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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보조국사의 비명 (4) 첫 번째 깨달음

기자명 인경 스님

깊은 숲에 은거하며 ‘도’구하기를 멈추지 않다

“25세 대정 22년 임인(1182)에 승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얼마 후 남쪽으로 유행하여 창평에 머물렀다. 어느 날 학료에서 ‘육조단경’을 보았다. ‘진여자성이 알아차림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자재한다.’ 여기에 이르러 놀라 기뻐하며 미증유를 얻고서 일어나 불전을 돌면서 그것을 외우며 더욱 깊게 의미를 터득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은 명리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숲속에 은거하여 간절하게 도를 구하기를 잠시라도 멈추지 않았다.”

25세에 승과에 합격했지만
중앙 진출않고 수행에 매진
‘권수정혜결사문’ 저술한 뒤
서너명 함께 정혜결사 시작

비문에는 단순하게 보조국사는 ‘25세 때(大定22년)에 승과에 합격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 함축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승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 번씩 시행되었다. 승과에 합격을 하면 대부분 중앙에 진출하여 대선(大選)의 호칭을 얻고 차차 대덕(大德)과 대사(大師)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국사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것을 비문에서는 ‘명리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숲속에 은거하여 간절히 도를 구했다’고 기술한다. 당시는 고려후기 무신정권시대로 정치가 안정되지 않아서 전국적으로 난이 일어났고, 자꾸 권력자가 바뀌었다. 불교계도 이런 정치적인 흐름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국사는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한 10여명의 승려들과 정혜결사를 서약하였다. 담선법회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승과시험을 말한다. 여기서 국사는 항상 정혜를 고르게 익히고 예불과 경을 읽고 노동하고 울력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소임을 따라 함께 수행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렇게 결사하고 맹세를 했지만 승과시험이 끝나고 각자 흩어져서 실제로 당시에는 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31세가 되던 1188년에 국사가 득재(得才) 선백의 요청으로 거조암(居祖庵)으로 옮겨가면서 지난날 결사의 약속을 실천하게 되었다. 거조암에 머물면서 ‘권수정혜결사문’을 저술하고 33세가 되던 1190년에 배포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언약한 이들은 대부분 죽거나 병들거나 오지 못하고 결국 서너 명이 모여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먼저 ‘육조단경’을 통해 첫 번째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인데, 그 구절은 ‘진여자성에서 알아차림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자재한다(眞如自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境 而眞性尙自在).’이다. 여기서 핵심된 구절은 ‘진여자성기념(眞如自性起念)’의 해석이다. 대체로 이것을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킨다’고 번역한다. 하지만 생각을 일으키면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에서 대상에 물들게 된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이 문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서 ‘염(念)’은 생각이 아니라, ‘사띠(sati)’로 해석을 해야 전후 맥락이 해결된다. 다시 말하면 알아차림, sati가 확립이 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대상에 대해 동일시되지 않고 자재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생각 생각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행위 속에 물들게 되고 고통을 받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곧 보고 듣는 작용 자체는 대상에 물들 수도 있고, 물들지 않을 수도 있다. 물든 경우는 생각에 끌려가는 경우이다. 반대로 물들지 않는 경우는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의 상태이다. 무념의 경우도 그냥 목석이 아니다. sati가 있으면 물들지 않고 sati가 없으면 물들게 된다.

우리의 일상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의 연속인데, 이런 가운데서도 대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여 평화롭다면, 정말이지 행복하지 않겠는가?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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