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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이해’ 주장은 선 생명력 짓밟는 자해”

  • 기고
  • 입력 2015.09.24 15:47
  • 수정 2015.09.24 16:50
  • 댓글 29

박태원 교수, 현응 스님 비판
사실 이해와 논거 타당성 부실
깨달음과 역사 결합 멋지지만
공허한 지적행위 그칠 수 있어
수행현실 비판 필요성 공감하나
원천적인 힘까지 간과해선 안돼

▲ 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교수
“연기만 잘 ‘이해하면’ 사회와 역사의 문제들을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무지다. 현실은 상호 충돌하는 복잡한 이익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가려는 과정과 노력은 결코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 아무리 연기적 이해를 고도로 계발했다 해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과 결과는 생각과 다르거나 훨씬 지난하다. 그런 세속과 역사를 향해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을 소리 높이는 것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자칫 공허하거나 지적 자위행위에 그칠 수 있다.”

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교수가 법보신문 기고문을 통해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견해를 강하게 비판했다. 박 교수는 장문의 기고를 통해 현응 스님이 주장하는 깨달음과 역사 문제를 비롯해 불교의 언어관, 불교인들의 글쓰기, 선불교에 대한 이해 및 가치 등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뤘다.

박 교수는 현응 스님이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해 “현응 스님의 언어는 종교적, 호소력은 지닐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안이한 자기 완결이고 공허한 독백”이라며 “불교 내부의 글쓰기는 이제 이런 식의 선언적 전망만으로 사회·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대신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또 “선불교의 언구를 공·불성·여래장의 언어에 의거해 ‘이해방식’으로 소화하는 태도, 간화선을 신비주의 수행기법으로 간주하는 시선은 선불교의 생명력을 짓밟는 내부 자해라고 생각한다”며 “선종 선불교의 정학(마음수행) 통찰을 이해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거나, 깨달음의 지적(知的) 조건과 이해의 토양을 황폐화시키는 깨달음 신비주의로 수용하는 것은 선불교 고유의 생명력과 기여분을 놓쳐버리는 일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 일탈의 두 극단은 이해선호 그룹과 선정선호 그룹 모두가 극복해 가야할 과제”라며 “성철 스님의 ‘문자 보지 말고 오직 참구해라’는 식의 강한 이해비판은 선불교마저도 이해방식으로 소화하려는 선종 내부경향에 대한 우려와 경고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만약 깨달음이 조금만 애쓰면 쉽게 터득된다는 ‘연기·무아·공에 대한 이해’일 뿐이라면 불교인들이 굳이 사회·역사·세계의 문제와 깨달음을 결합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달은 보살들이 세간 모든 영역에서 애쓰고 있는 셈이 아닌가?”라며 “그렇다면 그들과 협력하려는 선택이 불교 구도자들의 과제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불교의 고유적 생명력이나 기여분은 어디서 확보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박 교수는 “정학·선수행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과 그것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태도의 필요성에는 십분 공감한다”고 전제한 뒤 “정학·선수행의 체득이 오만과 특권, 개인적 밀실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심화시키고 삶을 원천에서부터 개방시키는 힘으로 작동하는 사례들이 생각보다 풍부하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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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교수 기고 전문

깨달음은 이해인가?

1. 한국불교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한 분의 깨달음 소견이 자못 화제다. 조계종 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이, 불교의 가장 근원적 주제라 할 ‘깨달음’을 ‘지적 이해’라고 규정하는 동시에, 부처님은 선정이나 삼매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놀란다. 이해의 계발(慧學)과 행위 단속(戒學)은 마음지평 바꾸기(定學)와 융합되어야, 그것을 조건으로 온전한 깨달음, 궁극적 이해가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 이래의 수행 전범인 삼학(三學)이 아니던가. 니까야/아함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 정학이고 선정 법문이 아니던가. 그리고 종래 간과되던 부처님 정학 법설의 핵심을 발굴하여 천명하면서 선(禪)에서 불교의 원천 생명력을 확보하려는 것이 선종 선불교이고, 그 전통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수행공동체가 조계종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조계종 구성원들의 불교 이해를 설계하는 교육기획의 소임을 맡은 분이, 정학을 이해로 치환시켜 정학의 정체성을 증발시켜 버린다. 부처님 법문의 핵심 구조를 부정하는 동시에 조계종의 존재 근거를 근원에서 부정하는 소견을, 불교 살리는 길이라며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셈이니,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소견이 워낙 파격적이고, 발언자의 소임이 지니는 의미가 특별하다 보니, 포폄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국불교의 미래적 전망에 있어 스님은 ‘전위’(前衛)에 서 있다. 그만큼 대중적인 가독성은 기대하기 어렵고 시비(是非)와 오독(誤讀)의 가능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나는 현응 스님의 글과 주장은 후일 21세기 한국불교를 논할 때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조성택,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독법’)는 극찬과, ‘소견의 기초가 되고 있는 선 수행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실하다. 부실한 자재들로 지은 날림 건축물이다.’는 강한 비판적 시선이, 대쪽처럼 갈라진다.

