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 전탑 건립을 둘러싼 논쟁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풀리지 않는 전탑 미스터리

한국의 불탑 역사에서 석탑, 목탑과 함께 전탑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탑은 전(塼), 즉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는데, 비슷한 것으로 모전석탑이라는 것도 있다. ‘모전(模塼)’이란 ‘전’을 모방한다는 뜻이므로, 돌을 마치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탑을 말한다. 재료 및 블록을 만드는 방법은 다르지만, 축조의 결과물인 탑은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비교도 자주 된다.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의 가장 오래된 불탑이 전탑을 모방한 형식이라는 점은 이후 신라 탑파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국보 제30호. 현존 높이 9.3m.

특히 현존하는 신라의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분황사탑이 바로 모전석탑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분황사탑 이후 나타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들은 지붕돌인 옥개석 아랫면이 계단처럼 층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모양은 벽돌로 쌓았을 때에 나오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분황사탑의 전탑을 모방한 형식이 신라 불탑에 미친 영향은 매우 막대한 셈이다. 더불어 탑 자체에 비해 기단부가 넓다는 점, 1층 탑신에 문이 달려있고, 그 옆에 금강역사가 서있는 점 등도 전탑과 공유하는 특징이다. 

현존 가장 오래된 분황사탑은
전탑 모방한 ‘모전석탑’이지만
원형이 된 전탑 흔적 없어 논쟁

한국 전탑은 8세기 후반 등장
시기·안동 지역 편중성 의문
재료 특성·사상적 요인 제기도

궁극적 지향은 대형 목탑 형태
다양한 추정 속 가치 조명 필요

그런데 분황사탑이 전탑을 모방한 탑이라고 한다면, 모델이 된 원형의 전탑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분황사탑 이전에 이미 전탑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아직까지 분황사탑 보다 이른 시기로 판단되는 전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전석탑 형식이 먼저 만들어지고, 이를 모방하여 전탑이 나중에 등장했다는 가설은 다소 성급한 견해일 수 있다. 비록 신라에는 분황사탑에 선행하는 전탑을 찾을 수 없지만, 그 모델을 중국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은 일찍부터 벽돌을 건축에 적극 활용하여 이미 전탑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신라는 벽돌제작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벽돌모양으로 돌을 깎아 만드는 방식으로 대체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신라의 통일에 즈음하여 대조각장 양지스님이 탑이나 불상이 새겨진 벽돌을 만들어 탑을 장엄했다고 하니,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벽돌로 탑을 세우는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양지스님이 주석했다는 석장사지 외에 이른 시기의 전탑이 있었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빠르게 보아도 대략 8세기 후반, 유행은 9세기 전반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이른 예로서 안동 신세동 7층 전탑을 꼽는다.

▲ 안동 신세동 7층전탑. 국보 제16호. 높이 17m로 현존하는 가장 높은 탑이다. 높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전탑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신세동 전탑을 이른 시기로 보는 이유는 기단부에 새겨진 수많은 수호신중의 조각상 때문이다. 그 조각의 기법이나 양식은 신라 8세기 후반 이후 석탑의 기단부에 새겨지는 팔부중 부조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특히나 석탑에서 정형화된 팔부중상과 달리, 마치 경주 사천왕사 목탑지에서 드러난 넓은 기단에 24구의 신장상이 돌려가며 배치된 것처럼 봉안된 것도 보다 오래된 어떤 형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간 8세기 후반이 맞다면, 이 시기 무렵에는 벽돌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의 사용은 사실 백제 무녕왕릉에서부터 보이기는 한다. 전축분이라고 하는 것인데, 돌로 무덤방을 만드는 대신 벽돌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매우 보편화된 방식이었지만, 백제는 공주로 도읍을 옮긴 후 중국 남조와 더욱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결국은 잘 변화하지 않고 보수성을 지니는 무덤방식조차 벽돌무덤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백제는 무덤, 신라는 전탑 외에는 벽돌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다소 의아하기도 하다.

벽돌을 굽거나 찍어내는 것은 기와와 비슷하고, 삼국은 발달된 기와제조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제작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문제는 벽돌을 쌓아올리는 기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를 넣어 벽돌들을 단단하게 고정시키지만, 당시에는 그런 접착 역할을 하는 재료가 없어서 거의 벽돌의 무게만으로 버티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석탑이나 목탑은 자체의 하중이 커서 누르는 힘이 강하지만, 벽돌은 하나하나의 무게는 가볍기 때문에 그만큼 안정적으로 쌓기 위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벽돌무덤 같은 지하식 아치형 구조물이나 탑과 같은 정방형 건축물은 그나마 괜찮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벽돌담장은 두께가 얇아서 접착제 역할의 시멘트나 몰타르가 사용되기 전에는 붕괴의 위험이 높았다. 때문에 건축물의 벽은 흙벽으로, 담장은 돌담으로 많이 세웠다.

