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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개태사 삼존불상 논쟁

정형성 탈피한 삼존불상 … 질적 저하인가, 작가 의도인가

▲ 개태사 삼존석불입상. 보물 제219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는 불상답게 마치 기념비처럼 우뚝하다. 본존불 높이 4.15m.

개태사(開泰寺)는 충남 논산에 있는 사찰로서 고려초에 개창한 거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후백제 견훤(甄萱, 867~936)의 아들 신검(神劍, 재위 935~936)과 싸워 이김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후삼국통일의 위업이 부처의 가호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보답하고, 아울러 통일한 고려를 지속적으로 보호해 주십사 하는 발원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다. 이렇게 왕건이 발원하여 세운 사찰이니만큼 고려시대에는 국찰로서 대소 행사가 열려 번성하였지만, 언제부터인가 퇴락하여 일제강점기에는 폐허로 변해있었다. 아마도 고려말 왜구의 침입 등으로 타격을 입은 후, 고려의 멸망으로 미처 중창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 1930년대에 다시 절이 들어섰다.

현재 이 절의 법당 자리에는 거대한 석조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매우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어 여러 가지 해석이 뒤따르고 있다. 이들 불상이 처음 제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4년 절을 짓기 위해 중창불사를 하면서였는데, 그 이전에는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우협시보살상만 온전하게 서있었고, 본존불 및 좌협시보살상은 몇 조각으로 부숴진 상태였다. 결국 중창불사를 통해 절단된 불상을 시멘트로 붙여 복원하여 세웠는데, 좌협시보살의 얼굴은 발견하지 못해 시멘트로 만들어 붙였다.

고려초기의 대형 불상으로 상당히 중요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들 불상의 표현이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에 그 양식을 어디에 어떻게 비교하고 연관지어 해석해야할지 난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본격적인 논고가 등장했다. 비록 ‘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만 있고, 그 안에 어떤 불상을 모셨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이들 삼존불상은 개태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불상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논지였다.

▲ 개태사 삼존불상 본존불. 이 불상의 특징은 다른 석불상과 달리 손을 돌출시켜 조각했다는 것이다. 파손방지를 위해 손을 두껍고 크게 만들면서 균형을 잃었지만, 상당한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개태사 불상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 이루어졌고, 유사한 시기에 만들어진 고려전기불상과의 양식비교도 시도되었다. 그 결과 비록 개태사 불상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관촉사, 대조사 등과 같은 추상성을 지닌 고려전기 불상 양식의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현실감 있는 사실주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는 추상성, 부분적으로는 사실성이 한 작품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불상들과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두 양식의 공존이야말로 왕건의 통일의 이미지를 구현한, 의도된 양식이라고 평가한 것이었다.

아울러 ‘고려사’에 의하면 사찰이 창건되고나서 화엄법회를 열었으며, 왕건이 친히 제문을 지었다고 한 사실을 통해 개태사는 화엄종 사찰이었고, 삼존불은 비로자나 삼존불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양 협시보살은 각각 문수·보현보살이 되는 셈이다. 이렇듯 개태사 불상의 독특한 양식을 의도된 양식으로 규정하고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한 해석은 이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논문에 의해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인지, 얼마 후인 1988년이 되어 개태사 법당의 증축을 위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발굴에서 시멘트로 복원되어 있던 좌협시보살상의 얼굴이 드디어 발견되었다. 그런데 새롭게 발굴된 보살상의 얼굴은 우협시보살상의 얼굴보다 양감도 풍부하고, 은은한 미소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크게 주목되었다. 더군다나 막상 원래의 머리를 보살상의 몸 위에 교체하여 올려놓고 보니 좌협시보살상의 전체 분위기가 일신되어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련된 불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 개태사 삼존불 좌협시 보살상. 1988년 새롭게 얼굴이 발견되어 복원된 결과 우협시에 비해 조각기법이 더 화려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높이 3.2m.

