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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금표(禁標)

사찰 주변 금표는 사찰 숲 역사 증언하는 중요한 징표

▲ 구룡사 입구의 황장금표.

치약산 구룡사 입구 한구석에는 ‘黃腸禁標(황장금표)’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 자연석이 있다. 이 자연석은 이 일대가 조선왕실에 봉납하던 황장목 소나무 산지[黃腸禁山]였음을 알려주지만, 구룡사를 찾는 방문객 중 이 금표를 찾는 이는 드물다. 구룡사 일대가 황장금산이라는 확정적인 자료는 ‘관동읍지(關東邑誌)’의 ‘구룡사’ 조(條)에 ‘즉황장소봉지지(卽黃腸所封之地)’라는 기록과 19세기 초의 ‘광여도(廣輿圖)’에 구룡사와 함께 표기된 ‘禁山(금산)’으로 확인할 수 있다.

치악산 구룡사 입구 황장금표
왕실에 황장목 공급하던 증거

사찰 숲 문헌·금표 존재하지만
불교계 무관심에 사라질 위기

남은 금표 유실되고 풀섶 묻혀
사찰 숲 과거 사라져 안타까워

오늘날도 구룡사 일대의 소나무는 비교적 우량한 형질을 보유하고 있어서 조선왕실의 황장목으로 보호되었던 옛 명성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구룡사는 강원감영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황장목을 보호하기가 쉬웠을 터이고, 또 소나무를 뗏목으로 한양까지 운반할 수 있었던 한강 상류에 있는 지리적 이점도 황장금산 지정에 한몫을 했을 터이다.

황장(黃腸)은 왕족의 재궁(梓宮) 또는 관곽(棺槨)으로 이용된 몸통 속이 누른 소나무를 말한다. 황장은 왕실문서 곳곳에 기록으로 등장하지만, 실물이 최초로 세상에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것은 2005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장례식 때였다. 이구씨의 장례를 준비하던 전주 이씨 대동종약회에서 이방자 여사와 이구씨를 위해 준비해둔 황장목 관 중, 남아 있던 하나의 관을 찾아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청하였고, 문화재청은 유물 수장고로 쓰이던 의풍각에서 이 관을 찾아 공개함으로 제 모습을 세상에 처음 드러냈다.

산림청의 요청으로 황장목 재궁 공개 현장에 참석했던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칠 수 있었다. 흔히 봐왔던 장례용 목관과는 왕실의 재궁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재궁의 색깔이 누른 소나무색을 띠고 있을 것이란 선입관은 여러 겹의 옻칠 덕분에 안팎이 온통 검은색인 관을 보면서 어긋나기 시작했고, 목관 바닥에 놓일 칠성판조차 몇 사람이 함께 들어야 옮길 수 있을 만큼 무게가 상당했기에 더욱 그랬다.

황장목(黃腸木)은 율목(栗木)·향탄(香炭)과 함께 왕실의 중요한 의례용 임산물이었다. 이들 의례용 임산물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조선왕실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등재된 기사로도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장이 72건, 율목이 30건, 향탄이 19건의 순으로 나타났고, ‘승정원일기’에는 황장이 347건, 율목이 194건, 향탄이 127건이나 기사로 등장한다.

실록에는 ‘황장(黃腸)’에 대한 기사가 세종2년(1420년)에서 고종 43년(1906년)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황장에 대한 기사가 조선조의 공식 기록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이유는 관곽재로 사용된 황장소나무의 확보가 조선왕실의 중요한 현안이었음을 의미한다.

황장에 대한 기사가 조선왕조의 공식기록에 다수 나타날지라도 사찰과 관련된 기사는 왕실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비록 공식적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율목과 향탄처럼, 사찰은 조선시대 황장목의 생산에 일정 부분 관여하였음을 치악산 구룡사 입구의 황장금표가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사찰 주변의 금표는 사찰 숲의 역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징표다.

▲ 법흥사 황장금표의 탁본.

한편 사찰 인근에서 발견된 또 다른 황장금표로 인해 영월 법흥사 역시 황장목의 생산과 보호에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흥사 인근 새터마을에서 1980년대에 발견된 ‘원주사자황장산금표(原州獅子黃腸山禁標)’는 사자산 일대가 황장목을 생산하던 황장금산이었음을 증언한다. 그래서 사자산 품속에 자리 잡은 법흥사의 솔숲도 황장금산에 포함되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법흥사 경내에 자라는 소나무는 예로부터 산림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나라 제일의 우량한 형질을 간직한 소나무 숲이라고 상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법흥사 역시 구룡사와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 법흥사 입구의 황장금표.

