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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 벽화

기자명 신대현

불교 탄압 시기, 지위고하 떠나 함께 일궈낸 지역 신심의 걸작

▲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 앞에 그려진 아미타여래삼존 벽화 전면.

강진 무위사(無爲寺)는 우리나라 불교벽화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불화 없는 사찰이야 없지만, 이곳처럼 벽화 형태로 500년을 훌쩍 넘기는 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림의 주제도 다양해 삼존불화를 비롯한 아미타내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 및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입불도 각 1점 등 총 29점이 전한다. 작품성 또한 뛰어나 삼존불화와 아미타내영도, 관음보살도, 당초문도 등은 고려불화를 계승한 조선 초기 불화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로 손꼽힌다. 이 그림들이 전각 안팎 곳곳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옛날의 극락보전은 이름 그대로 지상으로 옮겨온 극락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들 벽화 대부분 해체되어 경내에 따로 마련된 보존각에 보관·전시되어 있고, 아미타여래삼존도와 수월관음도는 원 자리인 극락전 후불벽 앞뒤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 불교 벽화의 보고 무위사
극락전 내부 아미타삼존도는
불상 뒤편 설치한 흙벽에 그린
조선 불화 중 이례적 후불벽화

신체표현·색감 고려적 요소
무늬·본존 얼굴엔 조선 특징
사회·시대적 변화양상 담겨

동참 고관·백성 동등 나열
대중 지향·높은  작품성 눈길

특히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 벽화는 국보 313호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조선시대 대부분 불화는 벽화보다는 종이나 비단 등에 그리고 이를 불상 바로 뒤에 걸어 장엄하는 후불탱화 형식이었다. 그런데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도는 불상 뒤에 별도로 흙벽을 설치하고 여기에 그림을 직접 그리는 후불벽화라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림 하단의 화기(畵記)에 1476년에 그렸다고 나와 있어 보기 드문 조선시대 초기의 고고(高古)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 무위사 아미타삼존벽화 본존 세부.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화면의 위부분에 구름을 배경으로 하여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을 배치하였으며 그 위에도 작은 화불을 좌우 각각 둘씩 그렸다. 상단의 나한들은 조금 작고 뒤쪽으로 물러나 있어 자연스럽게 원근감이 나타나 있다. 이 같은 상하 2단 구도 자체는 고려 불화의 전형 구도 중 하나이지만, 이렇게 원근감을 표현한 것은 확실히 이 그림만의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고려시대와 달리 얼굴에 볼륨감을 지나치게 두지 않아 아주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 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 후기에 유행했던 불의의 표현인 이른바 ‘단아(端雅)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의 끈을 대좌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으로 거론된다. 아미타불 뒤에 표시된 광배 모양은 곡식을 걸러내는 키처럼 생겨서 이를 ‘키형 광배’라 부르는데 이런 모양은 대체로 1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해 전체적으로 색 대비가 뚜렷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이 든다. 이처럼 이 아미타여래삼존 벽화는 신체의 표현과 온화한 색채감 등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한편으로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 얼굴 등의 표현 등에서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고려 후기 양식과 조선 초기 양식이 절묘하게 잘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구도나 채색뿐만 아니라 그림의 내용 면에도 변화가 생겼으니,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점이다. 고려시대 중후기 지장보살도는 독존도에 더 무게가 실렸었고 가끔 나타나는 삼존도의 지장보살은 어쩐지 삼존의 구도에 아직 완전히 녹아들지 않은 듯 약간은 이질적 존재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지장보살이 삼존의 구도나 배치에서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고 다른 존상과 조화를 잘 이루어 관음보살과 더불어 아미타여래를 협시하는 삼존불로 완전히 정착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고려 후기에 들어와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더 깊어졌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전하는 사찰 벽화를 보면 위치는 건물의 한 특정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자리에 그려져 있다. 그래도 어느 위치에 그려졌느냐에 따라 상징과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예들 들어 이 아미타여래삼존 벽화처럼 불상 바로 뒤에 걸리는 이른바 ‘상단(上壇) 벽화’는 불상과 더불어 전각 안의 주요 예배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이전에 더러 그려졌던 이 상단 벽화는 중기로 오면서 거의 사라진다. 그것은 벽화가 아닌 종이나 비단에 따로 그림을 그려 거는 후불탱화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불상과 후불이 걸리는 불단(佛壇) 뒷면에도 벽화가 그려진 예가 더러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이곳 무위사 극락보전의 수월관음도를 비롯해서 이후 17세기 중후반에 나타나는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관음보살도, 여수 흥국사 대웅전 수월관음도, 양산 신흥사 대광전 3관음도 등인데 모두 관음도인 것이 특징이다. 이런 공간은 아주 좁은데다가 빛도 잘 안 드는 곳이라 바라보기에 그다지 좋은 조건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장엄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관음 신앙이 얼마나 널리 유행되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 아미타삼존상과 벽화.

