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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22. 각오의 기점(4)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10.27 11:39
  • 수정 2016.01.05 16:04
  • 댓글 0

깨달음은 진실하게 필요로 하는 번뇌 속에서 이루어진다

 
산 아래에 자리 잡은 한 사찰이 있었습니다. 이 사찰의 바로 뒤쪽에 산골짜기가 있었는데 비가 내리면 물이 흘러내려 곧장 물이 부딪치는 곳에 사찰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큰비가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이날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자 사찰의 스님들은 문도 모두 닫고 틈도 전부 막았습니다. 그리고 뜰에 웅덩이를 파고는 돌로 단단하게 높이 담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물을 모아 마실 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비가 많이 내려 물도 점점 많아져 뜰 안을 가득 채우고 높이 쌓은 담장도 넘어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스님들은 모두 사찰의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비가 더 많이 내리자 사찰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 한 명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행’이 따르지 않는 ‘원’은
공중에 지은 누각처럼 공허
진실한 수행과 행동으로
중생에게 ‘이고득락’ 해야

“스승님 우리 옥상이 왜 흔들립니까?”

그러자 경전을 읽기 좋아하던 한 사형이 ‘육조단경’에서 나오는 말로 대답했습니다. “집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네 마음이 흔들리네.” 이 말에 모두 깨닫고는 “그럼 우리 마음이 안정되면 되겠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옥상에서 뛰어 내려가 문을 발로 차서 열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쏴’하고 흘러나갔고 집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문을 연 제자가 물었습니다.

“당신들 마음이 아직 흔들립니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옥상에서 함께 가만히 있던 사람이 내려와 손뼉을 치며 말했습니다.

“보시오. 우리의 정력(定力)이 물을 다 나가게 했소.”

스승은 그냥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신(信), 원(愿), 행(行)은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원이 있으면 행이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말은 적게 하고 수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공허한 선어(禪語)나 선화(禪話)를 말하면서 깨달은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것은 마치 공중누각을 만드는 것과 같은 황당무계한 말입니다.

불법은 중생을 이고득락하게 합니다. 즐거움을 얻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는 진실한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추구할 때 빛이나 공허한 허튼소리를 추구한다면 결국 당신은 그런 것들만 쫓게 됩니다.

오늘 이 사찰을 누가 구했습니까? 좋은 물이든 나쁜 물이든 많으면 집이 무너지고 사람도 죽게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진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헛소리는 적게 하고 많이 수행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행하기 위해 발심했지 거짓으로 행하려고 발심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세계는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지만 수행할 때는 구체적인 인물, 시비, 사건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주하는 것은 눈앞에 발생한 장애이며 어떻게 이 장애를 인식하고 해결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집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부서지는데 아직도 거기서 죽음을 앞두고 참된 모습을 마주하지 못하고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 여기면서 곧 물에 떠내려갈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발원한 사람은 진정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진정으로 수행하든 진정으로 일하든 오늘 나가서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그들의 재난을 없애며 어려움을 해결하고 사람들을 가르쳐 깨닫게 하거나 도량을 세우는 것은 모두 중생 제도를 위한 일로서 아주 절실한 일들입니다. 절대 허황된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사람들이 진실하게 필요로 하는 번뇌에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번뇌가 없으면 진정한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제자들에게 일깨웁니다.

‘번뇌가 없으면 깨달음을 말할 수 없다. 진정한 번뇌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다.’

