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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운주사 천불천탑

아름다운 탑·불상에 뒤덮힌 신비의 계곡…조성 기록은 전무

▲ 화순 운주사. 한 계곡 안에 수많은 탑과 불상이 늘어선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전남 화순 운주사는 계곡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수많은 탑과 불상 전체에 대한 통칭이다. 하지만 단순히 넓게만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 안에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 사역에 왜 이렇게 많은 불탑과 불상을 세웠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 조형양식이 마치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의 조각을 보는 듯한 추상성을 느끼게 해 도대체 이런 양식이 언제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광범위하게 분포된 탑·불상
유례없는 대규모 불사임에도
창건 목적·시기 등  미스테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라
1500년대 이전 조성으로 추정

조성 배경·사상 견해 분분
미륵불교 신앙 형태로 보기도
독특한 조성양식도 눈길 끌어

특히나 수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된 상당한 대규모 공사였을 것이고, 계곡 전체를 무대로 하고 있을 만큼 거찰이었음이 분명한데도, 문헌상으로는 마치 유령처럼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하다. 그나마 조선초 1530년대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능성현’조에서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천 개이다.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어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분명히 이곳이 운주사를 지칭하며 따라서 최소한 1500년대 이전, 고려시대 언제쯤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한편 운주사에서는 홍치(弘治) 8년(1495)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 운주사 천불.

이보다 더 후대인 17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에서는 “천불산 서쪽에 있는데, 오래전에 폐사되었다… 석불·석탑이 대소로 심히 많아 이를 천불천탑이라 부르며, 또한 석실이 있는데 그 안에 두 석불이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전하기는 신라 때 조영한 것이라 하며, 혹은 고려 승려 혜명(惠明)이 신도 수 천명을 동원해 각각 조성하게 했다고 한다”고 기술되어 있어 이미 이 시기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정유재란 당시에 소실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한편 17세기 당시에는 신라, 혹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졌음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창건의 목적이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이런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동국여지지’에서 추정한 것처럼 정말로 신라시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을까? 고려시대에 세워졌다면 혜명은 누구일까?

▲ 운주사 대형석조감실 내부의 불좌상.

운주사가 밀교적 성향을 지녔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이는 천불천탑이 지닌 풍수·주술적인 의도를 밀교라는 테두리에서 해석한 것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의 밀교적 성격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예를 들어 밀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단과 같은 장소성이나 엄격성 등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운주사 출토 유물 중 범자문 수막새에 ‘옴마니반메훔’이 새겨진 것이나 범자문 향로편이 발견된 것 등은 진언밀교적 성격이긴 하지만 운주사만의 독특한 성격으로 보기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유물이다.

운주사의 화엄적 성격을 제시한 주장도 있었다. 특히 석탑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이들 문양들이 ‘십바라밀정진행열도(十波羅密精進行列圖)’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인데, 이러한 ‘십바라밀정진행열’은 그 기원을 의상대사의 ‘법성게정진도(法性偈精進圖)’에 두고 있으므로, 결국은 의상의 화엄종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감실에 등을 마주 댄 비로자나·석가 두 불상의 조합은 화엄종에서의 법신·화신·응신의 3신을 대신하여 법신과 화신만 봉안한 밀교적 양존체제라고 하여 밀교적 성격도 있다고 보았다.

▲ 추상적인 운주사 불상. 서툰 조각솜씨로 보기 보다는 고려왕릉 무덤조각에서도 발견되는 고려 특유의 추상적 미감으로 보인다.

한편 인왕도량의 성격으로 보는 주장도 주목된다. 운주사가 창건에 앞서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의 인왕백고도량이었던 경주 황룡사가 불탔는데, 이를 대신하여 당시 집권자였던 최씨 무신정권이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계종 본산 송광사 인근 운주사에 새 인왕도량을 세웠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최항(崔沆, ?~1257)이 이 시기에 많은 수탈과 횡포를 자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행적도 운주사 건립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해석도 운주사 창건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인왕백고도량이 왜 천불천탑 사상과 연관이 되는 것인지, 혹은 이러한 독특한 양식을 띠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비록 ‘백고좌회’의 개념과 수많은 불상 봉안은 유사한 속성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원래 ‘백고좌’는 승려를 모시는 자리이고, 불상을 모시는 자리는 아니므로, 이에 대한 추가적인 해석도 필요하다.

