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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의 선택

기자명 원빈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5.09.30 17:36
  • 수정 2015.10.20 18:04
  • 댓글 0

불자들을 만나며 깜짝 놀라는 순간들이 있다. 수준 높은 언설을 듣자면 이미 도인의 반열에 들어간 현성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고민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말과 현실의 괴리가 참 크다. 그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일체가 유심조이기에 내 마음 하나 바꾸면 그만인 것을 왜 자꾸 조건 탓을 하는가?” 맞는 말이다! 분명한 진실이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이 말이 어색하고 불편한 것은 왜일까?

마음 변화에만 치중하여
환경 바꾸지 않는 불자들
허망함 빠지지 않으려면
내면·환경의 조화 이뤄야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에 함께 올랐던 것은 일명 ‘해골물 일화’로 인해 많은 대중들이 알고 있는 설법이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살펴보자면 원효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떠나던 길에 노숙을 하던 중 목이 말라 옆에 놓여 있는 바가지 속 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 맛은 지친 몸과 마음의 여독을 풀어주는 감로와 같았다. 그렇게 지친 몸을 달래 밤을 지내고 난 새벽 원효 스님은 난데없이 구역질이 났다. 어젯밤 마신 감로물의 진실을 본 것이다. 해골바가지에 담겨 있던 물.

이상한 일이다. 어젯밤 그 물을 마실 때는 감로와 같더니 오늘은 그 물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헛구역질이 난다. 마음의 더럽고 깨끗하다는 생각이 우리의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가! 원효 스님은 이 일을 계기로 유학길을 돌아서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고 하니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원효 스님이 신라로 돌아왔다면 의상 스님은 이후 어떻게 하셨을까? 의상 스님의 당나라 유학길은 계속되었고, 지엄 스님 문하에서 10년간 화엄학을 공부했다. 원효 스님은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치고 신라로 돌아섰고, 의상 스님은 그 길을 계속 갔다. 그렇다면 의상 스님은 틀린 것이고, 일체유심조를 몰랐던 것일까?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히말라야를 흐르는 물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에 따라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는 우유를 만들고,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는 독을 만들게 된다. 이것은 환경이나 조건보다 마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구절로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계초심학인문’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중요한 경구다. 이러한 경구를 보면 원효 스님은 맞고, 의상 스님은 틀린 것 같은 인상이 짙어진다.

그럼 좀 더 살펴보자. 야운 스님의 ‘자경문’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소나무에 의지한 칡은 천 길을 바로 솟고, 띠풀 속에 서 있는 소나무는 삼 척의 자라남이 고작이다.” 이 가르침은 ‘숫타니파타’의 가르침과 사뭇 다르다. 아무리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존재도 주변 환경이 좋지 않으면 그 잠재력을 꽃피우기 힘들고, 아무리 자질이 좋지 않은 이도 좋은 환경을 만나면 선지식을 의지해 상승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일체유심조의 가르침보다는 외부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 당나라의 선진 화엄학을 공부하러 떠난 의상 스님도 역시나 훌륭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상 스님의 기세간인 환경을 바꾸려는 선택과 원효 스님의 중생세간인 마음을 바꾸려는 선택은 둘 다 훌륭하다. 자신의 육근을 청정히 하는 것이 바로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세간인 세상을 청정하게 장엄하는 것 역시 정토장엄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화합할 때 비로소 우리의 육식이 경험되지 않는가! 즉, 우리의 경험을 청정하게 바꾸는 길은 내면의 청정과 환경의 청정을 조화롭게 이루어낼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 원빈 스님
행복명상 지도법사
그럼 서두에서 일체유심조를 강조하는 불자들의 그 말투가 왜 어색하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은연중에 숨어 있는 마음만 중요하고 외부환경은 경시하는 뉘앙스의 말투를 느꼈기 때문이다. 원효 스님도 맞았고, 의상 스님 또한 맞았다! 중생세간도 청정히 해야 하고, 기세간도 청정히 해야 한다. 일체유심조만을 강조하는 불교가 자칫 허망함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경계하고 싶어 이 글을 적었다. 부지런히 주변 환경을 바꾸어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다.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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