이런 논란거리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지만,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불교를 위한 충정이고 애정의 고언이다.’는 식의 수사로 이견의 균열을 메워보려는 것은 피차 도움이 안 된다. 이런 문제 상황에서는 각자 에두르지 않고 솔직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 견해 차이의 조건인과를 분명하게 개진하는 것이 상호작용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화쟁은, 견해의 조건인과를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차이의 향상적 상호작용’(通攝)을 전개하는 과정이자 그 결과이지, 차이의 봉합이나 제거가 아니다.

현응 스님의 관점은 과연 ‘저만치 앞서가기에 이해와 수용이 어려운’ 역사적 전위 지성인가, 아니면 부실한 이해와 엉성한 논거들 위에 발설한 치우친 견해인가? 우선 필자의 생각부터 솔직히 털어 놓겠다. 사실이해와 해석의 타당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나는 후자로 본다. 그러나 관심 두어 응답해야 할 필요가 있는 소견이라고 본다.

필자는 불교철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학인이다. 원효와 선, 니까야/아함에 심취하고 있다. 실존적으로는 선종 선불교가 건네준 선물이 인생의 결정적 분기점이었고 첫 번째 축복이었다. 지적 호기심을 넘어 실존 차원의 치유를 직접 겪어보고 싶은 의욕이 그 축복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원효의 언어가 발산하는 깊은 내공에 끌려 그를 불교지성과 삶의 한국적 모델로서 흠모하며 몰입하고 있고, 니까야/아함은 이 모든 축복의 의미와 내용을 확인시키고 끝없이 향상시켜 주는 원천으로 간수해 가고 있다. 심히 초라하고 빈약한 살림이긴 해도, 적어도 내 실존의 근원적 안식과 열정, 이해와 전망의 원천은 분명 선종 선문에서 그 실마리가 잡혔다. 니까야/아함을 주석서나 상좌부의 시선에 붙들리지 않고 음미할 수 있는 근거도 선문에서 생겼고, 선종 선불교에 대한 교계와 학계의 통념적 이해를 비판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근거도 선문의 축복에서 챙길 수 있었다. 개인적 삶의 핵심을 구성해 온 조건들이 이러하기에, 필자는 현응 스님의 견해가 어떤 관심과 고민, 의문에서 발생한 것인지, 그 사연의 연기가 잘 읽혀진다. 현응 스님의 생각을 발생시킨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과 열정이 충분히 교감된다. 그래서 몇 자 적어볼 의욕이 생겼다.

2. 현응 스님 주장의 초점은 ‘깨달음은 이해일 뿐’이라는 데 있다. 돈점논쟁에서라면 ‘돈오는 해오(解悟)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선교론(禪敎論)에서라면 ‘선은 교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소견의 핵심내용을 추리면 이렇다. - ‘깨달음은 이해다.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연기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써 해결하는 것이다. 정학 선 수행은 이해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화해 간 것이며, 이 변화는 비불교적 일탈이고 변질이다. 선(禪) 수행도 지적 이해일 뿐이다. 지적 이해가 아닌 것을 선(禪)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헛짓이고, 그런 선을 설하는 것은 기만이다.’

이런 관점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하는 논거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수십 년을 투자해도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니 환타지를 좇는 것이다.’가 하나이고, ‘부처님도 선 수행을 가르친 적은 없다. 초기경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정학 선수행의 축인 사띠도 그저 기억하여 성찰함으로써 이해를 높이라는 것인데, 이해 이상의 신비한 무엇이 있어 그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변질되어 갔다. 부처님 육성에 의거해 보아도 깨달음은 이해일 뿐이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며, ‘중국 선종도 원래는 이해의 가르침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었다. 간화선이라는 것도 대화 내용을 사유하라는 것이다. 사띠든 간화선이든 둘 다 설법내용이나 대화를 늘 기억하여 성찰하는 방법이었는데, 송나라 말기 이후 특정한 어귀(語句)에 집중하여 선정에 깊이 드는 것을 강조하는 선(禪)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논거이다. 사띠와 간화선 본래의 ‘이해하는 깨달음’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질된 것이며, 이는 비불교적 일탈이라는 것이 현응 스님의 깨달음관이다.

3. 전문지성이나 학자들은, 현응 스님의 글이 논거도 부실하기 이를 데 없고 이미 축적된 학문적 성과의 기초들도 소화하지 못한 거친 발설이기에, 관심 둘 필요도 없고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할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현응 스님의 글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관점과 명제들은 문제투성이로 보인다. 하나하나 그 사실관계와 타당성을 따지면 현응 스님의 언어 집은 이내 폭삭 주저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응 스님의 관점과 주장이 주목할 필요도 없고 응답할 가치도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사실이해와 논거의 타당성은 심히 부실하지만, 현응 스님의 견해에는 불교를 탐구하는 학인들의 다수가 암암리에 공유하는 중요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은 그것을 자신의 언어 수준에서 정직하게 발설한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현응 스님의 글과 주장은 ‘상식적’이다. 많은 공감과 함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현응 스님의 글을 순수한 학술논문으로 독해한다면 글의 본래 취지를 잡지 못하거나 스님의 논지를 오독(誤讀)할 위험이 있다. 현응 스님의 글이 비록 학술적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학술’적 관점으로 독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라고 하는 조성택교수의 감흥은, 그 공유분(公有分)에 대한 교감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그 공유분인가? 다름 아닌 ‘이해로 불교 읽기’이다.

