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 문정희의 꽃 한 송이

기자명 김형중

‘국화 옆에서’에 대한 제자의 화답 시

지난해 흙 속에 묻어둔
까아만 그 꽃씨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 자리에 씨앗 대신
꽃 한 송이 피어나
진종일
자릉자릉
종을 울린다

‘까아만 꽃씨’는 불성 상징
‘꽃 한송이’는 화엄의 세계
장식하고 있는 부처의 발현
짧은 시에 깊은 철학 담아

문정희(1947~현재 ) 시인은 고교시절부터 청소년 백일장을 휩쓴 문학천재 소녀로 시인학교인 동국대학교에 입학, 미당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문명을 날린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문단의 최고 여류시인이다. 불연(佛緣)이 깊은 시인이나 불교 용어를 구사하여 쓴 불교적인 시는 드물다. 직접적인 불교 용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불교의 핵심 주제인 깨달음과 인생의 깊은 의미를 읊는 시의 고수이기 때문에 그렇다.

미당은 ‘국화 옆에서’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하면서 소쩍새도 데려오고 천둥도 몰고 왔으나, 문정희 시인은 “지난해 흙 속에 묻어둔 까아만 그 꽃씨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 자리에 씨앗 대신 꽃 한 송이 피어나”라고 노래했다. 시인은 ‘까아만 씨앗’을 땅속에 묻어 시상을 압축시켰다. 시는 짧아야 긴 여운을 남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나타나는 인과법과 인생이 인과의 도리에 따라 돌고 도는 윤회의 법칙을 설하는 시이다.

까아만 씨앗이 한 송이 꽃을 피워낸 것이다. ‘국화 옆에서’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을 파헤쳤다. 꽃이 피어나 하루 종일 흔들리면서 향기를 뿜고 있다. 세상의 풍파를 버티고 있다. 시인은 이것을 “종을 울린다”고 읊었다. 시인이 보고 있는 꽃이 둥근 치마처럼 종 모양을 한 초롱꽃인지 모른다.

그의 시에는 종소리와 꽃이 자주 등장한다. 종은 깨우침과 울림을 준다. ‘자릉자릉’은 얇은 쇠붙이가 부딪쳐서 자스랑 소리가 나는 의성어이다. 시인은 “꽃은 핏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기에 늙은 꽃은 없다. 꽃의 생애는 순간이고 순간에 전력을 다한다. 오직 순간만이 나의 전부이다. 꽃처럼 살자”고 말하고 있다.

스승의 ‘국화 옆에서’에 대한 제자의 야심 찬 화답시이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만하다. ‘까아만 꽃씨’는 불성을 상징하고, ‘꽃 한 송이’는 아름다운 화엄의 세계를 장식하고 있는 부처의 발현(發現)이다. 중생이 부처가 되었다.

과거의 슬픔과 기쁨, 선행과 악행의 업보가 어디로 사라져서 안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씨앗이 되어 현재의 내 모습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고,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생존하고 있다. 시인은 또 지금 내일의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꽃 한 송이가 “진종일/ 자릉자릉/ 종을 울린다”고 읊고 있다.

생각이 행동을 만든다. 지난해 어느 술집에서 뇌까린 싯구가 한 송이 국화꽃처럼 예쁜 시로 탄생되기도 한다. 우리의 생각이 저장된 창고가 제8아뢰야식인 종자식(種子識)이다. 까아만 씨앗인 종자이다. 무의식 속에 묻어둔 그 생각의 씨앗이 인연시절이 도래하면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생각을 하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독한 생각을 하면 사람을 해치는 독버섯이 자라게 된다.

시인은 ‘나의 아내’에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라고 읊고 있다. ‘꽃 한 송이’는 아주 짧은 시이지만 깊은 철학을 담고 있는 시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씨 뿌리고, 거두기 위하여 삽질하고 괭이질을 한다. 내일을 생존하기 위하여 또 버둥버둥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고, 자릉자릉 종을 울리며 살아간다. 이것이 인생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