이 그림에는 수백 자의 화기(畵記)가 적혀 있어 해련(海連) 스님이 그림을 그리고, 불화 조성에 수 십 명의 지역 주민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해련 스님의 칭호는 ‘대선사(大禪師)’로서 불화를 전담하던 화원으로서는 꽤 예외적으로 최고급의 지위에까지 올라 있다. 그만큼 연륜도 깊고 인정받던 화가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그림을 설명하는 논문이나 단행본 등 모든 글들에서 주요 시주자를 ‘전(前) 아산(牙山) 현감(縣監) 강노지(姜老至)’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화기의 글자를 잘못 읽어 나온 오류다. 정확히는 ‘전 청산(靑山) 현감 강질(姜)’로 읽어야 맞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6년조에 보면, 강질이 1434년 청산 현감을 제수 받아 부임지로 내려가려 아뢰니, 임금이 그를 불러 “백성들에게 임하는 직책은 가볍지 아니하므로 그대는 직에 나아가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백성을 은혜로 돌보라”고 당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그가 맡은 고을도 아산이 아니라 청산이다. 청산은 고려 때부터 있던 지명으로, 아산보다 더 남쪽인 지금의 옥천·보은 지역에 해당한다. 강질이 언제 청산 현감을 그만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청산 현감을 지낸 42년 뒤에 고향 강진으로 돌아가 여러 지역민들과 함께 무위사 극락보전 벽화 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화기의 글씨가 오래되어 흐릿한데다 또 화기라는 표기의 특성상 자그마한 사각형 구획 안에 여러 이름들을 섞어 쓰느라 처음에 잘 못 읽었던 것 같지만, 지금까지 이런 오류가 한 번도 지적되지 않고 그대로 답습된 것은 문제다.

그런데 이렇듯 무위사에 벽화를 포함해 걸작 불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배경을 수륙재(水陸齋)의 성행과 관련시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종민은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에서 무위사가 자리 잡은 남해 연안이 고려 때부터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던 지역이었음에 주목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아미타신앙과 지장신앙이 성행했던 배경에는 왜구로부터 당했던 혹독한 고초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이 깔려있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되고,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하는 극락보전을 건립한 까닭도 이런 분위기에서 이뤄진 것으로 본다. 강진 지역 사람들은 신분의 구별 없이 무위사 수륙재에 참여하면서 커다란 위로를 받았고, 이러한 대중의 힘이 결집되어 지금과 같이 장엄한 극락보전과 벽화를 조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위사 벽화들에서는 고려시대를 풍미했던 상하 2단의 확고한 구도가 점차 사라지고 1단 혹은 3단의 새로운 구도가 시도되었다. 또 등장인물도 불·보살 일변도가 아니라 스님과 성중 등 다양한 캐릭터가 나타나고 있다. 확실히 고려 때와는 다른 화풍을 선뵈고 있는 것인데, 이런 과감한 시도의 원인 역시 고려 말 조선 초라는 시대적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불교계 입장에서 15세기는 갑자기 불어 닥친 시련의 기간이었다. 1424년 전국의 7개 종파가 선교 양종으로 통합되며 수많은 사찰이 폐사되었다. 이어서 내불당이 폐지되고 승려의 도성출입도 금지되는 등 불교는 본격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혁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불교미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 아미타여래삼존벽화가 남겨져 있는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전경. 무위사는 우리나라 벽화의 보고라 할만큼 많은 작품들이 전해진다.

바로 무위사 벽화들에게서 그런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그림의 내용을 좀 더 대중 친화적인 것으로 바꾸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대중들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벽화 조성과 같은 불사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그 결과 다양한 관점들이 후불 벽화에 투영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미타삼존도 벽화 화기를 보면 고급 신분의 전 청산 현감뿐만 아니라 여러 평범한 지역민들의 이름도 거의 동등하게 나열되어 있다. 비록 불교가 처한 환경은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바뀌면서 점점 나빠져 갔지만, 적어도 아직 보통 사람들에게까지는 불교의 가치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이어져 가고 있었기에 이 아미타여래삼존도를 비롯하여 수준 높은 무위사 벽화들이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예민하게 포착해 아미타·관음보살·지장보살 등이 등장하는 대중 지향적이면서도 뛰어난 작품성을 함께 성취한 작가의 감수성과 성실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  buam0915@hanmail.net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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