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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 스님 기고 전문]-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10.29 23:46
  • 댓글 6

월간 ‘불광’ 특별기고 전문-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대승불교와 조계선풍, 그 현대적 계승과 발현을 위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한 반론에 답변 드립니다

현응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지난 9월 4일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글은 불교계에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컸으며, 논쟁의 대부분은 반론 성격이었습니다. 지난 10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도 성명서 형식을 빌려 장문의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궁금해 했습니다. 현응 스님의 답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월간 「불광」은 현응 스님께 답변을 요청 드렸고, 답을 보내왔습니다. 여기 그 전문을 싣습니다. 한국불교가 한 걸음 더 진화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지난 달 초(2015. 9. 4)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내 발제문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이하 발제문)에 대해 많은 분들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다. 발제문의 요지는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 ‘깨달음은 지혜와 이해의 영역이며, 선정수행을 통해 이루는 몸과 마음의 높은 경지를 뜻함이 아니다’ ‘깨달음을 잘 얻기 위해(잘 이해하기 위해)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불교를 풍부하게 할 다양한 독서 등이 현대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하다’ 등이었다. 이러한 발제문 내용에 대해 과분한 평가와 의미부여를 해 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강경한 반대와 비판의견을 표명하신 분들도 많았다. 반대의견을 가진 여러 분들은 신문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반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종단의 전국선원수좌회(이하 수좌회)도 최근 성명서를 통해 내 견해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떠나 이번에 주신 의견들은 내 생각을 다듬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특히 반대의견을 주신 분들께 진정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불교를 보는 견해는 다양하며, 강조하거나 선호하는 영역이 다를 수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와 의견을 달리한다 해서 내가 일일이 해명하거나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토론을 해서 어느 한 쪽을 승복 받아 입장을 통일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 견해에 대해 비판하거나 우려를 표한 내용들이 공개적으로 표명되었기에 대중적인 궁금함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어 내 의견을 밝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비판자들의 반론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1.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단)의 종지宗旨에 대해

조계종단의 종지는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종헌 제2조)라고 되어 있다. 이 종지에 의하면, 1. 부처님의 근본교리를 잘 알아 받들어야 된다는 것과, 2.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을 중심에 놓고, 3. 전법도생이라는 중생교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 조계종단의 나아갈 방향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교화를 펼치신 이후 어언 2,6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와 지역을 거치면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무수한 가르침의 유형이 나타났다. 20세기 들어 조계종단은 역사상으로 나타난 다양한 불교의 가르침을 모두 포괄하고자 하는 큰 시도를 했다. 이는 어느 나라 불교에서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시도라 본다. 이것이 바로 한국불교의 통불교通佛敎 정신이다. 그런데 다양한 불교를 포섭하되 혼란에 흐르지 않게 하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조계종단은 그 방법으로써 각각의 가르침과 교리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 모든 가르침을 선禪의 정신으로 엮어내어 통합하고자 한다.
2,600년의 다양한 불교를 포섭하여 통합해 내는 조계종단의 선禪 정신은 무엇인가? 선에는 여러 가지의 정신과 선풍이 있다. 그 중 어떤 선 정신을 말하는가? 종헌 제1조에는 종명宗名을 ‘조계종’으로 한다는 것과, 고려시대의 태고 스님이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써 조계종이라 공칭한 뜻을 이어받아 우리 종단의 명칭을 ‘조계종’이라 한다고 규정했다.
조계종曹溪宗이라는 뜻은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중시하고 존중하는 가르침과 정신’이라는 뜻이며, 이를 교단의 종지로 삼고, 교단의 명칭으로까지 사용하는 것이다. 조계선풍은 중국 당나라 선불교의 육조六祖 혜능 스님이 정립했다. 이후 역대조사스님에게 그 선풍이 이어져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심이 되는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정신의 요지는 ‘돈오頓悟’이다. 그리고 ‘점수漸修’ ‘선정禪定’ ‘수증修證’을 배격한다. 이것이 바로 조계종단이 존중하는 선禪 정신이다.