따라서 벽돌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넓은 분야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무덤이나 탑과 같은 특정한 분야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별도의 벽돌을 생산하는 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간 벽돌탑, 전탑은 9세기가 되면 상당히 많은 수가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하나의 문제가 있으니, 바로 이들 전탑이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유난히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전탑은 이렇게 지리적으로 편중되어 있을까?

이에 대해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이 벽돌생산에 유리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안동 지역이 벽돌생산에 적합한 흙이 특별히 많이 생산되거나, 벽돌을 굽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직 입증된 바 없다.

따라서 물질적인 어떤 생산성보다는 사상적인 측면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기도 했다. 안동지역의 역사·문화적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1608년 완성된 ‘영가지’에 의하면 안동지역 전탑의 내력이 기록된 부분이 많은데, 대부분 풍수지리의 비보사상과 연관된 사실이 흥미롭다. 특히 지난번 소개한 철불과 마찬가지로, 불탑으로써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보다 거대한 탑이 필요했고, 당시로서는 석탑으로 거대한 탑을 세우기 어려워 대신 전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전탑이 5층~7층에 이르는 대형탑이라는 부분에 주목하여 재료적인 부분을 곧 탑의 규모와 연관시켜 해석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하지만 비보사상이 안동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데, 왜 하필 안동지역에만 유독 풍수적 기운을 전탑으로써 누르려고 했던 것인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이렇듯 전탑은 여러 가지 문제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고, 이것을 어떻게 잘 짜서 하나의 직물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앞서 지적되었다시피 전탑은 탑을 대형으로 만들기 위한 비교적 수월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물론 작은 벽돌들을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높이 쌓는 것은 숙달된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거대한 탑의 옥개석을 석탑처럼 돌로 만들어 올리는 것은 기중기도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기술만 있다면 비계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가벼운 벽돌을 높이까지 운반할 수 있으니, 어쩌면 노동집약적 건립에서 기술집약적 건립으로 트랜드가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변화한 트랜드는 왜 전국으로 확산되지 않았을까?

▲ 안동 동부동사지 5층전탑. 높이 8.5m. 보물 제56호. 옥개 위에 기와를 얹은 것은 목탑을 모방한 것이어서 전탑과 목탑의 관계가 주목된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다른 곳은 안동지역과 달리 거대한 탑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불교미술사의 측면에서 보면 처음에는 불탑 중심의 사찰이 보편적이었으나 점차 불상 중심의 사찰로 변화해간다. 그런 와중에 굳이 거대한 탑을 세워야하는 방식으로 돌아갈 필요가 다른 지역에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안동 지역에는 전탑만 아니라 석탑도 매우 밀집되어 분포한다는 사실이 참고가 된다. 전탑의 문제 이전에 안동은 불교문화가 불상 중심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탑의 중요성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특별히 큰 탑은 석조보다 수월한 벽돌로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전탑은 여러 면에서 목탑을 닮으려고 한 듯하다. 목탑처럼 넓은 기단, 1층에 만든 출입시설을 모방한 문, 특히 지붕 위에 기와를 얹는 방식 등이 그렇다. 전탑에 원래부터 기와가 있었던 것인지, 후대에 보수되며 덧붙여진 것인지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대체로 원래부터 기와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추세다. 그렇다면 결국 안동지역의 대형전탑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대형 목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목탑은 황룡사와 같은 신라 왕경 경주의 건축물이 우선 연상되는 바, 이는 이러한 대형목탑건설로 상징되던 특정 시기를 선호하던 보수적 집단이 안동에 정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 경북 영양 봉감 5층전탑. 높이 9m. 국보 제187호. 2층 이상부터 각 층마다 난간처럼 도드라지게 둘러선 부분은 목탑의 난간을 조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탑은 석탑만큼이나 건립이 복잡하고 어렵다. 감은사지탑 등이 목탑을 대신해 거대한 탑으로 세워졌지만, 그런 대규모 석탑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석탑을 너머 더 오래전 목탑의 시대를 회상하던 사람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전탑은 그것이 정치적인 것인지, 아니면 불교종파로서 불사리를 중시하는 특별한 집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탑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