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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설악산 백담사-봉정암-5층사리탑

푸른 산빛 깨고 단풍 숲으로 들어가다

▲ 봉정암 5층 석가사리탑은 1300년 동안 구도자를 맞아 주었다.

“그립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게 님이라면
설악의 님은 사리탑”

▲ 만해 스님은 1905년 이 계곡을 건너 출가했다. ‘님의 침묵’이 새겨진 공간이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10월의 단풍이 내설악 백담계곡을 붉게 감싸고 있다. 설악이 내준 어느 길로 들어서도 단풍나무숲으로 향하나, 오늘은 구곡담으로 난 길을 따라 봉점암(鳳頂庵)에 오르려 한다. 해발고도 1244m에 자리한 암자.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20여개의 암봉이 연이어 성처럼 길게 둘러쳐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용아장성(龍牙長城)은 설악산에서 가장 험한 능선으로 손꼽힌다. 산 사람들 말에 따르면 “봉정암은 그 이빨의 잇몸쯤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가는 길 녹록치 않겠지! 백담사에서 만난 ‘님’ 안고 한 발을 띄었다. 부처님 정골사리 1300여년 동안 품은 사리탑이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일었기 때문이라면 암자 오르는 이유가 될까?

▲ 설악 계곡에도 붉은 단풍이 찾아왔다.

6살 때 ‘통감(通鑑)’을, 7살 때 ‘대학(大學)’을 제 스스로 읽어 갔던 천재는 15살 때 동학 운동(1894년)에 뛰어들었다. 차별 없는 새 세상 열어보자는 혁명은 실패했다. 황금들녘서 뛰어 놀았던 어린 날의 기억은 집 마당에 모두 묻어두고 길을 떠났다. 오세암(1896년)에 들어와 머슴일 보다가 삭발했다. 방랑벽 도저 하산했다가 다시 설악산을 찾았을 땐(1905년) 오세암이 아닌 백담사였다. 정식 출가 단행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을 터.

그도 백담사로 이어진 저 돌길을 걸었을까! 아니다. 물살 좀 세기라도 하면 금방 떠내려가는 섶다리 건넜겠지. 그것도 아니다. 세찬 설악 눈발 하얗게 날리는 1월의 한 겨울이었다. 차디찬 얼음 위를, 한없이 쇠락해가는 이 땅의 운명을 한탄하며 굵은 눈물 꾹꾹 삼키고 걸어가는 한 사람 보인다.

모든 걸 내려놓았던 것일까. 아니, 내려놓고 싶었던 것일까. 오세암(五歲庵)에서 팔만대장경 독파하며 정진해가던 그는 1917년 12월 밤 좌선 중 물건 떨어지는 소리에 확철대오했다. ‘사나이 이르는 곳 다 고향이련만/ 오랜 나그네 되어 고향 땅 생각나네 / 한소리 질러 산천세계 울리고 나니/ 날리는 흰 눈 속에서 복숭아 꽃 보았네.’

만해 용운 스님이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3·1만세 운동 주도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고문당할 걸 두려워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 퍼다 머리에 끼얹었다는 그 만해다. 3년 투옥 끝내고 감옥서 나올 때 그를 위로하는 인사들에게 침 뱉으며 한마디 했다지. “오죽 못났으면 영접하느냐? 너희들은 왜 영접받지 못하느냐!” 길에서 “오랜 만이오”라며 손 내미는 최남선에게 “육당은 내가 장례 지낸지 오래인 고인”이라며 고개 돌려 버린 만해. 거침 없는 옹골찬 기백의 원천은 무애 경지 열어 준 오세암 삼매였으리라.

▲ 이 길을 걷는 사람, 그 누구라도 시인이다.

오도송 내보인 9년 후 만해는 한국 문학사에 영원히 빛날 시 한 편을 발표한다.

‘님은갓슴니다 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치고 갓슴니다 … …’

님의 침묵!

이 시는 저 백담사 화엄당에서 탈고(1925년)됐고, 이듬 해 ‘바람도업는공중에 垂直(수직)의 波紋(파문)을내이며 고요히러지는 오동닙은 누구의발자최임닛가’로 시작하는 ‘알 수 없어요’ 등 80여편의 시와 함께 ‘님의 침묵’으로 묶여 나왔다. 만해가 그토록 기다리던 ‘님’. 누구에게는 민족으로, 또 누구에게는 조국으로 다가갔고, 누군가에게는 부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연인으로도 닿았다. 그 님, 아직도 우리 가슴에 샛별로 떠 있다.

쌍용폭포서 떨어진 물줄기 구곡담을 거쳐 아래로 아래로 흐르더니 가을 하늘처럼 푸르다 끝내 새색시 저고리에 단 진녹색 노리개 빛으로 머문다. 만해 보다 앞서 이 계곡을 지난 사람 있었다. 중국 오대산에서 해동의 불법홍포를 부촉 받은 자장율사가 부처님 정골사리 안치할 성스런 땅을 찾아 이 길을 걸었다. 전해 내려오는 소문처럼 봉황 따라 나선 길이었을 게다.

