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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명 감산덕청이 운서주굉에게

“계율 지키며 염불에 진력하는 스님 계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덕청 홀로 오대산에서 정진
중요한 수행 전환점 맞을 때
주굉이 찾아가 며칠 간 대화
덕청, 두고두고 감사마음 전해

주굉 정토로 떠난 지 2년 뒤
덕청, 운서사로 찾아가 참배
탑비명 쓰고 제자들에 법문

덕청 죽은 뒤에도 육신 온전
지금은 남화사 조전에 모셔

“지난번 제가 오대산에 머물 때 스승께서 찾아오셔서 큰 자비심으로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그 후 스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갈수록 커졌습니다. 제가 오대산을 떠나 남쪽으로 만행을 떠났을 때 스님을 뵙고자 했으나 저의 업력이 동쪽 바닷가로 이끄는 바람에 부득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이곳(광동)에서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난날 제 도력이 약해 마장에 크게 흔들리고 귀양까지 간 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꾸짖음을 받을 만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그곳에 연연하고 있으니 아마도 숙세의 업인 듯싶습니다.
정법이 쇠퇴하고 올바른 종지(宗旨)가 갈수록 흐려진다지만 우리 스님 법의 깃발 높이 들고 계율 지키며 염불에 진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같은 중생들이 이 같은 큰스님을 만나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가는 편에 향을 보냅니다. 보잘 것 없지만 그 향기가 대중들에 두루 스며들었으면 합니다.”

1617년(만력 45년), 72살의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은 항주 운서(雲捿)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염불과 선을 방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정토로 이끌었던 운서주굉(雲棲袾宏, 1535~1615)의 발자취가 남아있었다.

2년 전 덕청은 주굉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운서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랜 유배에 지병까지 겹치면서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덕청이 주굉을 만난 것은 40년 전인 1576년 오대산에서였다. 덕청은 그때 주굉과 며칠 동안 나눴던 시간들을 잊지 못했다.

당시 31살의 덕청은 수행의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오대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준하다는 용문사 인근 토굴에서 1년 넘게 정진하고 있었다. 이곳은 조용한 산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일 휘몰아치는 바람과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 소리는 차라리 우레와 같았다.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옮길까 싶었다. 하지만 경계는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게 아님을 잘 알았다. 덕청은 소음의 한복판에서 소음을 넘어서는 방법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덕청은 계곡 위 외나무다리에 앉았다. 거대한 소음과 두려움이 뱃속 깊은 곳에서 꾸물꾸물 올라왔다. 덕청은 매일 두려움을 밀어내며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생각이 움직이면 물소리가 들리고, 생각이 멈추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다리 위에 앉아있던 덕청은 홀연히 자신의 몸을 잊었다. 순간 한없이 고요한 세계가 열렸다. 이때부터였다. 어떤 소리도 더 이상 덕청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수행도 크게 진전됐다. 밀기울과 산나물로 연명하며 정진했지만 의식은 더욱 명징해졌다. 하루는 경행(經行)하던 중 홀연히 삼매에 들었다. 엄청난 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몸과 마음이 사라졌지만 자각은 또렷했다. 안팎이 담연(湛然)해졌다. 모든 의심도 단박에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삼매에서 깨어난 그는 게송을 읊었다.

‘갑자기 한 생각에 미친 마음 쉬어지니/ 안팎의 근진(根塵)이 함께 훤히 뚫렸네/ 몸 뒤집어 큰 허공 부숴버리니/ 삼라만상이 따라서 일어나고 멸하네.’

덕청이 삼매에서 깨어나 토굴로 돌아오니 솥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었다. 주굉과 첫 만남도 이 무렵 이뤄졌다. 주굉이 덕청이라는 젊은 승려가 오대산 깊은 산중에서 홀로 정진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다. 그들이 마주하는 순간 11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경전, 수행방법, 체험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덕청은 주굉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수행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 깨침이 있더라도 큰 마장이 닥쳐올 수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출가를 하게 된 이유와 지금까지 걸어온 얘기들도 털어놓았다. 덕청은 주굉이 우여곡절 끝에 출가한 늦깎이였지만 누구보다 큰 일을 하리라 확신했다.

▲ 감산덕청이 그린 운서주굉의 모습.
주굉은 절강성 인화현(人和縣) 사람이었다. 명문가 아들로 태어난 그는 7살 때부터 학문을 익혔고, 10년 뒤에는 가장 뛰어난 유생으로 뽑혔다. 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을 받았지만 정작 주굉은 과거시험이 아닌 출가에 뜻이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부모에게 전했으나 아버지는 탄식으로, 어머니는 눈물로 응대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을 대신해 맏아들 역할을 해야 했다. 그는 부모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운명이었을까. 어린 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더니 곧바로 아내도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어야한다는 부모의 강권으로 주굉은 다시 결혼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여기저기서 매파들이 찾아왔다. 그는 가난한 탕(湯)씨를 선택했다. 살생을 꺼려하고 채식을 하는데다가 불심도 깊었기 때문이다. 첫날 밤 둘은 잠자리 대신 출가를 굳게 약속했다.

