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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부처님은 제사장이나 신이 아니라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기설법(對機設法)을 하셨습니다. 대중의 고뇌에 따라 응답을 하셨지요. 선불교의 초기 취지도 현란한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을 주고받으면서 마음에 계합(契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종교화 되고, 형식화 되고, 제도화 되다 보니 권위주의적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불교 원형의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갈까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쾌락과 고행은 욕망에 대응
참음으로 생기는 긴장으론
깊은 선정에 빠질 수 없어

욕망 알아차리며 중도 발견
상황·조건 따라 변함 깨닫고
출가의 길 다시 돌아봐야

수행자는 사회위기 극복위해
문제에 대안 줄 수 있어야
본분 갖춘 채 중심 잡고서
증득 기쁨 세상에 내보내길

전 세계에는 ‘테라바다’ ‘마하야나’ ‘탄트라’ ‘선’ 등 네 종류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조계종은 선종입니다. 따라서 선종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면 다른 불교에 대해 배타적이게 되고, 무조건 같다고 하면 자기 정체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갖는 동시에 다른 것도 다 소중하다는 포용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불교를 어떻게 하나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뿌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부처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말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느냐? 어떤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어떤 설법을 하셨느냐? 다시 말해 역사적, 사회적, 자연적 조건 속에서 그 분과 그 분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그 분에게 질문하는 대중들도 그냥 대중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처했고, 어떤 고뇌를 가진 사람이었는지 살펴야 부처님께서 내린 처방의 맥락과 그 가르침을 비교적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잘 안 되면 언어에 집착해서 글자나 말에 끄달리게 됩니다. 언어나 말을 절대화시키면 삶의 현실과 점점 유리되고 맙니다. 관념적이 되거나, 권위주의가 되거나, 형식화되어서 결국에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공부하셨는지에 관계없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인도의 자연환경은 어떻고,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사회적인 조건은 어땠는가? 남녀 차별과 계급 차별은 어떤 상태였고 정치적 조건은 어땠는가? 이런 환경에서 그 분이 태어나서 어떤 고뇌를 했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가?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될 예정이었고 결혼해서 자식까지 둔 사람이 왜 출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부처님은 동서남북의 네 문을 둘러보면서 늙고 병들고 죽은 자를 본데 이어 수행자를 만나게 됐고, 수행자를 만나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결혼을 못해서, 아이를 낳지 못해서, 고시에 떨어져서, 사업 실패 등 주류사회에서 낙마한 후 그 충족하지 못한 욕구를 억누른 채 출가한 것이 아니라, 주류사회의 가장 중심에 있었음에도 그 모순을 간파하고 떠난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그 분의 고뇌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 고뇌가 이해되어야 출가의 의미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가한 뒤에는 6년간 어떤 수행을 했는가. 스승을 찾아다녔고, 교단의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스승을 뛰어넘으면 그곳에 머물지 않고 또다시 스승을 찾아 떠났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처님이 ‘6년 고행했다’고 하지만 그 6년의 고행 기간 동안 어떤 삶의 여정을 겪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중도(中道)를 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고행 끝에 중도를 발견하셨고 그 중도에 의한 정진을 통해서 마침내 자신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열반, 니르바나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노라’라고 말씀하시고, 깨닫기 전의 자신처럼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 고뇌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말하는 불교가 형성되었습니다.

초기의 상가는 우리가 지금 보는 불교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불교는 제도화되고 종교화된 불교지만 부처님과 초기 제자들은 아직 제도화되기 전, 종교화되기 전에 그냥 수행자로 출발했습니다. 부처님은 사제, 즉 제사장이 아니고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스승이었습니다. 우리를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스승이었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불교의 정체성과 수행자의 정체성을 우선 확보해야 합니다.

불교에 욕계 중생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다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구를 대하는 방법은 욕구를 따라가거나 억압하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을 때는 그것을 하든지 참든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따라 하면 쾌락주의가 되고 참으면 고행주의가 됩니다. 그렇게 드러난 현상은 둘이 정반대지만 그 뿌리는 욕망에 따른 대응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긴장하는 것입니다. 통증을 참든, 먹고 싶은 것을 참든, 갖고 싶은 것을 참든, 참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긴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긴장하면 선정에 깊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6년의 고행 기간 동안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고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정이란 측면에서 보면 어릴 때 농경제에 참석해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던 그때만큼의 선정 수준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부처님은 중도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도, 욕망을 억제하는 것도 모두 욕망의 노예입니다. 그래서 그 욕망을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저항하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이 알아차림인데, ‘다만 알아차림’ ‘다만 바라보기만 해라’ ‘다만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편안하고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으면서 알아차림을 뚜렷이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의 요체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 중도를 처음으로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위대한 발견입니다. 중도는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적절한 것, 이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저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알맞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중도는 상황에 따라 늘 바뀝니다. 그때그때 조건에 따라서 적절함이 늘 변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두 사람이 같이 살 때 내가 관심을 가져줘야 상대가 좋아한다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중도이고, 관심을 가져줬더니 간섭이라고 싫어하면 관심을 덜 갖는 것이 중도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도록 유지하는 데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안 가져야 한다’를 절대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대기설법은 이렇게 중도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기에 출가의 길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기존 질서에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뛰어넘어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답을 찾기 위해 출가했던 부처님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도로 나타나고 있고, 문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기여하려면 내 문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환경, 평화, 상대적 빈곤, 정치 등 사회적 문제에 대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후일 세상에 나가는 것은 수행자로서 나간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수행자로서 하나의 보살행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의 본분이 갖춰져야 밖에 나가서도 부작용이 적게 됩니다. 수행자로서의 기본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밖에 나가면 승복을 입고 세속적 생활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기본선원이 중요한 곳입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정진해서 부처님처럼 수행자의 길을 가고, 내면의 편안함 속에서 자기가 증득한 기쁨을 통해서 세상에 훈기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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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10월6일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이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종립기본선원에서 ‘불교 원형의 모습을 어떻게 닮아갈까’를 주제로 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법륜 스님은
정토회 지도법사이자 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즉문즉설을 통해 10대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넘나드는 멘토로 활동하며 메마른 세상에 행복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개인의 삶이 전환되는 수행을 기반으로, 기아·질병·문맹 퇴치 운동, 인권, 평화, 통일, 생태환경운동 등을 실천해 오고 있다. 저서에 ‘인간붓다’ ‘방황해도 괜찮아’ ‘스님의 주례사’ ‘엄마수업’ ‘인생수업’ 등이 있으며, 2000년 만해대상 포교상, 2002년 라몬 막사이상, 2007년 제5회 민족화해상 개인부문, 2011년 제5회 포스코청암상 봉사부문, 2011년 제6회 통일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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