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소는 최대다

기자명 함돈균

‘최소의 집’이라는 주제로 열린 건축전시회에 포럼 패널로 초대된 적이 있었다. 건축 문외한이라고 처음에는 청탁을 고사했지만, 기획자인 젊은 건축가는 긴 시간 진행되는 전시회에 중간점검을 하는 차원에서 건축전문가 외에도 인문학자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나는 이 청탁을 수락했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최소의 집’이라는 주제가 작지 않은 궁금증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최소’라는 말이었다. 난 ‘집’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이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최소’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깊이 생각해 보려고 애써왔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닭은 간단하다.

내가 문학평론을 하면서 많이 다루는 대상들이 ‘시’인데, 시야말로 최소 언어로 쓰인 말의 집이기 때문이다. 내 딴에 참여 의도는 ‘최소’라는 개념을 매개로 건축가들의 생각을 배우면서 대화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일찍 길을 나서서 포럼에 앞서 그동안 전시된 건축 모형을 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기대에 비해서는 이 주제에 대해 아직 탐구의 시간이 더 필요한 듯이 보였다. 건축 모형들은 대체로 최소의 개념을 규모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모형 집은 대개 아주 넒은 면적의 땅에 아주 작게 지은 집이었다. ‘최소’의 의미를 주로 규모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최소’를 경제적 효율성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했다.

건축 관련 청중이 대부분이었던 그날 포럼에서, ‘집’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시의 ‘최소’에 대해 길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시’는 최소 문장으로 지어진 말의 집이다. 그런데 시는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둔다기보다는, 최소 단어와 문장에 ‘최대’의 함의를 담으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초점은 최소가 아니라 ‘최대’다. 좋은 시는 영락없이 최소로 최대를 내포한다.

한 떨기 꽃에 우주를 담은 불가의 화엄처럼, 한 편의 좋은 시는 최대 사유를 담은 말의 집이 된다.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시 중에는 아주 분량이 긴 산문적인 시도 있지 않느냐고. 이런 시도 최소 문장으로 씌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시의 ‘최소’는 분량이나 규모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그 말이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최대’를 담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말이 세계를 담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하고 필연적인 방식일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말은 과장도 없고, 허세나 기만도 없이 사물을 궁구하고서는 핵심에 도달한다. 핵심이란 본질에 닿았다는 뜻이며, 필연이란 ‘반드시 그렇다’는 뜻이다. 본질에 닿은 ‘반드시 그렇다’는,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해야한다’는 윤리를 출현시킨다. 이게 시의 윤리이며, 말을 짓는 윤리가 생활을 짓는 윤리가 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아도르노는 2차 대전 기간에 인간성의 극단적 위기를 경험하며, 삶에 필수적인 윤리적 통찰을 ‘최소 도덕(Minima moralia)’이라는 메모 묶음으로 출간했다. 여기에서 도덕의 최소는 인간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필연적인) 윤리적 통찰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이 최소 도덕이 탄탄하게 지켜지는 사회야말로 윤리적 최대치의 가능성을 내포한 기품 있는 사회라는 걸.

‘최소 도덕’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적 품위의 ‘필연성’을 확보하려 한다는 말이며, 이것이야말로 삶의 존엄성의 최대치를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짐승의 세계를 닮아간다고 느낀다면, 우선 점검해 볼 것은 이 ‘최소 도덕’의 지점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