사찰 숲과 관련하여 강진 백련사의 봉산도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가 있다. 백련사의 봉산은 다산 정약용의 한시, ‘솔을 뽑는 승려의 사연[승발송행(僧拔松行)]’으로 확인된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정탁 선생의 번역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련사 서쪽 석름봉에서/ 백련사를 지키던 중 한 사람/ 자축거려 다니면서 솔을 뽑누나. 어린 솔 싹 자라나서 겨우 두세 치/ 여린 줄기 연한 잎이 귀엽기도 하거니. 어린 아기 기르듯 애호 깊어야/ 해묵어 큰 재목이 될 것이어늘. 어찌하여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뽑아 버리나/ 싹도 씨도 남기지 않으려는고.

부지런한 농부들이 호미 메고 긴 가래 들고/ 밭고랑에 돋아나는 모진 잡초들을 애써 매듯이/

관문의 역졸들이 길을 닦느라/ 길가의 독사를 쳐서 섬멸하듯이/ 날개 돋친 산귀신이 시뻘건 머리칼을 뒤집어쓰고/ 구천 그루 나무를 한 손아귀에 잡아채듯이/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모조리 뽑아 치운다. 중을 불러 그 연유를 캐어물으니/ 중은 목메어 말도 못하고/ 두 눈에서 눈물만이 비 오듯 쏟아지네…….

이 산에 솔 기르기 그 얼마나 애썼던가/ 스님 상좌 할 것 없이 성심성의 가꿨어라. 땔나무 아끼노라 찬밥으로 끼니하고/ 골골마다 순찰 돌며 새벽종을 울리었네. 고을 성안 초부들도 감히 접근 못 하고/ 시골 농민 도끼야 얼씬이나 하였으랴. 수영 방자 달려와서 사또 분부 내렸노라/ 산문에 들어서며 벌 같은 호령일세. 지난여름 폭풍우에 절로 꺾인 소나무들/ 중이 남벌하였다고 책잡아 매질하네. 하느님 맙소사 이 설움 견딜쏘냐. 절간 돈 만 냥으로 그 미봉 하였다네.

금년 들어 솔 베어선 항구까지 메어 가며/ 큰 배를 만들어서 왜놈 방어 한다더니/ 그러나 항구에는 배 한 척 뜨지 않고/ 애매한 이 산 모양만 발가숭이 되었다네. 이 애솔이 자라면 큰 소나무 되리니/ 화근을 뽑아라 쉴 새 없이 뽑아라/ 이로부터 솔 뽑기를 솔 심듯이 하였도다. 잡목이나 남겨 두어 겨울 채비 하리라/ 오늘 아침 관첩내려 비자 따서 바치라니/ 비자나무마저 뽑고 산문을 닫으리라.”

정약용의 ‘목민심서’ 공전(工典) ‘산림’조(條)에 실려 있는 이 한시를 통해 오늘의 우리는 만덕산 일대가 수영에서 관리하는 소나무 봉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민심서’에는 백련사가 만덕산 봉산을 관리한다고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산을 오래전부터 양송하여 왔고, 도벌을 방지하고자 밤낮없이 애를 썼다’는 시의 내용을 참고하면 백련사가 소나무 봉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백련사 인근에 봉산이 존재한 사실은 ‘조선전도(朝鮮全圖)’의 ‘봉산’ 표기로 확인되지만, 그 솔숲은 이미 사라졌고, 봉산임을 증언하는 금표 역시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각 지방의 사찰에는 이처럼 옛 산림의 역사를 증언하는 문헌이나 ‘금표’가 널려있지만, 불교계는 이들 자연유산에 대해 관심이 없다. 보호 철책과 안내판이 설치된 구룡사의 황장금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형편이고, 동화사와 김용사는 향탄봉산 표석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들 금표는 학계에 보고된 덕분에 망실될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다.

▲ 동화사의 팔공산 수릉봉산계.

문제는 방치되었거나 아직도 찾지 못한 금표들이다. 기림사의 두개의 향탄봉산 금표(‘延經墓香炭山因啓下佛嶺封標’과 ‘延經墓香炭山因啓下柿嶺封標’)는 함월산 기슭에서 등산객의 발부리에 닳아 사라져가고, 도갑사의 금표(‘健陵香炭奉安所 四標內禁護之地’)는 풀섶에 묻혀 있다. 표석이 피아골로 내려서는 계단 길로 사용되고 있는 연곡사 율목봉산 금표(‘以上眞木封界 以下栗木界’)의 옹색한 처지도 다르지 않다.

▲ 피아골 계곡으로 내려서는 연곡사의 율목봉표. 시멘트로 망실위기에 놓여 있다.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에는 송광사 소유 봉산 경계에 14개의 금표를 1830년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금표는 하나도 없다. 그나마 근래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금표마저 태풍 뒤의 유실된 도로보수 공사에 묻혔다는 안타까운 소식만 전해지고 있다.

▲ 등산객의 발부리에 닳고 있는 기림사의 ‘함월산연경묘향탄사시령봉표’

수많은 금표가 망실되고, 또 기록이 사라지는 일은 사찰 숲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이라도 불교계에선 이들 금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적절한 보전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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