필자는 불교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심축 하나가 ‘이해’의 문제라고 본다. 부처님 재세 때부터 지금까지, 교학이든 수행이든, 개인 치유든, 세계 치유든, 어떤 범주 어떤 주제를 선택하더라도, 그 안에는 ‘이해에 대한 시선’ ‘이해와의 관계 설정’ 문제가 그 원천에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전문지성이든 대중지성이든, 불교와 관계 맺는 방식이 어떤 것이든, 어떤 불교관으로 불교에 대해 어떤 전망을 하든, 결국에는 ‘이해에 대한 시선’이 어떤가에 따라 그 내용이 결정되어 왔고, 결정되고 있으며, 또 결정될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언어개념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언어개념의 틀이 제공한 경험의 질서와 체계가 ‘이해’이다. 언어와 개념은 세계의 선별적 분류이자 제한이다. 이 선별과 제한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개념적 분류와 제한이 정밀해져 간 과정은 인간의 생존력 및 환경 적응력 진화와 맞물려 있다. 그런데 선별분류와 제한은 어쩔 수 없이 왜곡을 수반한다. 인간의 선천적 능력으로 간주하는 언어능력과 그로 인한 이해는 분명 세계 이후의 발생이다. 세계가 있은 후에 인간의 언어와 개념능력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 순리다. 그렇다면 언어개념을 배경조건으로 수립된 경험, 언어의 틀을 제한조건으로 삼아 발생한 이해는, 존재/세계의 본래 지평과 상응하지 않는다. 언어로 세계를 읽는다는 것,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선택한 가공이자 왜곡이고, 본래지평과의 어긋남을 운명처럼 안고 있다. 언어/이해의 원천 딜레마이다.

비록 왜곡을 수반하지만, 언어적 분류와 제한이 제공하는 탁월한 문제해결력 때문에 인간은 언어세계에 흠뻑 도취하였다. 부처님이 등장한 2550여년 전후의 인간은 현재 우리가 구사하는 고도화된 언어능력의 원형 수준을 정착시킨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 그리고 그 분과 대화하는 이들의 언어가 보여주는 개념 구사력, 논리, 분석, 비유, 상징 등의 수준은 현재의 언어수준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부처님 시대에는 언어적 선별과 제한의 효용성이 이미 고도화 단계에 진입한 동시에, 언어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이해경험과 언어 이전 세계지평 사이에 간극이 심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적 문제해결력과 언어적 왜곡이 선명하게 엇갈리는 시점이었다.

종종 시대 조건은 그에 걸 맞는 영성에게 제 때에 자리를 마련해 준다. 거의 동시대에 등장한 붓다, 노자, 장자는 흥미롭게도 공히 언어적 왜곡의 문제를 들추어낸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통찰은 가장 완벽한 수준을 가장 정밀한 방식으로 펼친다. 이분들은 언어의 그늘을 언어를 통해 밝힌다. 인간의 언어능력에는 자기성찰에 의한 자기치유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 언어를 활용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노예로부터 언어주인으로 환골탈태하는 길을 연다. 단, 언어/이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특히 붓다와 장자는 그러한 통찰을 명시적으로 개진한다.

현실에서 질리도록 확인하는 것이지만, 언어적 성찰에 의한 이해의 자기치유와 삶/세계치유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언어/이해를 통해 언어적 왜곡을 교정하는 일은, 언어 범주 내에서의 자리바꿈이 되곤 한다. 언어의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언어 밖의 지평과 접속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언어/이해를 통해 언어/이해의 울타리 끝까지 가는 일은 가능해도,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언어/이해의 자기향상과 자기치유는 운명적으로 ‘언어 안에서의 일’이다. 언어적 수정과 치유는 매우 강력하기도 하고 단기간에 뚜렷한 변화를 발생시키긴 하지만, 근원적 자기 제한이 있다. 언어를 통해 언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애초에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다시 말해, 이해만으로 삶과 세계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언어적 성찰을 통해 언어의 속성과 왜곡을 포착하고, 언어에 제한되지 않은 지평의 이해를 통해 전망하는 정도는 현실화되지만, 그것만으로 언어의 경계선을 넘기는 어렵다. 이해의 치유력은 분명 매우 중요하고 효과도 강력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소유 탐욕의 무한확장, 적개심에 찬 분노충동이 해롭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도, 오해나 독선, 편견을 대치하는 이해를 확보하여도, 마치 비웃기나 하듯 대상만 만나면 그 오염들이 솟구쳐 오른다. 아직 이해력이 충분하지 않아서라고? 잘 이해하고 충분히 이해력이 발달하면 해결된다고? 솔직해지자. 이해만으로, 이해에 의거한 실천만으로, 삶의 오염과 세계 왜곡을 말끔히 걷어냈다는 사람 있으면 만나보고 싶다. 언어/이해로써 실존과 역사의 오염과 굴곡을 완전히 해결한 사례가 있으면 보고 싶다. 언어/이해가 불필요하거나 무능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직시하자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이해만을 통해 자기 해탈과 세계 해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이해 환타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언어와 이해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것에만 기댈 수도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위대함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이해의 자기성찰과 자기치유력을 최대한 수용하고 활용하면서도, 언어/이해의 길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길을 연다. 흔히 ‘마음 수행’이라 부르는 정학의 길이고 선(禪)의 길이다. 부처님이 고행도 아니고 선정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니까야/아함을 건성으로 읽어도 이런 소리는 못한다. 한국 근대불교학/인도철학의 초기단계에 일본학자들의 소견을 이식시키는데 급급하던 시절의 메마른 수입지식이, 아직도 한국 불교지성의 중심부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부처님이 선 수행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기본을 의심케 한다. 대낮에 혼자 눈 감고 해가 없다고 말하는 격이다. 부처님이 얼마나 선정 수행을 역설하고 계신지를 확인시켜 주는 니까야/아함의 수없는 증언들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것은 기이하다. 있는데도 보이지 않으면 시력을 교정하고, 좋은 음식이 소화가 안 되면 소화력을 키울 일이다. 있는 것을 못 보고서 없다고 소리치고, 산해진미를 못 먹을 음식이라 내치면서 남들마저 그렇게 알라고 외칠 일은 아니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부처님 말씀에 의거해 단언하건대, 부처님은 자신이 수립한 ‘새로운 선정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셨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새로운 선 수행을 가르치고 역설하셨다. 경증과 해석논리를 내놓으라면 얼마든지 제시하겠다.

