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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근 콜택노조지회장

“목숨줄 끊으려는 자본과 사투…낮은 곳 둘러보는 눈 얻었다”

▲ 9년 동안 부패한 자본과 싸워온 이인근 콜택노조지회장 시선은 어떤 희망을 향하고 있을까. 지난한 투쟁의 끝은 노동자의 생존권이 보장된 그 어디쯤이리라.

‘콜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감상에 젖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검열과 야간통금으로 기억되는 어둡던 시절, 젊은이들은 이 회사에서 만든 통기타에 의지해 끓는 피를 달래며 신산(辛酸)의 세월을 견뎌냈다. 콜트콜택은 기타를 만드는 회사다. 콜트악기와 자회사인 콜택을 합쳐 콜트콜택이라 부른다. 콜트콜택은 더 이상 국내에서 기타를 만들지 않는다. 단돈 200만원으로 시작했던 회사가 30년만에 1200억원대 우람한 회사로 성장하자 사주는 2007년 느닷없이 폐업하고 공장을 외국으로 이전해 버렸다. 출근했던 노동자들은 굳게 닫힌 공장 대문 앞에서 정리해고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회사가 밝힌 폐업 이유는 경영난이었다. 그러나 콜트콜택은 2006년 단 한해를 제외하고 매년 100억원대 흑자를 내던 알짜회사였다. 지금도 시장점유율 30%의 세계 1위 기타회사다.

 
세계 1위 기타제작사 콜트콜택
30년만에 1200억원대 회사 성장
노동조합 설립 1년에 돌연 폐업
한국공장 없애고 국외로 이전
노동자 전원 하룻밤 사이 거리로

9년 동안 소송 등 부당해고 투쟁
“폐업으로 책임없다” 황당 법원
콜트콜택 기타와 함께한 뮤지션
릴레이 무료공연으로 응원 물결

생계문제로 다른 직장 취업 유혹
부패세상 물려줄 수 없어 거리로

그날 이후 세계최고 기타를 만들던 장인들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서, 불 꺼진 공장에서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때로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에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기도 하고 세계를 돌며 사주의 부당함을 알리기도 했다. 억울한 마음에 법원의 문을 두드렸지만 수년간에 걸친 법적 투쟁은 오히려 상처가 됐다. 법원은 부당해고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회사의 손을 들어주는 황당한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보낸 세월이 벌써 9년. 날짜로 3000일이 넘는다. 사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폐업을 빙자한 정리해고가 당연시되는 사회가 될 것이 우려스럽다. 어떻게든 돌려보겠다는 생각이다.

최근 콜트콜택 노동자들은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김무성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김 대표는 당 최고위원회에서 “기업이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기는 커녕 강경노조가 제 밥그릇 늘리기에 몰두한 결과 건실한 회사가 아예 문을 닫는 사례가 많다”며 골트콜택 기타를 거론했다. 콜트콜택 노동자들은‘먹튀기업’을 두둔하는 김 대표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며 분노하고 있다.

▲ 보름 가까이 김무성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데 변화가 있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현재 방종운 콜트노조지회장이 단식에 돌입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오면 다른 사람들이 단식을 이어나갈 것이다. 콜트콜택은 국내에서 위장폐업한 뒤 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며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노조 때문에 건실한 회사가 망했다는 김무성 대표의 발언은 해고자들의 절박한 싸움을 왜곡하고 먹튀 자본을 비호하는 망언이다. 반드시 사과를 받을 생각이다.

▲ 콜트콜택 문제의 원인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우리는 유리창도 없는 공장에서 각종 화공약품 냄새와 뿌연 먼지를 마시면서 일했다. 최저임금 수준을 받았지만 항상 해고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는 주문량이 늘면 사람을 늘리고 주문량이 줄어들면 마음대로 해고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던 당시도 휴가에서 돌아오니 20~30명이 연말에 나가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후로 단 한 번의 파업도 없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노동조합 설립 1년 만에 공장을 폐업하고 전원을 해고해 버렸다. 아마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자식에게 승계하기 위한 밑그림도 있었을 것이다. 국내 생산물량을 슬금슬금 줄이더니, 결국 외국으로 공장을 전부 이전해 버렸다.