돈오는 ‘곧바로 안다’는 뜻이다. 점수, 선정, 수증을 배격하고, 곧바로 알아채는 돈오정신으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하는 것이다. 혜능 스님은 반야지를 통해 불법을 ‘곧바로 알 수 있다(돈오)’고 말씀한다. 달마 스님의 이입사행二入四行과 능가선의 가르침, 그리고 도신, 홍인 스님의 ‘수일불이守一不移’ ‘염불선의 요소를 띤 일행삼매一行三昧’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동산법문 시대를 거쳐 중국의 선종禪宗은 마침내 혜능 스님이 조계선풍을 펼침으로써 비로소 남종南宗이라 불리는 조사선의 시대를 열었다. 혜능 스님이 말하는 돈오는 반야지를 통해 ‘곧바로 안다’는 뜻이며, 동산법문의 일행삼매도 혜능 스님에 의해 ‘곧은 마음으로 행주좌와에 바로 쓰는 마음’으로 변환되었다. 반야부 경전(『금강경』, 『심경』, 『유마경』 등)에 근거한 말씀이다.
조계선풍에 의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초기불교의 니까야와 아함의 말씀을 선정삼매를 강조하는 가르침이 아닌,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석색입공(析色入空=析空觀)이라 하여 존재를 무수히 분석하여 그 결과로 연기관緣起觀, 공관空觀을 깨닫고자 하는 번쇄한 아비달마의 학문적 불교를 벗어나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반야지로 비추어 보아 곧바로 공성(연기성)임을 통찰해서 모든 괴로움을 벗어난다는 돈오의 입장에 서게 된다.
한국불교의 전통교단인 조계종단은 이러한 조계선풍의 돈오사상을 중심에 두어 다양한 불교를 회통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 제종의 가르침을 모두 종단의 교육과정에 포섭하여 교화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종류의 불교를 두루 포섭하는 조계종단의 포용성, 역동성, 개방성은 나라마다 특정 불교교파에 국한되어 있는 오늘날의 세계 어느 불교권의 현실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근년에 나는 ‘조계종’이라는 교단의 명칭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이 주장의 취지는 한국불교가 1,7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모두 승계한 유일한 교단이기 때문에, 이 전체의 역사와 전통을 모두 담아내는 보다 큰 그릇으로서의 명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선종은 통일신라 말기에 한반도에 전래되었지만, 한국불교는 그 이전 삼국시대, 가야시대부터 시작되어 수많은 고승의 교화업적과 사찰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전통과 자산을 승계한 교단이기 때문에 연고권 등 법적인 문제나 향후 통일시대를 대비해서라도 종명개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지宗旨는 이와는 다른 문제다.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이념을 끌어가는 종지는 조계선풍이 가장 적합하다는 게 나의 개인적 소신과 판단이라는 점을 밝힌다. 왜냐하면 선禪이야말로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면서 모든 불교를 통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 조계선풍(남종선)은 ‘선정수행’과 ‘닦아 증득함’을 배격함

혜능 스님은 『육조단경』 곳곳에서 ‘닦아 증득함(修證)’과 선정수행을 배격했다. 좌선이란 꼭 앉아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도 했다. ‘돈오’와 ‘견성’을 강조하면서 반야지로 ‘곧바로 아는 것’을 강조한 가르침이 조계선풍이며, 남종선이요, 조사선인 것이다. 이런 가풍에서는 ‘선정수행’과 ‘닦아 증득함’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혜능 스님의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먼지를 닦아내랴’라는 조계선풍은 회양 스님의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一物不中)’, 마조 스님의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라는 조사가풍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혜능 스님의 ‘무념을 기본정신으로 삼는다(無念爲宗)’는 그 ‘무념’은 망념이 없는 것을 말하며, 그 망념은 『금강경』에서 말한 그 사상(四相=아, 인, 중생, 수자)이다. 이러한 망념은 닦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반야지로써 곧바로 통찰하여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조계선풍은 ‘간정看淨’ ‘간심看心’을 강조하는 수정주의修定主義를 비판했다. 그래서 북종선풍을 ‘응심입정凝心入定, 주심간정注心看淨, 기심외조起心外照, 섭심내증攝心內證’ 하는 수행법이라 지목하고, 이러한 수행법은 ‘닦는 깨달음’이며, ‘상대적인 수행법’이라 규정하면서 이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것이 조계선풍이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리는 이유다.