4. 그런데 부처님의 정학 선수행 법설에 다가서려 할 때, 심각한 난관 하나에 봉착하게 된다. 정학 선수행의 부처님 법설이 안내하는 지평이, 이해하기도 접속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이 언어적 사유의 발달을 진화의 중심축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언어/이해의 체계와 질서에 대한 의존과 신뢰를 본능처럼 내면화시켜 온 인간에게, 언어/이해의 범주제한을 벗어나는 길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출가인이든 재가인이든, 언어질서에 포착되지 않는 내용, ‘이해’로 읽어지지 않는 내용은 너무 낯설고 어렵다. 이런 ‘인간 특유’의 사정은 부처님 1세대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미 뚜렷하게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 이해로 읽을 수 있는 내용에 몰입하는 ‘이해 그룹’과, 언어/이해의 길에서 비껴나 있으면서 기존의 선정 수행법과도 다른 새로운 선정 수행에 관한 가르침의 소화에 더 치중하는 ‘선정 그룹’이, 구분될 수 있을 정도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현존 니까야/아함이 이해 중심의 설법과 선정 중심의 설법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형태로 결집되어 있다는 것은, 부처님 설법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해 선호’와 ‘선정 선호’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때, 같은 사람들에게 설한 동일 설법이, 각각 이해설법과 선정설법으로 내용을 달리하여 기록되고 있는 사례들, 「쭌다 경」(A6:46)처럼 위빠사나 그룹과 사마타 그룹의 갈등과 그 해소 노력이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과 ‘참선하는 비구들’의 상호 비방과 존중의 문제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례도, 그런 사정의 반영일 것이다.

