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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지안(志安)

기자명 성재헌

보우 스님이 가고 100년 후 쇠락일로를 걷던 조선 불교계에 중흥의 싹을 다시 틔운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환성지안(1664~1729)스님이다. 그는 춘천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여 상봉정원(霜峯淨源)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17살에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월담은 한눈에 지안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의발을 전한다. 이후 지안은 청평사(淸平寺)에서 선과 교를 겸비해 수학하다가 크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너진 청평사를 재건하다가 절 아래쪽 연못에서 오래된 비석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비석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15살 출가…청평사서 정진
나옹선사 현몽해 전법당부
전국을 다니면서 불법전해
제주 유배 뒤 의문의 죽음

‘유충관부천리래(儒衷冠婦千里來)’

이는 도참에서 흔히 사용되는 파자법(破字法)이다. 유(儒)는 곧 선비(士)요, 충(衷)은 곧 마음이니, 이를 합하면 곧 ‘지(志)’ 자가 된다. 관부(冠婦)는 곧 여자가 갓을 쓴 것이니 ‘안(安)’ 자이고, 천리(千里)는 이어서 쓰면 ‘중(重)’ 자이다. 이를 합하면 ‘지안중래(志安重來)’ 즉 “지안이 다시 오리라”는 예언이었다.

또 꿈속에서 나옹혜근(懶翁惠勤) 선사를 만났는데, 그가 지안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고 한다. “담득수미도대해(擔得須彌渡大海) 대시문개초리행(大施門開草裏行).”

수미산을 짊어지고 큰 바다를 건널 수 있으니, 보시의 문을 활짝 열고서 수풀을 헤쳐 나가라는 말씀이었다. 고려 말 신흥 유교세력에 의해 비운의 삶을 마감했던 나옹혜근 선사가 현몽하여 불교중흥의 사명을 부여했으니,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가 보우선사가 출가했던 용문사(龍門寺)에서 출가하고, 보우선사가 선종판사에서 물러나 외로운 몸을 의탁했던 청평사(淸平寺)에서 깨달음을 얻어 불교중흥을 발원했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후 지안은 스스로 선택한 험난한 길을 걸었다.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은 직지사(直指寺)였다. 당시 직지사에는 화엄경 강의로 유명했던 모운진언(慕雲震言, 1622~1703)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의 학덕을 한눈에 알아본 진언대사는 자신의 강석을 지안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대중을 향한 그의 사자후가 시작되었다. 그의 언변은 강물처럼 부드럽고 거침없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각지에서 그를 초청하는 편지가 쇄도하였다. 불법의 중흥을 염원한 그에게 명성과 권위는 안중에 없었다. 지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늘 토대를 일군 이곳이 아니라 황무지인 저곳에 있었다.

그렇게 지안은 전국을 떠돌았다.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강원도와 충청도로, 다시 경상도와 전라도로, 무너진 담장에 썩은 서까래라도 비만 가릴 수 있는 곳이면 머물렀고, 일자무식에 가는 길이 다른 사람에게도 양심이 있는 이라면 간곡히 불법을 일러주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부싯돌에서 튄 불꽃이 들판에 번지듯 평등과 화합을 외친 그의 목소리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불교도들이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끊이지 않는 정쟁과 이념의 한계 속에서 방황하던 유생들이 화엄(華嚴)의 사상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핍박과 가난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지안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영조 원년(1725), 김제 금산사에서 연 화엄법회에 모인 대중이 1400여명이었다 하니, 당시 그의 신망과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들에게 자비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불교가 민중들의 희망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자, 집권세력은 보우에게 그랬듯 지안을 탄압하였다. 영조 5년(1729), 영조를 옹립한 노론세력은 지안을 체포하였다. 1725년 금산사 화엄법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1728년 이인좌의 난에 대거 참여했다는 것이 빌미였다. 그렇게 지안은 지리산 벽송사에서 체포되어 역모의 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두 분께서 걸으신 길은 참 많이도 닮았다. 보우선사가 그랬듯 지안 역시 도착한 지 7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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