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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12연기-④ 식

무명 속에서 살아야 하는 생명체가 만든 개념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무한속도로 변하는 세계서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서는
동일한 것 분류·판단해야
식은 생명체가 삶을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낸 의지

대기도, 물도, 빛도, 온도도 무상한 변화의 흐름이고 신체의 움직임 또한 그러하다. 무한 속도로 변화한다. 무한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그것은 말 그대로 카오스이다. 이 카오스 속에서 생명체는 살아야 한다. 살려는 의지는 이 카오스를 향해 신체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살기 위해선 조심스레 다가가야 한다. 카오스로부터 사는데 필요한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카오스적 변화를 따라갈 수 있게 해줄 단서를 포착해야 한다. 하지만 무한 속도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순 없기에 작은 단서라도 잡으려면, 변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그걸 단서로 반복되는 것 인근에 있는 것들을 포착해야 한다. 반복되는 것들을 연결하고 반복되는 속도와 리듬을 포착해야 한다. 그렇게 되돌아오는 것의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되돌아오는 계절의 반복으로 파악하고, 비슷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들을 ‘같은 동물’로 파악한다.
 
되돌아오는 것들을 연결하며 우리는 변화를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하며 살 길을 찾는다. 이는 무한 속도의 변화를 감속시키는 것이다. 유한의 속도로 바꾸고 그 유한의 속도마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다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의 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보여주며 거기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는 이후에 유사한 상황을 만났을 때 판단의 자원이 된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토끼도, 거북이도, 돌고래도 그럴 것이고, 박테리아 또한 그럴 것이다. 생명체들은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것들을 하나로 묶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며, 그렇게 포착된 것들을 분류하고 연결할 것이다. 반복적으로 만나는 것들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그러하듯이, 반복적으로 만나는 것들에 나름대로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이 붙여진 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렇게 명명된 대상들을 연결하고 직조함으로써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인간들은 이를 무명의 카오스와 달리 질서 지어진 세계요 ‘코스모스’라고 명명한다. 
 
이처럼 무상한 속도를 적절하게 감속하거나 고정시키며 얻는 그때그때의 판단이나 그 자원이 되는 정보들을 식(識)이라고 한다. 혹은 그런 판단이나 식별의 작용을 식이라고 한다. 식이란 무명의 카오스에 대처하면서 살려는 의지가 때로는 감속시키고 때로는 고정시켜 찾아내고 만들어낸 질서다. 그렇지만 그것은 만들어지는 순간 무한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 무상한 세계와는 분리된 정지된 세계고, 변하는 무명의 세계와 거리를 둔 고정된 질서다. 따라서 그것은 실상의 어떤 요소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실상과 분리된 것이란 점에서 ‘무지’를 함축한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무지고 유용한 무지다.
 
식이란 무명 속에서 살아야 하는 생명체의 이 불가피한 의지와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다. 무명의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헤엄치고 걷고 달리며, 장애물을 피하고 먹이를 찾고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을 알아보고 도망치는 행동 속에서 형성되는 판단능력이고 식별능력이다. 그런데 무명과 행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하게 되는 이 식은 흔히 말하는 6식이 아니다. 6식은 6처(6입)를 조건으로 한다. 6처 없는 6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12연기에서 6처는 식 다음에 오는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식은 6처 이전의 식이고 6식 이전의 식이다. 6처 이전의 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약간 다른 얘기처럼 보이겠지만, 여기서 하나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2연기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것일까? 석가모니는 연기법에 대해 설하면서 그것은 부처가 나오든 안 나오든 간에 우주 안에 항상 존재하는 것인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12연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가 없어도 무명의 세계 속에서 무지와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연기법과 12연기의 적용범위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연기적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의 본성이 달라지는 것은 인간이든 아니든,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두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12연기에서는 육처가 있고 애착과 집착이 있으며, 생사의 관념이 있기에, 일단 생명이 없는 것, 6식이 없는 것들에겐 적용하기 어렵다. 기쁨과 슬픔의 감수 작용이나 애착 같은 작용이야 동물에게선 대개 발견되는 것이지만 유와 무, 생멸의 관념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나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믿었지만, 죽음 앞에서 동물들이 보여주는 태도에 대해 보거나 들은 적이 있다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식물이라면 어떨까? 식물에겐 감각기관이 따로 없지만 6식과 비교되는 감각작용은 존재한다. 빛을 향해 가지를 뻗고 다투는 것을 보면, 애착이 있음도 분명하다. 애착이 있다면 집착 또한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와 무, 생사와 생멸의 관념이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시지각이나 촉각 등은 있지만 의식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의식과 결부된 신체기관인 뇌가 없다는 점에서 없을 거라는 추측이 지금은 더 설득력을 가질 것 같다. 그렇다면 유무나 생사의 관념이 있다고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생사의 ‘관념’이 어찌 없을 수 있는가 반박할 수도 있다. 살기 위한 노력이나 충동은 이미 생의 관념이, 따라서 사의 관념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동(행)에 포함된 생사의 ‘관념’이 애착과 취착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생사의 관념과 같다고는 하기 어렵기에, 그걸 반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박테리아라면 어떨까?
 