이러한 결과를 놓고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즉, 기존의 본존불 및 우협시보살에 비해 좌협시보살상의 조각기법이나 양식적 표현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이 아니며, 좌협시보살상만이 태조 왕건의 개창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본존불을 포함한 나머지 상들은 후대에 파손된 원작을 모방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앞서의 논문에서 해석된 바와는 달리 본존불 및 우협시의 양식적 특징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왕건의 발원으로 국가에서 세운 사찰에 봉안된 불상치고는 너무 조잡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좌협시 보살상은 조각기법이 우수하기 때문에 이는 창건 당시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해석이었다. 과연 본존불과 우협시보살이 지니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모습은 과연 의도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실력 미달의 결과였을까?

이러한 문제는 특히 불상을 편년하고 감정하는데 끊임없이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석굴암이나 국보 반가사유상처럼 완벽하여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불상은 예외이지만, 개태사 불상처럼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작품들은 시점에 따라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으로도, 혹은 의도된 추상성으로도 읽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가 접하는 문화재들은 석굴암과 같은 완벽한 걸작이 아니라 대부분 개태사상과 같이 복합적인 양상을 지닌 경우가 많다.

▲ 개태사 삼존불 우협시보살상. 처음부터 온전하게 보존된 상인데, 좌협시에 비해 단순하고 평면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높이 3.21m.

비록 개태사상의 예술적 수준을 객관적으로 정량화하여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를 보다 종합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해석이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제기되었다. 이에 의하면 그간 간과되어 왔던 것은 개태사가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고 해서 마치 이때 고려의 모든 역량이 개태사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해석되는 문제점이었다. 실제 개태사가 창건되던 시기에 고려 수도인 개경에서도 광흥사, 내천왕사, 현성사, 미륵사의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지방에서는 청도 운문사, 김천 직지사 등의 신창 및 중창이 이어졌고, 고승(高僧) 탑비의 건립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개태사와 같은 거찰의 창건이 착수한지 4년만에 완공된 것도 이런 대규모 사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개태사에만 투입될 수 있는 인력과 역량의 제한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기존에 제기되었던 개태사 삼존불의 비로자나삼존불설도 도상학적으로 보다 면밀히 고증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비로자나불의 수인이 지권인으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개태사가 화엄종 사찰로 추정됨에도 본존불의 수인이 지권인이 아닌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화엄종을 배경으로 제작된 도상들에서 본존불이 지권인보다는 개태사 삼존불과 같은 설법인 형태의 수인으로 동일하게 등장하는 점을 들어 지권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비로자나불일 가능성이 있음을 뒷받침한 것이다.

새로운 견해는 비록 현재의 개태사 삼존불이 원래의 모습인지, 아니면 다소 양식을 달리하는 우협시와 본존불이 나중에 만들어진 모작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왕실발원의 국찰이라고 해서 반드시 조각이 월등해야 한다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삼존불이 모두 왕건 창건기의 작품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삼존불이면서도 각 존상의 양식이 다른 사례는 이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경북 선산에서 함께 발견된 금동삼존불이나 경주 배동 선방사 삼존불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선산 출토 금동삼존불은 원래의 삼존불인지, 아니면 별도의 불상이 함께 묻힌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경주 배동 선방사 삼존석불의 경우도 한때는 별도의 불상을 수습하여 함께 봉안한 것으로 생각되어 삼존불이란 명칭 대신 ‘삼체불’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만큼 좌·우협시의 양식이 다르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들이 원래부터 삼존으로 조성된 것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본존불과 협시불의 양식이 다른 경우는 일찍부터 소개되었다. 예를 들어 경북 군위 삼존석굴의 경우도 본존불은 오래된 수나라 양식이지만, 협시보살은 당나라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식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양협시보살의 양식이 다른 경우도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즉, 예전에는 단순한 협시보살이었지만, 점차 도상이 발전하면서 아미타불의 협시는 관음과 세지보살, 석가모니의 협시는 문수와 보현보살로 정의되면서 두 보살이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의도된 것은 아닐까 추정해볼 수도 있다.

여하간 시각적으로 드러난 차이가 작가의 기량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시대적 선후관계에 기인하는 것인지, 또는 원작과 모방작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마치 바다에서 신나게 헤엄친 뒤 몸에 달라붙는 소금과 같이 짓궂은 존재이다. 나아가 정형성을 탈피한 작품양식을 질적 저하로 볼 것인지, 의도적 추상성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 역시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도전하면서 미술사학 이론은 점점 다듬어지고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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