▲ 절벽의 기울기를 따라 구부러진 불상의 등은 이 상들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봉안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한편 운주사의 불상들을 미륵으로 해석하고, 이는 미륵의 하생과 함께 도래할 용화세계를 염원한 민중의 바램이 담겨있다고 보는 해석도 등장했다. 실제 우리나라의 야외에 조성된 석불상들 중에서 이렇게 장승처럼 생긴 불상들을 흔히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고, 민중화된 불교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 불상을 미륵으로 보는 견해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후대에 받아들였는가의 문제와 지금 논하고자 하는 조성 당시의 원래의 의도를 구별해본다면, 야외의 미륵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불상들과 운주사의 불상들을 모두 미륵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운주사 조형성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 가운데 급기야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민중의 소박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일반의 기대와 달리 실제적으로는 이와 같은 수많은 탑과 불상을 만드는데 있어서 막대한 노동력과 물자가 필요하다. 때문에 운주사는 남서해안에서 활동하던 삼별초와 같은 반몽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화순 지역에 주둔하던 원의 군부가 주도하고 막대한 고려의 물자와 석공인력이 동원된 결과 가능했다는 것이다.

▲ 운주사에서 난형탑으로 불리는 탑 형식. 몽고의 라마탑 형식을 고려 장인이 서툴게 모방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형식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특히 원이 이를 조성한 이유는 멀리 타국에 나와 있는 원병(元兵)들의 무운을 빌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를 지시받은 고려의 석공들은 라마불탑에 익숙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을 토속적인 고려식으로 재해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소한 라마탑을 시험적으로 원반형탑이나 난형탑(卵形塔) 형태로 쌓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서 석탑에 새겨진 ◇형과 X형 등의 문양은 몽골식 도안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더불어 운주사 불상들의 장승같은 모습은 몽골 또는 돌궐 지역의 석인상과 조형적으로 유사한 점이 보이는 것도 주목해야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설에 의하면 비록 실질적으로 운주사를 조영한 것은 고려인들이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외침세력이 있다는 점에서 과연 운주사의 위상을 우리 미술사 혹은 문화사에서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 하는 많은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주장은 왜 운주사와 같은 특이한 조형성이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해준다는 점, 대규모 불사였음에도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는 점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첫째로 석탑의 기하학적 문양들은 몽고의 문양과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다른 미술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몽골·돌궐 석인상과 운주사 석불상은 표현기법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무리 몽고군이 조성했다고 하더라도 고려의 입장에서는 결국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한 사업이었으므로 전혀 기록이 남지 않을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운주사의 조성배경을 불교가 아닌 도교로 바라본 견해도 있었다. 그것은 불상들의 수인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모두 옷소매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실제는 불교적 수인이 아니라 중국인들처럼 소매 속에 손을 넣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비롯한 오래된 기록들에서 운주사를 모두 불교사찰로 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 석조감실 불상 중 지권인처럼 보이는 수인은 실제는 합장인이므로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석가·다보불의 조합이며, 감실 앞의 7층 석탑은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땅에서 솟아오른 보탑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문제를 정리해보면 세 가지가 핵심이다. 대규모 공사였지만 기록에 전혀 남지 않았고,그 양식이 매우 독특하며, 굳이 한 곳에 이렇게 많은 천불천탑을 세운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들 문제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천불천탑은 특정 집단의 발원이 아니라 민중 각각의 발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으며, 그러기에 정교하고 수준 높은 조각양식 대신 말하자면 민화적 양식이 강조되었고, 따라서 기록에 전혀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장길산’과 같은 소설 속에서 상상이 덧붙여져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모든 것은 제자리를 맴도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그 자체로서 운주사는 이미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거기다 추상적 조각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니 이에 대한 호기심은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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