오늘날 제방선원의 수선현장에서 ‘응심입정 주심간정 기심외조 섭심내증’이라는 북종의 참선을 하는지, 반야지를 통해 돈오와 견성을 하고자 하는 조계선풍의 참선을 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번 수좌회의 성명은 나의 발제문의 내용에 대해 완곡하지만 강경하게 비판했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선정수행이라는 오랜 수선修禪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발제문의 주장에 대해, 수좌회는 “닦음(修)의 원인이 없는 분별망념으로 닦음의 결과인 깨달음이 되며, 부처님께서 니까야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설하고 있는 선정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간과한 주장이며, 역대조사가 고구정녕 설파하신 수증의 종지를 훼손한다.”고 반박했다. 오늘날 수좌회가 니까야에 의거한 선정수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닦아 증득한다(修證)’는 북종선을 존중하고 있는지 잠시 의구심이 들었다.

3.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오랜기간의 선정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을 부연 설명함

먼저 내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 했을 때, ‘잘’이라는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을 유념해주길 바란다. ‘잘’이란 표현 속에는 설명해야 할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들은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 선불교를 거치면서 경전과 어록에 따라 앎, 지혜, 통찰지, 명지明智, 광명, 각覺, 오悟, 여실지견如實知見, 여리작의如理作意, 명심明心, 견성見性, 대오大悟, 확철대오廓徹大悟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표현이 있다. 이 표현들은 각각 특정 교판과 이해의 입장에 따라 사용됐다. ‘깨닫다’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깨닫다’와 ‘잘 이해하다’는 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다.
나는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함에 있어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현대적 언어로 표현했다. 불교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뜻이다. 불교교리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다. 지혜는 반야지를 뜻하는 ‘보디’이며, 자비는 ‘사트바(삶과 역사)’에서 실현하는 모든 바라밀이다. 내가 사용한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대승의 반야부 경전에서 말하는 ‘반야지’에 닿아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즉 ‘잘 이해하는 깨달음’은 대승의 ‘반야지’를 현대적 용어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반야부의 많은 경전에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반야지로 비추어 보아 곧바로 공성(연기성)임을 통찰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기존의 부파불교의 수행적 풍토에서는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금강경』, 『소품』, 『대품』 등의 반야부 경전들은 설법 중간에 자주 “이런 가르침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不驚, 不怖, 不畏)’ 그것이 오히려 희유할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상좌부 등 많은 부파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이란 오랜 기간의 선정수행을 통해서만 존재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의 여러 단계를 거쳐 깨달음을 성취한다.”라고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부파불교의 수행승들에게는 ‘반야지로써 곧바로 불도를 성취한다.’는 주장은 놀라운 이야기, 두려운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장기간의 선정수행, 그리고 교리분석과 논쟁에 빠져있는 부파불교(아비달마)를 벗어나는 불교혁명을 했다. 반야지로 단시간에 삶과 존재들에 대한 올바른 통찰의 깨달음을 얻고, 곧바로 각종 바라밀과 보살행을 펼치는 대승불교시대를 연 것이다. 이번 발제문에서 주장한 취지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오랜 선정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일부 풍조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주장의 근거는 조계선풍이요, 대승 반야경의 가르침이다.
만일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깨달음도 얻음도 없다(無智亦無得)’의 뜻이나, 『유마경』에서 말하는 ‘상대의 입장을 떠난 불이不二’의 뜻으로 내가 말한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방편적 표현을 문제 삼는다면, 경전에서 말하는 ‘앎’ ‘지혜’ ‘성품을 봄(견성)’ ‘여실지견’ 등 모든 용어들도 언어화 되는 순간 상대적인 한계를 지적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수좌회의 성명도 “번뇌 가운데 있되 번뇌를 떠남이며, 허공 가운데 있되 허공을 떠난 경계이다.”, “번뇌 속에서도 번뇌의 공성을 보면 번뇌를 떠나게 되고, 생각(이해)하면서도 생각의 본질을 보면 생각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닌 깨달음의 경계이다.”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닌가 한다. 전적으로 공감하는 구절이다.