서구 학인들의 눈에도 니까야/아함의 이러한 대비적 구조는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푸셍Poussin은 이 차이를 교단 내의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의 문제로 대비시켜 보기도 한다. 위빠사나 방식은 이해/관점의 변화를 목표로 하므로 ‘합리적’으로 보는 반면, 사마타 선정삼매 수행은 지적 이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내용이므로 ‘신비적’이라는 말로 구분한 것이다. 이해의 합리주의 전통에 기대어 불교에 접근할 경우, 정학의 사마타 선 수행은 그 지적 전통에 비추어 낯설고 난해하게 보이므로 ‘합리성 범주 밖의 수행법’이라는 의미로 ‘신비주의’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부처님 정학에 대한 니까야/아함의 언어를 읽는 시선은 크게 두 유형이다. 하나는 ‘면밀한 관찰을 통한 온전한 이해의 확보’를 겨냥하는 위빠사나 행법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마음집중을 통해 삼매를 성취’하려는 사마타 행법이다. 분명 위빠사나 행법은 이해선호 전통의 계승이고, 사마타 행법은 선정선호 전통의 계승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현재 유통되고 있는 위빠사나/사마타 행법은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부처님 위빠사나/사마타 법설에 대한 일종의 수행 해석학이라는 점이다. ‘니까야/아함의 위빠사나/사마타’와 ‘현행 위빠사나/사마타 행법’이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현행 위빠사나/사마타 행법의 기본 내용은 이미 『청정도론』에 확립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른 시기부터 부처님 정학에 대한 해석의 시선은 ‘이해’와 ‘집중’으로 고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자신의 해탈 법설을, 행위 수행(계학)이라는 지반 위에, ‘언어/이해를 통한 향상의 길’(혜학)과, 언어/이해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새로운 선정 수행의 길’(정학)을, 두 기둥을 세우는 구조로 설하고 있다. 이 지반과 두 기둥이 서로 지지하고 결합하면서 삶과 역사의 ‘궁극적’ 치유를 가능케 하는 전대미문의 장(場)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법설 구조는 문헌적 근거로 보나 축적된 해석과 검증의 전통으로 보나 명백하다. 다만 ‘해석과 검증의 전통’이 얼마나 적절하고 충분한 것인가는 항상 열어 놓고 탐구해야 하는 재검토/재구성의 대상이다. 재검토/재구성하려는 진보적 태도가 전통과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너무 취약하고 훼손되어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부처님 법설에 대한 ‘해석과 검증의 전통’에서 압도적 주류를 차지한 것은 ‘이해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이해의 능력을 통해 먹이사슬의 정점을 차지한 것이 인간이라는 점, 언어/이해의 프레임이 인간의 경험을 구성한다는 점, 언어/이해의 방식으로 세계를 읽는 태도에 대한 신뢰와 선호는 거의 본능 수준으로 내면화되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부처님 법설에 대한 해석과 검증 과정에서 ‘이해 방식’이 주류를 차지한 것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인다. 아마도 부처님 직제자들에서부터 이런 ‘이해 방식’ 읽기의 편향성은 뚜렷해졌을 것이다. 연기/무아/고에 대한 지적 이해를 통해 삶과 세계를 치유하려는 사람들이 다수였던 데 비해, 정학 선수행 법설의 수용과 검증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소수였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처님의 정학 선수행 법설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해 방식’을 선호하는 위빠사나 행법자들과 ‘선정 방식’을 선호하는 사마타 행법자들 사이의 수행론 이견과 갈등은, 이해방식 선호그룹이 사마타 수행을 ‘대상집중을 통해 초월능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부처님 법설을 이해방식으로 읽는 사람들이, 언어/이해의 방식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부처님의 새로운 선정 수행을, ‘집중과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전통적 선정수행에 대입시킴으로써 사마타 법설에 대한 해석과 위상을 정리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부처님의 정학 내지 사마타 행법을 ‘집중수행’으로 파악하는 해석전통은 부처님 직제자들부터 형성된 ‘오래된 선관(禪觀)’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선관이 과연 부처님 정학 법설의 내용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상당부분 회의적이다. 어쩌면 불교전통은 부처님 정학의 내용을 예상보다 훨씬 피상적으로, 혹은 잘못 읽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부처님 법설을 읽어온 교학과 수행전통에서, 부처님 재세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취약한 부분이 정학/선의 문제로 보인다. 부처님의 정학 법설을 읽어 온 ‘이해’나 ‘집중’의 시선은 그 타당성이 제한적이라고 본다. 기존의 시선에 갇히지 않는 열린 탐구가 절실한 부분이 정학/선이다. 그리고 선종 선불교는 기존의 정학 독법이 지닌 문제점을 들추어내면서 부처님 정학의 본령을 회복시키기 위해 전혀 새로운 선관을 천명한 것이며, 이 선불교의 선관은 부처님 정학의 본령을 읽는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기여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선불교에 대한 통념적 이해들을 근원적 수준에서 재검토하고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본다.

선불교의 언구를 공/불성/여래장의 언어에 의거해 ‘이해 방식’으로 소화하는 태도, 간화선을 신비주의 수행기법으로 간주하는 시선은, 선불교의 생명력을 짓밟는 내부 자해라고 생각한다. 선종 선불교의 정학 통찰을 이해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거나, 깨달음의 지적(知的) 조건과 이해의 토양을 황폐화시키는 깨달음 신비주의로 수용하는 것은, 선종 선불교 고유의 생명력과 기여분을 놓쳐버리는 일탈이라 생각한다. 이 일탈의 두 극단은 이해선호 그룹과 선정선호 그룹 모두가 극복해 가야할 과제다. 성철스님의 ‘문자 보지 말고 오직 참구해라’는 식의 강한 이해비판은, 선불교마저도 이해방식으로 소화하려는 선종 내부경향에 대한 우려와 경고일 수 있다.

부처님이 기존의 선정수행과 고행수행을 극한까지 겪어보고 새로 수립하여 설한 선정 수행법은, 전통 선정수행의 일반적 방법론인 ‘집중 수행’으로 보기 어렵다. 만약 부처님 선정법도 ‘대상집중 수행’이었다면 모든 정학 설법에서 수시로 그렇게 명확히 설했어야 한다. 그러나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부처님 설법에서 그런 내용은 없다. ‘니미따(相)나 산냐(想)에 빠져들지 않는 선정 수행’을 펼친 다양한 법설들은 실로 심오하지만, 대상집중이 그 방법이라고 명시되지는 않는다. 사선(四禪) 정형구 유형들에서 간혹 나타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의미도 그저 대상집중 상태라 보기는 어렵다. 심일경성이 부처님 육성인지 후학들의 선정 이해가 반영된 것인지도 확정하기 어렵지만, 부처님이 이것을 ‘대상에 대한 마음집중 상태’라는 식으로 명확히 말한 바는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부처님 선정 수행법이 흔히 이해하듯 ‘대상에 마음을 매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집중수행’이라면, 부처님처럼 정밀하고 명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분이 그것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부처님 정학/선을 ‘이해 수행’으로 읽는 위빠사나 시선도 그 타당성이 제한적이라 생각한다. 사념처라는 정념의 종합체계가 부처님 육성인지, 아니면 육근 수호나 신념처, 수념처 등으로 설해지던 부처님 정념 수행을 후학들의 이해를 반영하여 종합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사띠(念)로 ‘기억하듯 간수해야 할 국면’이 ‘안다(pajānāti)’ 일구(一句)에 그 핵심이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 ‘pajānāti’의 ‘아는 국면’을 통상의 언어관념에 비추어 ‘면밀한 관찰을 통해 온전한 이해를 성취하려는 것’으로 처리하는 시선은 언어/이해 선호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그런 읽기가 얼마나 타당한지 의문이다. 그저 삐딱하게 고개 젓는 것이 아니라, 니까야/아함의 풍부한 경증과 새로운 해석을 가지고 던지는 의문이다.

