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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조영석, ‘노승헐각’

기자명 조정육

부처님 법 만나 불퇴전 발원하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 조영석, ‘노승헐각’, 비단에 색, 17.2×26.8cm, 간송미술관.

나옹(懶翁, 1320~1376) 스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30대 중반 때였다. 길거리를 걷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이상한 가사의 노래가 들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그렇게 시작된 노래가사는 대중가요라기에는 왠지 초월적인 느낌이 들었다.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30대였으므로 그 다음 구절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성냄도 활활 타오르던 30대였으므로 하늘이 시키는 대로 티 없이 살지 못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그 노래가사의 출처가 나옹 스님의 시였다는 사실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다음 나옹선사를 만나게 된 것은 월인 스님을 통해서였다. 월인 스님이 부안에 있는 월명사에서 안거를 할 때 참선수행과 함께 ‘10악참회’와 ‘발원문’ 정진을 했다고 한다.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짓는 악업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안거 첫 해에 10명의 선객들이 모여 ‘10악참회’와 ‘발원문’ 정진으로 한철을 났다. 그 때 부안군에는 3개월 동안 단 한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경찰들이 할 일이 없어질 정도로 한가했다. 이 소식은 금세 방송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월명암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참선도량은 참회도량으로 거듭났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참선수행만 하고 참회와 발원정진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다. 월인 스님은 늙은이가 고집을 부린다고 할까 봐 대중들 의견에 따랐다. 10악참회와 발원정진을 생략하고 참선수행만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비보가 날아들었다. 서울에서 승합차를 타고 내려오던 신도들이 논산 근처에서 사고가 나 한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월인 스님은 대중들에게 첫해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이 도량을 옹호하고 우리 승단을 돌보는 신장님의 가피력이 없다 할 수 없고 우리가 참회 발원 정진을 하는 바른 뜻이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실천하자는 데 있음을 잊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참회 발원 정진을 열심히 하자.” 비로소 대중들은 월인 스님의 뜻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걸렸다. 나는 월인 스님의 얘기를 듣고 화엄성중이 불법을 옹호하는 힘을 느꼈다. 그 힘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신비스러워 잠들어 있던 신심이 저절로 깨어났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해야 하지만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냉담한 사람이라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딱 걸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월명사의 가피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천수경’ 읽을 때 건성으로 하던 10악참회를 진지하게 대했다. 참회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익혔다.

의문도 없지 않았다. ‘살생중죄금일참회’로 시작되는 10악참회는 악업소멸을 위한다 쳐도 나옹선사발원문은 왜 들어갔지? 월인 스님께 직접 여쭤볼 수 없으니 내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행이란 묻고 답하는 데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느껴야 한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나는 아침저녁으로 나옹선사발원문을 열 번씩 읽었다. 처음에는 발원문의 마지막 부분에 가장 많은 힘이 들어갔다. ‘원하노니, 모든 천룡과 팔부중이 이내 몸을 옹호하여 잠시라도 뜨지 말고(願諸天龍八部衆 爲我擁護不離身) 아무리 어려운 곳에서도 어려움 없게 하오며 이 같은 큰 서원 모두 다 성취하여지이다(於諸難處無諸難 如是大願能成就).’ 그 발원 덕분일까. 나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죽음의 문조차 거뜬히 밀쳐 버릴 수 있었다. 모두 나옹선사발원문 덕분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났다. 지금은 발원문을 읽을 때 마음이 머무는 부분이 바뀌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첫 번째 문장으로. ‘원컨대 세세생생 나는 곳 어디에서나 항상 불법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願我世世生生處 常於般若不退轉)’이다. 이 문장이면 충분하다.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저 반야지혜에서 물러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처님 법을 만난 것이 바로 엄청난 가피인데 더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기도나 수행은 사랑과 같다. 처음에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여 상대방에게 실망을 하다가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물질적인 풍요, 사회적인 명성, 힘 있는 권력 이런 것이 아니라도 그저 불법에서 퇴전치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그것이 수행이 아닐까. 이런 발원을 하게 해 준 스승이 나옹선사다. 