계정혜는 불교의 삼학三學이라 말한다. 그래서 계정혜의 하나인 선정은 매우 중시되었다. 하지만 나는 선정이 과거 인도의 종교풍토 및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과거 베다시대 이후 인도의 대다수 종교수행교단에서는 선정수행을 중시했다. 당시의 풍토에서 불교교단에서도 선정을 존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전에서 보듯이 부처님은 성도 이전에 고행과 선정수행 모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떠났으며, 마침내 연기緣起를 살피고 통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성도 이후 설법하는 과정에서도 선정을 그리 강조하거나, 같이 선정수행하자고 하지도 않으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와 중국에서까지 오랜 기간 동안 선정수행이 지혜를 이루는 훌륭한 방편의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사선팔정의 선정수행이 꼭 필요한지, 그리고 받아들여질는지 의문이다.
한편 사마타, 위빠사나, 호흡관, 염불관, 자비관 등 다양한 전래의 불교수행법이 현대인들의 심리문제를 치유하거나, 정신과 육체기능의 성장에 효과가 크다고 인정받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은 불교의 다양한 선정수행법을 보다 더 잘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불교를 잘 이해하는(깨닫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정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안과 종교적 깊음을 얻은 분도 많을 것이다. 나는 선정수행을 좋아하는 분들의 선호에 대해서는 이해는 달리하지만 존중할 것이다. 이제는 아함이나 니까야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혜와 자비라는 코드로 밝혀내어 현대사회에서 실현할 때라고 본다. 그리고 그 출발은 고집멸도의 가르침에서부터 해야 한다고 믿는다.

4. 초기경전의 가르침은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

나의 발제문은 ‘잘 이해하기(잘 깨닫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그래서 초기경전 중 가장 오래된 원형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보이는 『마하박가』(전재성 역주, 2014)를 들어서 이야기했다.
『마하박가』를 가장 오래된 초기승단의 원형을 담고 있다고 보는 이유는 부처님의 성도직후 장면과, 첫 설법의 5비구에서부터 소위 1,200명 제자라 일컫는 초기승단의 비구들에게 교화하는 기간까지 수년에 걸친 불교승단 초기시절의 내용을 시간대별로 길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200명 제자들을 맞아 교화할 때까지 이 기간까지는 비구에게 주는 구족계 또한 “수행승들이여, 오라! 가르침은 잘 설해졌으니,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 청정한 삶을 살아라.”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구족계를 설하던 초기교단시절이다. 그 중간에 삼귀의를 하는 것을 추가했을 뿐 아직 특별한 계목(戒目, 바라제목차)도 제정하기 전인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의 가르침과 교단의 역사를 결집할 때 당연히 그 순서는 부처님의 성도와, 초기 교화와 승단의 시작부터 정리하지 않았을까? 이런 추정으로 본다면 『마하박가』야말로 가장 먼저 송출, 결집되어 전승된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하박가』는 부처님의 초기교화 시절의 내용을 생생히 담고 있으며, 후세 부파교단의 전승과정의 윤색을 비교적 덜 받은 율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발제문을 통해 부처님의 첫 설법과 초기 승단이 형성될 당시에 부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고 지도했나를 소개했다. 『마하박가』에 나타난 교화과정에서 부처님은 선정에 대해 강조하거나 선정수행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어쩌면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설법, 질의응답, 토론으로 지도하고 가르쳤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항상 “넘어진 것을 일으키듯,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진리를 밝혀주셨다.”고 부처님의 가르치는 방법을 찬탄했다.
이에 반해 내 발제문을 비판하는 분들은 “깨달음을 교리적 이해의 수준으로 격하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초기경전 니까야의 여러 경에서 “깨달음은 색계 18천과 무색계 4천에 대응하는 사선팔정(四禪八定=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과 상수멸처정을 거쳐서 이루는 것.”이라고 언급한 내용을 들어 내가 말하는 깨달음이 낮은 단계의 교리적 이해일 뿐이지, 부처님과 많은 아라한들의 큰 깨달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선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 깨달음’이 가능한지 그 경전적 근거를 대보라고 추궁한다.