5. 어느 것을 어느 모로 짚어보아도 현응 스님의 소견은 그 논거들이 매우 부실하다. 사실에도 안 맞고 해석도 억지스럽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런 주장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이다. 조성택교수가 “나는 ‘이루는 깨달음’이 아니라 ‘이해하는 깨달음’이라는 현응 스님의 주장을 21세기 한국불교를 위한 새로운 교판의 하나로 검토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까지 상찬하면서, 현응 스님의 소견에 적극적 지지를 표명하는 이유도 그 호소력 때문이다. 무엇이 불교 전문연구자에게까지 그런 호소력을 발생시키는가? 앞서 살펴본 ‘이해’의 문제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특히 선종 선불교 전통이 주도하는 한국불교에서 목격되는 수긍 못할 현상들에 대한 비판이 호소력의 원천이다.

불교인들의 글쓰기는 크게 두 유형이다. 교학이나 수행의 내부 주제들을 탐구해 가는 글쓰기가 하나이고, 불교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아내는 글쓰기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논거와 논증의 타당성을 엄밀하게 다루기에 이론 호소력이 강점이고, 후자는 부인하기 어려운 현상적 문제점을 논거로 삼기에 현실 호소력이 돋보인다. 전자를 비시간적 글쓰기, 후자를 시간적 글쓰기라 불러보자. 시간적 글쓰기는 강한 현실 호소력에 비해 그 논거와 논증의 정밀성이 상대적으로 허술한 경우가 흔하다. 추정컨대, 현실 비판은 몇 가지 적절한 사례들만 채집해도 호소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비판과 대안의 논거나 내용을 엄밀하게 취급하려는 태도가 취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불충분한 사례들만 가지고 귀납적 일반화를 시도해도 묘하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이 시간적 글쓰기의 특징이다. 구도자들의 열정과 대중적 기반이 강하게 얽혀있는 종교 범주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논증과 귀납적 비약의 부실을 생생한 현장의 필요가 덮어버리기 쉽다. 그래서인지 시간적 글쓰기 가운데는 현실 호소력의 반사이익에 기대어 주장의 타당성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글들도 많다. 또한 시간적 글쓰기가 즐겨 채택하는 개념은 ‘역사’ ‘현실’ ‘사회’라는 개념이며, 거시담론으로 만족하면서 세부 콘텐츠로 진입하지 않는 선에서 그치는 경향이 있다.

현응 스님의 글은 전형적인 시간적 글쓰기 유형이다. 그리고 이런 글쓰기가 안고 있는 문제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런데 현응 스님의 글이 강한 현실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불교의 궁극 과제인 ‘깨달음’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의 의하면, 한국불교에서 목격되는 깨달음 관련 현상들은 ‘이루려는 깨달음’의 소산이며, ‘이루려는 깨달음’은 선정 수행을 기반으로 하는데, 선정 수행에 대한 근거는 부처님 법문에서부터 원래 없으며, 선종 선불교에도 본래의 근거가 없으니, 선정에 기반한 깨달음 추구는 일탈적 변질이라는 진단이다. 이렇게 규정하고 비판하는 현실 근거는 두 가지다. ‘수십 년 투자해도 성공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하나이고, ‘깨달음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관념이 모호하여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그리고 ‘이루려는 깨달음’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해하는 깨달음’이다.

이에 조성택교수는 선불교 비판론자들이 즐겨 거론하는 내용들을 ‘체험불교의 문제’로 재구성하여 덧붙이며 힘을 실어준다. ‘체험’이라는 용어에 담아내는 그의 다음과 같은 비판인식은 선불교 비판론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할 것이다. - “깨달음이란 일종의 체험인가?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공적(公的)인 제도적 종교에서 ‘체험’만이 유일무이한 표준이자 진리를 판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적인 오만이며 수행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편견이다. 현응 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미래의 희망을 만들기 위한 스님의 신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신념과 선지(先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오랜 침체에 빠져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갱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이해하는 깨달음’이요, 깨달음과 역사가 둘이 아님을 재확인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기존의 선불교는 ‘근거도 없고, 성취의 변화가 어렵고, 목표가 불분명하며, 방법도 모호하기에, 환타지를 좇는 셈’이라는 것이 현응 스님의 ‘이루려는 깨달음’ 비판의 핵심논거이고, 선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 체험이 주관성/특수성/폐쇄성을 지닌 비개방적 특권이어서 깨달음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이 조성택교수의 부연 설명이다. 두 사람 모두 ‘이루려는 깨달음’과 ‘이해하는 깨달음’의 대비를, 불교 전통과 현실을 비판적으로 읽는 독법의 프레임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루려는 깨달음-선정수행-무근거-모호-성취불가-환타지-닫힌 체험-비일상/비역사’라는 개념군집과, ‘이해하는 깨달음-명확한 내용-쉬운 성취-개방/공유가 쉬움-역사와 결합하기 쉬움’이라는 개념군집의 대비가 이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다.