고려 말의 선승 나옹 스님
보우 스님과 불교계 주도

공민왕으로부터 왕사 책봉
걸음걸음이 구법이요 전법

나옹 스님은 고려 말의 선승이다. 지공화상(指空和尙)의 법통을 이은 계승자로 공민왕대를 전후해 보우 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보우 스님과 나옹 스님은 당시 불교계의 양대축이었다. 보우 스님을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과 나옹 스님을 중심으로 한 사굴산문이 당시의 불교계를 주도했다. 두 스님은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구법과 전법활동도 비슷했다. 호가 나옹인 스님의 법명은 혜근(惠勤)으로 원명은 원혜(元惠)다. 20세 때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은사로 출가해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정진한 후 깨달음을 얻었다. 28세 때 원(元)에 건너가 인도(印度)에서 온 지공 스님 문하에서 2년간 수학하고 불교사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원에서 불교의 깊은 뜻을 충분히 체득한 스님은 10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평양, 동해, 오대산 등 여러 인연처에서 설법했다. 51세 때인 1370년에는 모든 종파를 망라한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였고 다음 해에 공민왕으로부터 왕사로 책봉 받는다. 송광사(松廣寺) 주지를 거쳐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으며 영원사(瑩原寺)로 가는 도중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나옹 스님은 일관되게 마음을 강조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항상 있는 자성, 텅 비고 신령스러워 시방세계에 두루한 빛의 덩어리, 부처님과 우리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똑같이 지닌 진여 본성. 그 마음을 깨달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보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나옹 스님은 수행방법으로 염불(念佛)을 중요시했다.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불러 청정심(淸淨心)을 지니면 삼악도를 벗어나 정각을 이룬다고 가르쳤다. 그는 서방정토를 별개로 인정하지 않고 선가(禪家)의 입장에서 정토 자체를 마음에서 구하고자 했다. 본연 스님의 책 ‘미타행자의 편지’에 보면 ‘나무아미타불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서방정토가 극락세계인가, 자성미타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고 하면서 ‘자성미타를 해도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서방정토를 해도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선승인 나옹 스님의 가르침도 이와 상통할 것이다. 나옹선사는 보우 스님이 그렇듯 왕사로 있으면서도 왕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구도에 힘썼다. 수행인은 어디를 가든 수행인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을 때 아름답다. 그는 고려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고려로, 회암사에서 송광사로, 송광사에서 오대산으로 수많은 곳을 걸어 다니며 불법을 전했다. 걸음걸음이 구법이고 전법이었다. 출가수행인의 본분이었다.

노스님이 소나무 곁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목에는 유난히 굵은 염주를 걸고 노면에 드러난 소나무 뿌리 위에 간신히 걸터앉아 있다. 부처님이 말년에 ‘낡아빠진 수레가 간신이 움직이고 있듯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다’고 하신 말씀이 저런 상태였을까. 세필로 간략하게 묘사된 얼굴에는 주름이 덮었다. 눈썹은 길게 늘어졌고 수염 또한 듬성듬성 자랐다. 남자가 나이 들어갈수록 수염이 짙어지고 길게 늘어져 신선처럼 바뀌는 모습을 예리하게 잡아냈다. 오랜 세월 이끌고 다닌 노구에는 생의 피로가 가득한데 입가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몸에 이끌려 다니지 않는 수행자답다. 작가는 수행자의 본분을 잊지 않고 살아온 노스님을 존경하기라도 하듯 옷주름 선은 단정하게 그렸다. 몇 가닥의 선으로 전혀 망설임 없이 완성한 의습선에서 작가의 노련함을 느낄 수 있다. 바닥에 자란 여린 풀은 심심해서 그렸다는 듯 특징이 없어 보인다. 스님이 내려놓은 가방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물 위가 아닐까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다.

스님 뒤의 소나무는 스님이 기대는 용도로만 필요하다는 듯 줄기는 전부 생략하고 몸통만 그렸다. 주변에 솔방울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 직업화가가 아닌 사대부화가가 여기(餘技)로 그렸기 때문에 가능한 구도다. 지팡이는 소나무와 같은 방향으로 세워 몸을 기대었다. 소나무와 지팡이 사이에 팔을 그려 넣지 않았더라면 정말 딱딱했을 구도다. 소나무껍질은 작은 동그라미를 연속해 그리듯 채워나갔다. 농담 차이는 있으나 질감은 느껴지지 않는 표현법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특별할 것 없는 그림인데 보면 볼수록 담백하다. 수행자의 향기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노승헐각(老僧歇脚):노승이 다리를 쉬다’는 조영석(趙榮, 1686~1761)의 작품이다. 조영석은 호가 관아재(觀我齋)로 사대부 화가다. 그는 바느질하는 여인, 새참을 먹는 농민들, 장기 두는 모습, 절구질, 말징박기 등 서민들의 삶을 생생한 필치로 그렸다. 김홍도라는 거장이 조선적인 필치로 본격적인 풍속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조영석이라는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영석은 자신의 재주가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대부가 ‘천한 재주(賤技)’로 이름 얻는 것을 수치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1735년에 세조의 어진을 모사(模寫)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도 천한 재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로 인해 수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풍속화를 그리되 기교 부리는 것을 극도로 삼간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지 재주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으므로.

스님은 지금 잠시 쉬고 있다. 쉬어야 또 길을 떠날 수 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돌아다니며 자신이 수행한 바를 증명할 것이다. 스님이 떠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깨우치기 전에는 자신의 공부를 위해 떠난다. 선지식을 찾아서 혹은 기도처를 찾아서 떠난다.

깨우치고 나서는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떠난다. 무명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심 때문이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니 너의 아픔을 모른 체 할 수 없다는 자비심이다. 자비심이야말로 수행의 완성이다. 이렇게 떠나다보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갈 때도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다. 저 생에서 다시 이 생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다. 기꺼운 마음으로 올 수 있다. 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력에 의해 오기 때문이다. 내가 곧 너이니 불행한 너를 두고 나 혼자 극락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원력이다. 보우 스님도 나옹 스님도 그리고 월인 스님도 모두 그렇게 오신 선지식들이다. 우리도 그 분들이 찍어놓은 발자국을 따라 걸어갈 수 있을까. ‘원컨대 세세생생 나는 곳 어디에서나 항상 불법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라는 발원을 잊지 않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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