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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보우-하

기자명 성재헌

1550년(명종5) 12월5일, 문정왕후는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라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린다.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은 선비들의 나라이고, 불교는 혹세무민의 사교라는 것이다. 유생들의 눈에는 불교중흥을 꾀한다는 자체만으로 보우가 ‘요승’이었다.

유생·선비들 극한 저항에도
선교양종·도첩제·승과 부활
인재 대거 양성…불교중흥
유생들 광기에 끝내 살해

하지만 문정왕후와 보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1551년(명종6) 5월 예고했던 대로 선종과 교종을 각각 부활시켰다. 그리고 6월25일에는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지정해 선종을 총괄하는 판선종사 도대선사 겸 봉은사 주지로 보우를 임명하고, 교종을 총괄하는 판교종사 도대사 겸 봉선사 주지로 수진(守眞)을 임명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승려의 도첩제를 부활시키고, 1552년(명종7) 7월에는 승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를 부활시켰다. 임진왜란 당시 막대한 공훈을 세운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등도 이때 발탁된 인물이었다.

조선 개국 이후 쇠락의 일로를 겪던 불교였다. 염불소리 끊어진 절 마당에 산짐승이 내려와 풀을 뜯었으니, 명산대찰의 기둥이 썩어내려도 다시 일으켜 세울 재력도 사람도 없었다. 보우는 전국 300여 사찰을 국가 공인의 정찰로 지정해 보호받게 했으며, 도첩제를 실시해 불과 2년 만에 승려 4000여명을 선발했다. 불교가 국가의 보호를 받자 신분과 이념의 장벽에 막혀 좌절했던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절집으로 몰려들었다. 텅텅 비어가던 사찰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침체됐던 교학과 선풍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성리학 외엔 이단(異端)으로 치부했던 유생들에게 이는 통탄할 일이었고, 이런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된 보우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유생들의 모함과 비난은 그치질 않았다. 하늘에 흰 무지개가 뜬 것도 보우 탓이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도 보우 탓이고, 가뭄이 들고 태풍이 몰아친 것도 보우 탓이었다.

보우는 어처구니없는 모함과 질시를 견디다 못해 한발 물러섰다. 1557년, 보우는 선종판사의 임무를 휴정에게 맡기고 외진 청평사(淸平寺)로 물러났다. 하지만 불교괴멸이 지상목표인 유생들이 휴정이라고 가만둘 리 없었다. 1559년, 핍박을 견디다 못해 휴정이 2년 만에 물러났다. 보우는 다시 선종판사직을 수락하고 봉은사로 돌아왔다. 그를 아끼는 수많은 이들이 말렸다. 까닭 없는 모함과 쓰라린 시련이 버젓이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우는 만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보우는 유생들의 모략 속에서 불교중흥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보현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들을 복원했고, 1565년(명종20) 4월에는 불교계의 숙원이던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달 5일에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개최했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석한 사찰이며, 태조가 왕위를 물려준 후 수도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런 회암사를 다시 중창하고 무차대회를 개최한 것은 왕실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보호한다는 상징이었고, 조선의 국가이념이 성리학만은 아님을 세상에 천명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보우에게 예정되었던 시련이 닥쳤다. 묏등의 잔디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가 다시 빗발쳤다. 그 대열에는 시대의 지성으로 추앙받는 율곡(栗谷)도 참여했다. 이이(李珥)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죽이지 못할 거면 귀양 보내라고 주장했다. 명종은 신하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10월에 제주목사 변협(邊協)의 손에 살해당했다.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었던 보우의 외로운 투쟁은 집단이기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유생들의 반발로 외면 받았고, 불교는 다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보우의 죽음에 유생들은 “온 산천이 기뻐한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알았을까? 27년 뒤, 존망의 기로에 선 성리학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그렇게나 증오하던 요승 보우가 길러낸 휴정과 유정이고, 그렇게나 핍박하던 승려들이란 걸.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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