금짜리 아름다운 구슬을 쪼아서 그릇을 만든 것과 같으니, 어찌 하늘이 낸 특수한 솜씨로 자연의 조화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천년 묵은 나무를 깎아 만든 대들보와 만금짜리 구슬을 쪼아 만든 그릇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기세와 우아함이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왕이 쓴 어필(御筆)이니만큼 과장되게 추켜세운 감이 없지 않으나 글씨가 뛰어났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공민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金安老)가 지은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는 이런 기록이 적혀 있다. “공민왕은 큰 글씨를 잘 쓰고 그림에도 뛰어났다. ‘아방궁도(阿房宮圖)’를 그렸는데 사람이 작기가 파리 대가리만 하고 의관과 신발처럼 털끝 같은 것도 다 그려 넣어서 그 정밀하고 세세하기가 겨룰 자가 없었으니,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만 능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공민왕의 업적과 한계를 분명하고 준엄하게 평가한 기록이다.

김안로의 글을 읽고 나니 공민왕이 그림을 잘 그렸듯 나라 다스리는 일도 잘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잘한다는 것은 어디서 나올까. 한결같은 데서 나온다. 능력이 있든 없든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데서 나오는 힘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치는 신돈에게 맡기고 그는 자신의 슬픔에만 충실했다. 정신병을 앓게 된 것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온통 정적이 가득한 궁궐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잃었으니. 공민왕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의 선택을 수긍할 수는 없다.

우리가 평소에 불교 공부를 하는 이유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기 위해서다. 예측하지 못한 불행을 만났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다. 질병에 걸렸을 때, 이별의 순간에, 죽음이 다가왔을 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살기 위해서다. 보우 스님이 공민왕의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우 스님의 안타까움은 단지 공민왕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걸까. 매번 일어서고 매번 넘어지는 나를 보면서 보우 스님의 측은한 눈길이 느껴져 하는 얘기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