이 프레임은 깨달음 문제를 ‘체험’과 ‘이해’의 대비로써 읽는다. 이러한 대비 설정 자체가 부적절해 보이지만, 일단 이 프레임에 따라 생각해 보자. 이 프레임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관점과 이해들에 대해 많은 의문과 반론들이 예상된다. 이러한 독법이 타당성을 확보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성실하게 응답해야 한다. - ‘이루려는 깨달음’이라 분류하는 정학/선정/선불교에 대한 이해는 정확하고 타당한가? ‘이루려는 깨달음’의 목표와 방법이 과연 모호한가? 정학/선이 과연 일상성/역사성과 격리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격리되어 있는가? ‘격리’란 말은 어떤 기준과 내용에서 채택한 용어인가? ‘일상성’과 ‘사회성’ ‘역사성’이란 말은 또 어떤 기준과 내용을 조건으로 한 것인가? 시간 많이 걸리고 성취가 어렵다는 것이 선 수행 부정의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언어/이해에 경도된 인간적 조건을 고려하면 정학/선정/선 수행은 본래 수용하기가 어렵고 체득에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닌가? 그것은 선 특유의 지평과 중생 인간의 조건이 만날 때 발생하는 불가피한 현상 아닌가? 정학/선의 체험은 밀실화된 특권이나 누리는 폐쇄적 개인체험이라는 이해가 어느 정도 타당하며 현실과 상응하는가? 이해는 특권적 오만에서 자유롭고, 체험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또 얼마나 타당한가?

‘자유/평등/평화/정의/행복/공정의 문제에 관심 갖고 연기 이해로써 풀어가야 한다.’는 선언적 발언으로 확보되는 현실 전망은 사실 공허하다. 사회와 역사에 깨달음을 결합시키라는 선언적 당위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사회/역사의 구체적 문제들을 불교 깨달음으로 풀어가는 과정과 내용을 보여주면서, 집단지성의 상호 검토에 자신을 정직하게 공개하고, 언제든지 수정/보완하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더 요긴하고 설득력이 있다.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이라는 거시 명제는, 지금 여기의 일상과 사회에서의 구체적 문제해결력을 확보하는 수준만큼 유효해진다. 예컨대 출가자에게 ‘사회’와 ‘역사’ ‘일상’이란, 종단의 현안, 사찰 운영, 재가자와의 관계 등을 떠나 말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연기/무아/공 이해의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을 추구하는 출가자라면, 자신의 일상, 자신의 역사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응이, ‘개인의 의도영역’을 넘어 ‘관계의 장’인 일상과 사회, 역사에서 얼마나 적절하고 유효한 것인지를, 상호 검토를 통해 부단히 수정하는 개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상과 사회의 문제를 연기/무아/공의 이해로써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에 옮기려는 순간,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고 어려운 현실에 봉착한다. 동일 수준의 연기 이해를 동일 문제에 적용시켜도, 상이한 판단과 선택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연기만 잘 ‘이해하면’ 사회와 역사의 문제들을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무지다. 현실은 상호 충돌하는 복잡한 이익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가려는 과정과 노력은 결코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 아무리 연기적 이해를 고도로 계발했다고 해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과 결과는 생각과 다르거나 훨씬 지난하다. 일상과 세속의 이익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런 세속과 역사를 향해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을 소리 높이는 것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자칫 공허하거나 지적 자위행위에 그칠 수 있다. 혹은 개인이나 집단의 특정한 정치사회적 시선을 관철하기 위한 열정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울 수 있다. “깨달음과 역사라는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예컨대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라는 현응 스님의 언어는, 종교적 호소력은 지닐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안이한 자기완결이고 공허한 독백일 수 있다. 불교 내부의 시간적 글쓰기는 이제 이런 식의 선언적 전망만으로 사회/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대신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한국불교의 대중과 지성들은 진작부터 그런 요구 수준에 올라와 있다.

정학/선수행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과 그것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태도의 필요성에는 십분 공감한다. 필자도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이해 불교’의 중요성과 확대 필요성에 대해서도 누구 못지않게 역설하고 있다. 선불교 전통의 자기보완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단, 필자는 정학/선수행의 가치와 전망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정학/선불교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관점을 재검토하여 정학에 관한 부처님 법설의 본연과 선불교 본연의 지평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병행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래서 정학/선불교 비판론자들에게 권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연기/공/무아에 대한 지적 이해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학/선불교의 문을 두드리는 구도자들의 갈증의 원천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보기를 권한다. 또 선입견과 거리 두고, 정학/선불교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과도 거리 두고, 정학/선불교에 대해 진지하게 실참을 수반하며 탐구해 볼 것을 권한다.