▲ 봉정암은 한국의 5대 적멸보궁 중 가장 높은(해발고도 1244m) 곳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 오대산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해 온 자장율사는 금강산에 올라 기도를 올렸다. 이레 쯤 됐을까? 하늘이 환해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신이하게 여긴 자장율사 봉황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설악산 봉우리 위를 날던 봉황새는 부처님 닮은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세히 보니 부처님 이마 부분에서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불두암(佛頭岩) 중심으로 좌우에 범상치 않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게 아닌가. 성지다! 바위 아래 사리 봉안한 뒤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부처님 이마로 봉황이 사라졌다 해서 봉정암(644년)이라 했다.

▲ 봉정암 사리탑 전망대에 오르면 ‘용아장성’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다.

▲ 공룡능선 전경.

족히 다섯 시간은 넘게 올랐을 듯싶다. 봉정암 500m 남았다는 이정표 위로 산길이 수직으로 서 있다. 깔딱깔딱 숨 넘어 갈만치 용써야 오른다는 ‘깔딱고개’. 짐짓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님 한 분이 며느리와 바위턱에 앉아 계신다. 지나가는 사내 건각 부러웠던지 무릎 두드리던 할머니 한마디 건넨다.

“젊은 사람은 좋겠다. 봉정암 한 걸음에 가시니!”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결코 부러워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렇다. ‘힘 내라!’는 뜻이다.

“봉정암 몇 번째 오셨어요?” “하하하! 몰라요. 그걸 세나.” “왜 오르세요?” “좋잖아요! 손주 잘 되라 기도도 하고, 먼저 간 남편도 만나고. 우리 며느리도 건강하면 좋겠고! 에구,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요.” “어머님, 작년 봄에도 마지막이라 하셨어요. 내년에도 저랑 오를 거예요!”

아아! 봉정암 5층사리탑이다. 기단은 없다. 그냥 바위 위에 서 있다. 바위가 탑을 떠받들고 있는 게다. 가만, 아니다. 설악산이 떠받드는 것이다! ‘그대 기다린 지 천년’이라 속삭이는 사리탑에 사람들은 온 정성 두 손에 담아 무릎 꿇고 절을 올린다.

만해 스님, 님의 침묵 군말에서 ‘님만님이아니라 긔룬것은 다 님’이라 했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게 ‘님’이라 했다. 단풍나무에게 님은 100년 동안 함께 비바람 맞은 소나무고, 다람쥐에게 님은 가을이면 마중 나오는 코스모스다. 설악에게 님은 저 사리탑이다.

깔딱고개 넘으신 할머님 며느리 부축 받으며 사리탑에 당도하셨다. 숨 한 번 고르려는 지 붉게 물든 설악을 감상한다. ‘무사히 잘 오셨다’는 인사 의미로 그 옆에 섰다. 할머니, 한마디 이른다. “극락이지요. 극락!”

▲ 봉정암 5층사리탑.

‘님은갓슴니다’로 시작 한 시집 ‘님의 침묵’은 ‘네 네 가요 이제곳가요’(사랑의 굿판)로 맺는다. ‘님’은 우리 앞에 와 계신다! 백담사에서 안고 온 ‘님’ 사리탑 앞에 내려놓았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백담사 입구 주차장. 백담사까지는 6km. 셔틀 버스 이용을 권한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의 총 거리는 약 10.6km. 오세암으로 가는 길(8시간)과 수렴동대피소(6시간)를 지나 오르는 길 두 코스가 있다. 봉정암에서 하루 머물 수 있다면 어느 길을 선택해도 좋다. 수렴동대피소 길을 선택했다면 하산길은 오세암으로 내려오는 게 좋다. 단, 당일 등하산을 해야 한다면 오세암 길은 자제하기 바란다. 사리탑에서 오세암으로 내려(오를 때도 마찬가지)올 때 크고 작은 일곱 봉우리를 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왕복시간은 수렴동대피소로 갈 경우 10시간, 오세암 길을 선택할 경우 12시간은 잡아야 한다. 5, 8, 10월의 주말이면 왕복시간은 적어도 1시간은 더 잡아야 한다.

이것만은 꼭!

 
백담사 만해기념관 :
 백담사 회주 오현 스님과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원력으로 2년6개월간의 공사 끝에 1997년 11월 개관됐다. 만해의 불교사상, 일대기, 교유관계 등을 소개하는 물품 총 8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불교대전’,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등 만해 저서 초간본 10여점을 비롯해 만해 육필, 만해에 대한 논문 및 평전, 만해 초상화 등 승려로서 또 시인으로서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 망라돼 있다.

 
만해마을 : 만해 용운 스님의 삶과 문학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만해문학박물관과 님의 침묵 광장을 비롯해 만해 선사를 기리는 법당 서원보전, 문인과 방문객을 위한 문인의 집, 단체 연수와 세미나를 위한 설악관, 단체수련도 가능한 금강관 등이 있다. 백담사 입구까지의 2.5km 산책로가 일품이다.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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