27살에 아버지를, 31살에 어머니를 여읜 주굉은 “나는 출가해 어버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탕씨에게 말했다. “흩어지지 않는 인연은 없소. 태어나고 죽는 일을 누가 대신해 주겠소. 나는 가려오. 그대도 뜻대로 하시구려.” 탕씨도 미소를 지으며 “당신께서 먼저 가세요. 나는 천천히 가리다”라고 답했다.

주굉은 그길로 서산 무문동의 무문성천(無門性天)에게 출가해 삭발하고 소경사(昭慶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표주박 하나와 지팡이 하나로 각지를 돌았다. 모친의 상이 끝나지 않았기에 주굉의 품에는 늘 나무로 만든 신위가 있었다.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반드시 공양을 올렸다. 그렇게 10여년간 운수행각을 하며 선지식을 찾아 염불과 참선을 익히고 경전의 이치도 하나하나 깨쳐 나갔다. 그러던 주굉이 산동성 동창(東昌) 지역을 지날 때 문루의 법고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이십년 전 일이 의심스럽다 하여/ 삼십 리 밖에선들 무슨 기특한 일 만나랴/ 선과 악이 모두 꿈인 걸/ 마(魔)와 부처 공연히 옳다 그르다 다투네’

1571년 37살의 주굉이 항주로 돌아와 운서산을 찾았을 때 그는 이곳이 자기가 머물 곳임을 직감했다. 그는 차가운 바위에 단정히 앉아 홀로 염불하며 지냈다. 주굉은 마을 인근의 사나운 호랑이로 인해 매년 10여명이 화를 당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가 주민들을 불쌍히 여겨 불경을 읽고 시식(施食)을 하니 호환이 없어졌다. 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촌민들이 주굉을 찾아와 기우제를 거듭 청했다. “나는 염불만 할 줄 안다”고 사양하던 그가 산에서 내려와 논밭을 걸으며 목탁을 치고 염불을 했다. 그러자 돌연 먹구름이 끼더니 주룩주룩 비가 쏟아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보통 승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우리 마을의 복전이다”라며 모두들 연장을 들고 나와 절을 지었다. 얼마 후 작은 절이 완성됐다. 이것이 명말 새로운 불교운동의 진원지가 됐던 운서사의 시작이었다. 주굉은 사람들에게 계율을 엄히 지키고 지성으로 염불할 것을 권했다. 겨울에는 경전강의와 참선지도에 매진했다. 계정혜를 두루 갖춘 주굉의 진면목이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납자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주굉은 유독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산 생명을 죽여 입맛을 돋우고 배를 불린다면 이는 정녕 옳지 못한 일이오.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아 사람의 목숨을 보전한다면 언뜻 아무 죄도 없을 것 같지만 사람은 소중히 여기고 축생은 천하게 것이니 제불보살의 마음은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을 죽여 또 다른 하나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어진이가 차마 할 일이 아닌 것이오.”

훗날 일이지만 주굉은 거사 중심의 방생결사인 방생회(放生會)를 만들어 버젓이 자행되는 살생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모임에는 지방 현 주지사, 현감, 판관, 한림학사 등 관료들과 무관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주굉은 불사금을 모을 때 부유한 몇 사람의 막대한 보시보다 적은 액수라도 많은 사람들이 보시해 공덕을 쌓도록 권했다. 그렇게 마련된 돈으로 방생 연못이 여럿 만들어졌다. 방생회 회원들은 물고기들이 다시 잡혀가지 않도록 직접 관리했다. 여기서 방생법회가 있을 때면 수만 명의 염불소리가 온 천지에 가득했다.

주굉은 ‘아미타경소초’와 ‘왕생집’을 써서 당시 선에 비해 근기가 낮은 수행으로 여겨지던 염불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사대부들을 염불삼매로 이끌었다. 또 선의 마지막 관문을 뚫을 수 있도록 경책하는 조사들의 법어를 모은 ‘선관책진’,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를 진솔하게 풀어 쓴 ‘죽창수필’ 등을 집필해 중생을 제도하려 무던히 애썼다.

주굉이 항주 운서사를 떠나 오대산을 순례하는 과정에서 덕청과 만난 것은 1576년이다. 이후 운명은 번번이 두 사람을 비껴갔다. 주굉과 덕청은 멀리 떨어진 채 자신들의 웅혼한 파장을 만들어갔다.