지금의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다고 해도 12연기가 적용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정확히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관심사가 사람들의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으니, 인간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하기 십상일 것이다.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 질문이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화살이 어디서 왔나가 아니라 화살에 맞은 이를 치유하는 게 중요함을 역설한 바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석가모니의 관심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의 눈은 ‘중생’, 즉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향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12연기를 중생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미생물이나 세포적인 수준의 인식능력은 물론 식물이나 동물의 그것조차 알려진 바가 거의 없던 시대에 설해진 가르침에 대해 이런 질문은 던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고통의 이유를 통찰하고자 했기에, 당시로선 알려져 있지 않아서 명확히 말할 수 없었지만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의 행과 식에 대한 어떤 직관적 통찰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무명을 조건으로 하는 행도 그랬지만, 이를 특히 잘 보여주는 것은 육처 이전에 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무명을 조건으로 살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려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박테리아나 아메바에서부터 곰팡이 같은 균류, 양치식물과 현화식물 같은 식물들, 그리고 인간과 다른 동물들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가시적인 생물뿐 아니라 아귀나 아수라, 귀신이나 천신들마저 포함하는 일체 중생의 삶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식은 이런 다종다양한 중생들 모두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감각기관이나 그것의 작용이 있기 이전에 등장하는 식, 어쩌면 불합리해보이고 6처의 작용을 다시 말하는 듯 보이는 이 개념은, 6처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의 식의 작용 일반을 지칭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식과 6처의 작용으로서의 6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인간 아닌 것의 능력에 대해 지금의 지식을 통해 다시 읽으려는 시도는 사후적 합리화가 아니라 현재라는 조건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아귀나 아수라는 잘 모르겠지만, 박테리아나 아메바, 혹은 식물들조차 눈 귀 코 등의 6근이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6근이 없기에 식이 없다고 한다면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식이 없다면 식물이 어떻게 때를 알아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굴 것이며, 혐기성 박테리아는 어떻게 산소가 없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나 동물의 경우에도, 6식을 갖는 것은 유기체 수준에서다. 그러나 유기체만 식을 갖는 건 아니다. 세포들도 나름의 식을 갖고 있으며, 세포 안에서 활동하는 세포소기관들, 심지어 유전자 안의 뉴클레오티드들조차 식을 갖고 있다. 이 식들은 동물의 신체에 속하지만 6근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식이다. 살아있는 것들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는 한, 그 자체론 알 수 없는 무명의 세계를 알려는 의지가 발동하게 마련이고, 그 알려는 의지에 따라 나름의 식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식은 인간이나 동물 ‘이전’의 식이고, 인간의 경우에도 세포적인 층위나 분자적인 층위에서 작동하고 형성되는 미시적인 식이다. 동물적인 유기체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식이다. 6처 이전의 식이란 최소한 미생물이나 세포적 수준에서 존재하는 식의 작용, 따라서 6처나 6근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작동하는 식의 작용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존재하며(6식 이전의 식이고, 세포적 수준의 식이 그것이다) 인간 아닌 중생들에게도 존재하는 확장된 개념의 식이고 미시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식인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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