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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사슬

기자명 원빈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5.10.20 13:59
  • 수정 2015.10.20 18:05
  • 댓글 1

불자들에게 아사세 왕자인 아자따삿뚜는 ‘관무량수경’에서 묘사되는 폐륜아의 모습으로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마가다국의 발전을 이끌어 아쇼카 대왕의 마우리아 제국의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생전에 ‘사문과경’에서 묘사되는 참회와 귀의 이후 불교를 옹호하는 왕으로 호불(護佛)의 역할도 수행했다. 물론 오역죄의 극중한 악업으로 인해 아무런 도과를 이루지 못했으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듯 자신도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찬탈 당한다. 그는 니까야 상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중 입체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로서 다양한 측면의 행위들이 부처님 당시의 굵직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깨달음에 장애없는 부처님
결코 전지전능한 신은 아냐
연기 진리 올바로 사유하면
자아의 틀서 휘둘리지 않아

아자따삿뚜와 데바닷다가 결탁해 왕국과 교단의 전복을 꾀함에 있어 부처님에 대한 여러 번의 살인시도가 있었다. 그 중 맛다꿋치 언덕에서 부처님의 발에 피를 흘리게 한 사건이 있는데, 이를 통해 오역죄에 부처님의 몸에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실리게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발에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비구들에게 업혀서 주치의였던 지와까를 찾아간다. 지와까는 부처님의 발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치료를 끝내고 나니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던 환자와의 약속이 생각나 부처님께 “환자를 치료하고 나면 즉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붕대를 풀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떠났다.

지와까가 환자의 진료를 마치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이미 성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부처님의 상처에 발라 놓은 고약은 시간이 오래되면 큰 고통을 불러올 수도 있는 약이라 올바른 시간에 떼어내야 하는데 자신이 들어갈 수도 없고, 부처님께 언제 붕대를 푸시면 되는지 말씀드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지와까가 걱정하고 있는 그때 문득 아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지와까가 너무 늦게 돌아와서 성 안에 들어올 수가 없다. 그는 ‘지금이 붕대를 풀어드려야 할 시간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붕대를 풀어다오.”

아난다가 붕대를 풀자 발의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다음 날 지와까가 급하게 돌아와 부처님께 송구스럽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지와까여, 여래는 금강보좌에 앉았을 때 이미 모든 고통을 소멸시켜버렸다.”

그렇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올바로 아는 일체지를 통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분이시다. 이러한 지혜로 자타 모두의 고통을 해결해주시는 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만약 부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고통을 해결해주시는 분이라면 불교에 대한 신심이 대단했고 수행 또한 훌륭했던 빔비사라왕이 아자따삿뚜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왜 미리 언질해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부처님께서 발을 다치신 언덕의 이름은 맛다꿋치이다. 이 이름은 ‘태아를 파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빔비사라왕의 부인인 꼬살라데위(위제희)는 아자따삿뚜를 임신했을 때, 기가 턱 막히는 예언을 듣고 만다. 이 아이가 자라나 부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녀는 크게 상심해 고민에 빠져 있다가 한 가지 결심을 한다. 태아를 유산시키기 위해 후일 이름이 맛다꿋치로 불리게 되는 이 언덕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끈질겼다. 아마도 탯줄을 붙잡고 이를 악물고 버티지 않았을까? 결국 그는 태어났고, 부왕과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고 만다.

이것은 인연의 사슬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의 그물에 묶여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가 해탈하는 방법을 알려주신다. 하지만 해탈하고 싶지 않은 중생 즉, 인연이 없는 중생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 상상의 산물인 전지전능한 신과 윤회를 벗어나 열반의 길을 열어 보여주신 부처님과의 차이다. 부처님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장애 없이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지만 결코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다.

▲ 원빈 스님
행복명상 지도법사
부처님의 깨달음인 연기법을 나타내는 공식 같은 경구가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사유하라. 그렇다면 범부처럼 자아의 틀에 휘둘리지 않으시는 부처님의 무아의 선택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지 않을까?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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