▲ 남화사 조전 내부에 모셔진 감산덕청 진신상.
31살에 깨달음을 얻은 덕청. 그는 새삼 인연의 지중함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도 부모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덕청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거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산문에 든 출가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1546년 12월, 금릉(金陵) 전초(全椒)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생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떤 경전이든 한두 번 들으면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 덕청은 12살이 됐을 때 멀리 남경의 보은사(報恩寺)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뜻을 부모에게 밝혔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독려하고 아버지를 설득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덕청은 보은사에서 불경은 물론 사서삼경과 도교 경전까지 두루 익혔다. 덕청이 삭발하고 정식 승려가 된 것은 19살 때였다. 교학에 대한 안목을 갖춘 그는 오래지 않아 여기저기서 강사로 초빙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26살 되던 해 덕청이 운수행각에 나섰고, 30살 2월에 오대산 용문사 인근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곳에서 일대사(一大事)를 마친 덕청은 부모를 위해 사경에 착수했다. 가장 방대한 경전인 ‘화엄경’ 전부를 자신의 피를 짜내 한 글자씩 써나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덕청의 ‘화엄경’ 필사 소식을 전해들은 황태후가 금종이를 보내와 자신이 태자를 낳을 수 있도록 발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덕청은 한 글자에 한번 씩 염불을 해가며 정성껏 경전을 써내려갔다.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대화 도중에도 사경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획하나 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렇게 몇 해 뒤 피로 쓴 ‘화엄경’이 완성됐다. 황태후는 정말 아들을 낳았고, 그녀는 그 공이 덕청에 있다고 믿었다. 덕청이 퇴락한 사찰과 보탑을 중수할 때 황후가 적극 지원했다. 사자(使者)가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주고 간 모든 돈은 흉년이 들어 굶주린 이들을 구제하는 데 썼다. 덕청에 대한 황후의 신뢰는 더욱 깊어갔다. 황제가 칙령으로 방대한 대장경을 15부 인쇄해 천하의 명산에 하사할 때도 황후는 덕청을 잊지 않았다. 교화를 위해 동해지방으로 떠나있던 덕청을 위해 귀한 대장경을 그곳에 실어 보냈다. 나중에는 그의 출가 사찰인 보은사까지 대장경 1부를 운송해주었다.

덕청은 경전을 강의하고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해설서를 집필했다. 1593년 대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굶어 죽어갈 때는 직접 배를 타고 요동으로 건너가 콩 수백 석을 사와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덕청에게 큰 마장이 찾아온 것은 그가 50살 되던 해인 1595년이었다. 황제는 덕청에 대한 황태후의 절대적인 지지를 탐탁찮게 여겼다. 이를 알아챈 한 궁정의 실권자가 예전에 도사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사실인양 꾸며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불 같이 화냈다. 도교 사원의 터를 빼앗고 대장경을 보관하라고 보낸 황실의 공금을 유용했다며 덕청을 감옥에 가뒀다. 혹독한 심문은 8개월간 지속됐다. 그런 뒤에야 모든 것이 덕청을 음해하기 위한 모략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황제는 허락 없이 절을 지었다는 죄를 물어 덕청을 남쪽 변방인 뇌주(雷州)의 군사 주둔지로 귀양 보냈다.

귀양지 인근에는 육조혜능이 머물던 보림산 남화사(南華寺)가 있었다. 유배 길에 이곳에 들른 덕청은 가슴이 아팠다. 선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사찰이 황폐해지고 혜능의 진신상을 봉안한 조전(祖殿)은 퇴락해 방치되고 있었다. 덕청은 처연한 심정을 뒤로 한 채 다시 유배지로 떠났다.

▲ 운서주굉과 감산덕청. 그들은 염불과 참선수행의 깊은 경지에 이른 고승이었으며, ‘융합과 화해’라는 시대적인 요구에 충실한 선지식이었다. 사진은 육조혜능이 선종을 개창한 광동성 보림산 남화사의 조전(祖殿)으로 이곳에는 혜능과 덕청 등 진신상이 모셔져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뇌주에 도착한 덕청을 그곳 사람들은 크게 환영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난 대사마(大司馬)가 귀의한 것을 비롯해 고관들이 속속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덕청은 그들을 위해 경전을 강의했으며, 동물을 죽여 제사를 지내는 그들의 풍습을 바꾸려고 적극 방생을 베풀었다. 무엇보다 덕청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남종선의 성지인 조계도량의 중창이었다. 그는 유배지에 귀양 온 처지였지만 관료와 대중들의 지원에 힘입어 산문 입구에 즐비한 정육점을 없애는 등 도량을 정화해나갔다. 이어 대대적인 복구 작업에 착수해 길을 새로 내고, 승려들을 선별해 계를 주었다. 대중들이 지켜야할 청규를 다시 제정했으며, 빼앗긴 사중의 재산을 되찾았다. 역대 조사를 모신 조전도 새롭게 중수했다. 덕청이 유배온 지 7년만에 남화사는 옛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덕청은 또 불교를 중심에 놓고 유교, 도교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기존의 고답적인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게 보려는 지식인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취지에서였다. 그는 ‘원각경’ ‘화엄경’ ‘대승기신론’ ‘능엄경’ 등 불경은 물론 ‘장자’와 ‘도덕경’ 등도 새롭게 해석했다. 주굉이 그랬듯 덕청도 다양한 저술을 통해 ‘융합과 화해’라는 시대적인 요구에 충실했던 것이다.