▲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있다. 해고 전의 삶과 해고 이후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생계문제가 가장 컸다. 다들 한 가정의 가장들이다. 생계가 막막해지니 가족 간 다툼과 불화도 깊어졌다. 개개인의 아픔을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다들 기타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자부심도 있었다. 생계문제도 그렇지만 당장 기타를 만들 수 없으니 그 또한 미칠 노릇이었다.

▲ 함께 해고된 조합원이 몇인가.
인천과 대전을 포함해서 100여명이 해고됐는데 지금은 40여명이 남아있다. 함께 싸우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분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지만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 9년이면 참 오랜 세월이다. 어떻게 지금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나.
회사를 키운 것은 사장의 몫도 있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악기를 만들던 노동자들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계 기타시장 30%를 점유하고 사주는 1200억원대 자산가가 됐는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준 노동자들을 느닷없이 전원 해고해 버렸다. 회사를 나와 보니 우리 근무환경과 임금도 너무도 열악했음을 알게 됐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믿고 지지해준 많은 분들이 많다. 그분들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기나긴 소송을 벌였다.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사유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법원은 미래에 경영위기가 생길지 모른다는 황당한 이유를 대기도 하고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는 없지만 회사가 폐업해 버렸으니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로 사측 편을 들었다. 법원이 스스로 명문화된 법을 부정하고 부당한 판결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정리해고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패한 자본가를 편드는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 많은 뮤지션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뮤지션들이 우리와 함께 했다. 매주 수요일 신촌 홍익대 앞 클럽 ‘빵’이라는 곳에서 인디밴드와 문화노동자들이 연대해 무보수로 공연을 해주고 있다. 우리와 함께 하는 동안 무명이었던 뮤지션들이 국내 정상급 밴드로 성장한 이들도 많다. 신대철 같은 뛰어난 기타리스트도 우리를 위해 무보수 공연을 했다. 이뿐만 아니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공연을 갖기도 했다. 또 우리의 이야기는 영화로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되기도 했다. 부평공장을 점거해 미술가들과 함께 문화전시장으로 꾸미기도 했다. 노동과 예술의 조화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 조심스런 질문이다. 그냥 포기하고 다른 직장을 갖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 같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순간순간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직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싸웠지만 나중에는 사명감으로 싸웠다. 생계문제로 싸움을 포기하면 절대 돈과 권력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싸움은 우리 후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지금 정부는 기업을 위해 해고하기 쉬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청년 일자리를 만든다며 아버지의 일자리를 반으로 쪼개 나눠주겠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가 당한 그런 비참한 세상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인지.
사회적 협의체를 구성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요구는 두 가지다. 국내 공장을 정상화하고 해고자들을 전원 복직시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측에서 자신들은 국내에서는 기타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말했다. 그러면 국내에서 기타를 만들지 않는다는 확약서를 써라. 그러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나겠다. 그랬더니 써줄 이유가 없다며 버티고 있다. 확약서라도 받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슬그머니 공장을 세워 또다시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다가 버릴 것이다.

▲ 9년의 시련이 스스로의 삶에 어떤 변화를 줬다고 생각하는지.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전과 설립 후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전에는 나와 내 가족 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지난 삶이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게 됐다. 낮은 곳을 둘러보고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알게 됐다.

그에게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가능하다고 했다. 사주는 일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조율팀 외에 누구도 기타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에게 기타 연주는 공장의 담만큼이나 높은 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그 벽을 허물었다. 그가 일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임을 자각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진정의 의미의 ‘기타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김형규 편집부장 kimh@beopbo.com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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