아울러 실참 현장에서는, 비록 수준과 양상의 편차는 다양하지만, 정학/선수행의 체득이 오만과 특권, 개인적 밀실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심화시키고 삶을 원천에서부터 개방시키는 힘으로 작동하는 사례들이 생각보다 풍부하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해’가 비록 상대적으로 쉽고 빠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점, ‘체험의 오만과 특권’만큼이나 ‘이해의 오만과 특권’도 현실에 범람한다는 점, 그리고 정학/선수행의 지평과 체득은 ‘이해와 체험의 오만’에서 모두 풀려날 수 있는 근원적 힘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주시해 보기를 권한다.

한국 불교의 현장에서 구도자별로 정학에 대한 어떤 독법을 선택하고 있는지, 그 독법에 따라 어떤 변화와 성취가 발생하는지, 그 변화와 성취가 일상/사회/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정학/선불교에 대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탐구해 보길 권한다. 실참(實參)실수(實修)해 가면서 말이다. 이런 조건이 결핍된 정학/선불교 이해와 비판, 깨달음의 역사/사회적 전망은, 현응 스님의 표현처럼 ‘환타지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응 스님은 자문자답한다. “깨달음이 존재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정도의 것이라면, 불교는 일반적 사상이나 철학과 무엇이 다른가? 이해한다는 측면에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해의 내용은 다르다. 연기론에 입각하여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의 관점을 도출한 것은 불교를 제외하고는 어떤 학설이나 철학에서도 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깨달음은 일반적 사상이나 철학과는 다르다.”라고. 좋은 질문, 부실한 대답이다. 연기나 무아, 공의 통찰이 전대미문의 불교적 고유물인 것은 맞다. 그러나 현대의 지성과 철학에서도 여전히 그런 통찰이 불교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이해는 무지다. 비록 범주와 언어는 다를지라도, 이제는 거의 모든 학문과 지성 분야에서 비본질/비실체/관계의 통찰이 작동하고 있다. 자아, 정신/물질현상, 존재와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인문/사회/자연과학의 모든 지성에서 관계/무실체의 통찰이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으며,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정착되고 있다.

불교에서만 연기/공/무아를 말하기에 이에 대한 ‘이해’는 깨달음이고, 일반 사상과 철학에서의 ‘이해’는 깨달음이 아니라고? 미안하지만, 이미 일반 학문지성이 자아와 존재, 세계와 사회를 무아/공/관계의 시선으로 이해하고 설명해 보는 방식은 불교인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적어도 이해와 설명 수준에서라면 말이다. 또한 비록 불교의 언어계보는 아닐지라도, ‘연기적’ 사유에 눈떠 사회의 ‘연기적’ 치유에 몰입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지성들이 있어 왔으며, 근자에 들어 부쩍 늘고 있다. 연기법은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으며 눈만 뜨면 된다는 부처님 말씀을 실감하게 된다.

만약 깨달음이, 조금만 애쓰면 쉽게 터득된다는 ‘연기/무아/공에 대한 이해’일 뿐이라면, 불교인들이 굳이 사회/역사/세계의 문제와 깨달음을 결합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달은 보살들이 세간 모든 영역에서 애쓰고 있는 셈이 아닌가? 충분치는 않아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협력하려는 선택이 불교 구도자들의 과제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불교의 고유적 생명력이나 기여분은 어디서 확보할 것인가?

존재와 세계에 대한 ‘연기적/무아적 이해’의 전방위적 공유와 확산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전위지성의 추세다. 만약 깨달음이 ‘연기/무아/공에 대한 이해일 뿐’이라면, 깨달음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유되며 또 확대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불교의 정체성, 불교 고유의 생명력은 어디서 확보할 것인가? 종교제도와 문화에서? 한계가 명백하다. ‘연기/무아의 이해를 적용하여 풀려는 문제유형’의 차별성, 그리고 ‘정학 선수행’이 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를 불교답게 하고, 여전히 불교만이 기여할 수 있고, 불교가 일상/사회/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고유분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특히 정학/선수행은 불교의 일탈이나 변질이기에 지워야 할 골칫거리가 아니라, 제대로 수용하고 힘 실어 탐구해야 할 마지막 보배라고 본다.

깨달음, 이해와 마음, 정학/선불교의 재검토, 개인과 세계의 연기적 치유 등에 관한 필자의 자세한 소견은, 「‘깨달아 감’과 ‘깨달음’ 그리고 ‘깨달아 마침’」(『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 운주사, 2015)/「진리담론으로서 퇴옹의 돈오돈수론」(『퇴옹 성철의 불교전통 계승과 현대 한국사회』, 한국불교학회 2015 춘계학술대회 자료집)/「『대승기신론』 연기설에 대한 비판적 독해 –연기해석학들에 대한 의문-」(제4회 한·중·일 국제불교학술대회 ‘동아시아 불교에 있어서 대승기신론관’ 자료집,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2015) 등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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