덕청이 주굉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유배에서 풀려났을 무렵이다. 그동안 유배지에서 교화와 불사에 힘을 쏟던 덕청도 문득문득 자신의 업장이 두터움을 깨달았다. 젊은 시절 각지를 자유로이 행각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때면 오대산에서 주굉과 나눴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덕청은 편지에서 주굉과의 옛 인연을 적었다.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귀양을 간 것에 대한 자신의 허물도 털어놓았다. 이어 주굉의 전법을 찬탄한 뒤 감사의 마음을 담은 향을 인편에 보냈다. 향이 세상을 향기롭게 하듯 주굉의 법이 뭇 중생들의 고단한 삶을 평화롭게 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다시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1615년 7월4일, 주굉은 서쪽을 향해 염불하고는 단정히 앉아 사바세계를 떠났다. 세수 81, 승랍은 50세였다. 주굉의 아내였던 탕씨도 출가한 뒤 ‘주금(袾錦)’이라는 비구니로 살며 부지런히 정진하다가 주굉보다 1년 앞서 입적했다.

덕청이 운서사에 도착한 것은 주굉이 정토로 떠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그는 주굉의 영전에 참배하고 그 절에 머물며 20일 동안 매일 대중들을 위해 소참 법문을 해주었다. 주굉이 남모르게 했던 일을 들려줄 때면 눈물을 쏟는 제자들도 여럿 있었다. 덕청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주굉의 일생을 정리한 탑명을 쓰고 찬탄하는 시를 지었다.

‘삼독의 불길이 치성하고 다섯 가지 열독이 놀랍고 두려우니/ 누가 능히 약석(藥石)으로 문득 청량케 하며/ 욕망의 바다가 넘쳐흘러 그 파도가 하늘까지 차고 넘치니/ 누가 능히 이들을 건지기 위해 큰 법의 배를 띄우리오/ 오직 우리 (주굉) 큰스님만이 실로 원력을 타고/ 그 가운데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하셨네….’

덕청은 노구를 이끌로 이곳저곳을 행각하며 퇴락한 사찰을 복원했다. 77살 되던 해, 생이 오래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는 육조혜능이 머물던 조계로 향했다. 그곳에서 덕청은 ‘능엄경’과 ‘기신론’ 등을 강연하고 대중을 위해 계를 설했다. 다음해 10월11일 덕청은 대중들에게 “여러분, 나고 죽는 일이 크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은 금방 닥쳐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앉은 채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덕청은 세상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나도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제자들은 시신을 넣어 보호하도록 만든 호감(護龕)에 스승의 육신을 모셔 땅에 묻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뒤 열어본 덕청의 모습은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덕청의 문손들은 그를 감산사에 모시고 대를 이어 덕청의 육신을 보살폈다. 지금은 덕청 자신이 유배시절에 손수 중건했던 남화사 조전에 혜능의 진신상과 함께 모셔져 있다.

주굉과 덕청. 그들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불교, 유교, 도교를 두루 알지 못하면 더 이상 지식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불교에 호감을 가진 거사들 역시 자신의 신앙과 유학자로서의 정체성이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공덕이 주굉과 덕청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자백진가(紫柏眞可, 1543~1603), 우익지욱(藕益智旭, 1599∼1655)과 더불어 명나라 4대 고승으로 꼽히는 감산덕청이 운서주굉에게 보낸 편지는 덕청의 문집인 ‘몽유집(夢遊集)’에 수록돼 있다.

mitra@beopbo.com

참고자료: ‘감산자전’(감산 지음, 대성 옮김, 여시아문), ‘연지대사 주굉 스님의 일생’(감산덕청, 연관 옮김, ‘죽창수필’에 수록), ‘선관책진’(운서주굉 지음, 연관 옮김, 호미), ‘운서주굉의 방생결사에 나타난 수행론: 거사들의 수행을 중심으로’(김성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50집), ‘운서주굉의 선관에 대하여’(김석암, 한국선학 제7호) ※감산덕청 스님 편지 원문 번역은 박상준 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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