사회학 이론으로는 우리가 정확한 인식과 투철한 견해로 인류의 번뇌와 충격, 재난을 마주하여 깨달으면 비로소 신심이 있게 되고 지혜로 문제들을 잘 해결하며 더 신심 있는 삶을 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에너지도 더 많아져 최소한 번뇌를 마주할 신심이 생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번뇌에 눌려 죽을 지경입니까? 수행하든 수행을 하지 않든 번뇌는 누구나 부딪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행하면 더 분명히 느낍니다. 진정으로 발심하고 대원을 세우며 속히 성불하려는 사람에게는 번뇌와 충격이 더 미친 듯이 닥칩니다. 당신이 누세 이래, 당신의 누세를 합하면 십만 년은 넘겠죠. 십만 년 동안 저지른 잘못은 너무 커 십만 년 형을 선고해도 마땅합니다. 오늘 당신이 해탈해야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인간 세상에서 더는 괴로움을 받지 않고 나쁜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해탈하려 할수록 원한 있는 빚쟁이와 염라대왕은 당신을 그 자리에 머물게 통제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의 원이 속히 성불하는 것이라면 받게 될 시련은 아주 클 것입니다. 성불하는 것은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과 같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반드시 먼저 죽는 과정을 체험해야 합니다. 먼저 죽어야만 다시 태어납니다. 크게 무너뜨려야 크게 세울 수 있고 무너뜨리지 않으면 세울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릴 때 생긴 부스럼과 같습니다. 부스럼이 생기면 가렵기만 하고 별로 느낌이 없어서 터뜨려버리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의사도 치료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 곪아서 고름이 되면 스스로 터지고 낫습니다. 흉터도 사라집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죽은 후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만약 죽은 후 태어나는 것이 깨달음으로 삶을 얻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당신의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을 ‘봉황열반(鳳凰涅槃)’이라고 합니다. 좀 촌스럽게 말한다면 애벌레가 나비로 되는 과정입니다. 벌레였지만 잘 수행하면 그 누에고치를 뚫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에고치는 얼기설기 1만 겹의 그물에 싸여 있지만, 그것을 물어뜯어 뚫고 나올 때 당신은 나비이고 봉황입니다. 봉황은 이전에 까마귀나 닭이었지 원래부터 봉황은 아니었습니다. 수행으로 씨앗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탐욕스럽고 사악한 범부의 씨앗이 부처님의 씨앗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 번 죽어야 하고 여러 번 죽어야 합니다. 마치 서유기의 당 삼장처럼, 죽음은 당하지 않았지만 81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당삼장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놀라서 죽거나 시달려 죽었을 것입니다. 요괴나 마귀들은 모두 그를 먹으려고 했는데 만약 당신이 마주한 것이 모두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생명의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공갈, 위협, 빈곤, 병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마음에 이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얼마 전이 유명한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의 사망 10주기였습니다. 홍콩에서 많은 그의 팬이 그날을 추도하고 그의 동료들의 추념공연도 있었습니다. 아주 감동적이었다는 것을 보도를 보고 알았습니다. 장국영은 잘생겼고 연기도 좋아 인기가 높았습니다. 외모가 그렇게 좋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경제 상황도 일반 사람들보다 부유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요? 그의 매니저는 옥상에서 투신하는 순간 장국영이 “나, 너무 힘들어. 이번엔 푹 잘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대중이 모두 주목하고, 경제 수입도 아주 높은 사람이었잖아요. 매니저 말에서 추측할 수 있지만, 그는 생전에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했습니다. 남이 자는 시간에 그는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뭘 근심했는지는 본인만 압니다. 스트레스와 공포 때문에 생명이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래서 영원히 잠들기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서술한 말은 아름다운 시 같고 봄바람 같지만 아닙니다. 그 역시 생생한 생명이었습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그 순간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고통의 극치인 상태에서 구명의 갑판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결과는 갑판이 부서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가장 용감하지만, 또한 날카롭지 않은 진정으로 금강 같은 마음으로 하늘만큼 큰 모든 괴로움과 시달림을 마주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푸티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바보처럼 ‘나는 괴로움이 두렵지 않다’ ‘나의 노랫소리는 가장 아름답다’ ‘나는 멋지게 생겼다’ 등을 외칩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이 ‘진푸티 성경’을 보고 한 무리 나약한 자와 바보들의 성경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나는 세상의 충격과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사람을 대표하여 이런 자아 제시의 말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의 설법을 읽노라면 신심은 한 생각 사이에 생겨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의 한 생각으로 말입니다.

장국영의 마지막 생각은 ‘나는 갈 길이 없다’이었습니다. ‘하늘, 땅, 부처님, 신이여, 나의 부모님이여. 당신들에게 미안합니다. 나 먼저 갑니다’하고 ‘쿵’ 뛰어내렸습니다.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의 부모가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롭습니다. 한 제자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만약 장국영이 일찍 스승님을 만났다면 우리의 바보 같은 ‘진푸티 성경’을 읽었다면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영화에 출연했을 거예요.”

삶과 죽음은 이렇게 한 생각의 차이입니다. 자신의 느낌으로 ‘나는 살 수 있어. 나는 버틸 수 있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나는 인간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용사다’ 그렇게 하면서 대범하게 잘 살고 가정의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남자로서, 애들의 아버지로서, 애들은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이 집안의 기둥으로 당신이 없으면 이 가정은 끝장이고 무너집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 책임져야 합니다. 한 남자로서, 한 아버지로서, 자기 죽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혹시 아버지로서 애들에게 호사스러운 생활이나 큰 집을 줄 수 없을지라도 아버지라는 이름만 존재해도 바로 자녀의 천당이며 자녀의 생명에서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자녀의 어머니로서 막다른 길을 갈 수 없고 죽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바로 그들의 혈액이고 자녀의 생명에서는 관세음보살로 날마다 당신의 보호와 자비로운 보살핌이 없으면 자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당신과 같이 죽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위하여, 세상에서 비참한 괴로움을 줄이기 위하여, 부모 된 자는 반드시 가장 굳센 마음으로 모든 괴로움을 마주해야 합니다. 만약 에너지가 부족하면 그 바보 ‘진푸티 성경’을 읽으세요. 한 번 읽으면 한평생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2013년 4월 3일 타이완 타이베이
번역:정금주
제공:보리선수 약사선원 (1661-0803)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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