우선 『마하박가』에 나타난 불교교단의 초기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면을 다시 보자. 부처님 성도직후의 깨달음 내용 서술, 5비구를 교화, 야사 등 54인에 대한 설법, 60인 아라한을 여러 지방으로 보내고 그 후 새로 입문한 수행승들을 위한 설법, 우루벨라에서 30명 젊은이에게 한 설법, 우루벨라의 3가섭과 1,000명의 제자에게 한 가야산 설법,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과 12만 명의 바라문을 대상으로 한 설법 등이 차례대로 서술되는데, 이 모든 설법 과정에서 한결같이 보시, 지계, 생천의 가르침, 고집멸도에 대한 가르침, 탐진치·생로사·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을 극복하는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선정수행(사마타, 위빠사나, 사선팔정 등)을 설하거나, 함께 선정수행을 닦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설법과 가르침을 통해 당시의 모든 수행승들은 마음의 집착을 떠나 번뇌에서 해탈하게 되었으며,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마하박가』는 말하고 있다. 나는 『마하박가』의 이러한 내용을 보고 초기 수행자들은 설법과 대화와 질의응답(토론, 대론)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깨달은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상윳다니까야』(각묵 옮김, 2009)의 「초전법륜경」에 서술한 내용도『마하박가』의 첫 설법 내용과 다르지 않다. 「초전법륜경」에도 5비구를 대상으로 한 설법과정에서 중도와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할 뿐 별도의 선정수행을 말하는 내용도, 선정수행을 했다는 내용도 없다. 첫 설법을 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라고 말씀하면서 꼰단냐 존자는 안냐꼰단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서술했다.(‘안냐’라는 말이 초기불전에서 전문술어로 보이면 이것은 구경의 지혜를 뜻하며, 구경의 지혜란 아라한과를 뜻한다고 역자인 각묵 스님은 주를 달았다.)
나는 『마하박가』와 『상윳다니까야』의 「초전법륜경」 등의 경전에서 이렇게 표현한 내용에 근거를 두고 ‘완전하게 아는 것’이라고 한 표현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혹자는 “설법에 언급되는 중도를 설명할 때와 사성제를 설명할 때 ‘팔정도’를 설하고 있으며, 팔정도에는 정정正定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마하박가』와 『상윳다니까야』의 「초전법륜경」에서 팔정도를 언급할 때의 정정(바른 집중: 전재성 역)은 여덟 개 항목의 하나로 언급될 뿐 특별한 강조는 없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정이 사선팔정 등의 구차제정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각 니까야의 경에 따라 강조하는 선정수행 이야기는 부파교단에서 가르침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제자들에 의해 점차 추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기 아비달마 각주에서 선정의 내용을 구차제정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의 수행단계를 색계, 무색계와 연계하여 규정한 것으로 본다. 그 외에도 선정에 대한 언급 없이 깨달음을 얻는 내용을 말하는 초기경은 무수히 있다. 『상윳다니까야』 「전법륜품」에 있는 9개의 경 전체(「초전법륜경」, 「여래경」 등)가 다 선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성제를 설하는 ‘꼬띠가마품’에 있는 10개의 경 전체(「꼬띠가마경」1, 2에서부터 「정등각자경」, 「아라한경」, 「번뇌의 멸진경」 등)가 선정을 말하지 않으며, 알고 보는 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설하고 있다.
물론 5부 니까야에는 「삼매경」, 「사념처경」과 같이 선정을 강조하거나, 삼매를 통한 깨달음을 말하는 경도 많이 있다. 이런 경들에는 꼰단냐가 초전법륜에서 얻은 깨달음이 아라한과가 아닌 수다원과였으며, 나중에야 선정수행을 통해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밖에 니까야의 여러 경에서 사선팔정, 구차제정을 단계를 통해 사쌍팔배의 수행경지에 대해 말하며,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경도 있다. 나는 이러한 경들은 부파불교의 윤색이라고 하는 학설을 따른다.
4아함과 5부 니까야에 수록된 2,000개가 넘는 여러 경들은 보시와 계戒에 대한 가르침, 지혜와 자비, 인욕 등에 대한 가르침들로 가득 차있다. 나는 아함과 니까야의 가르침을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나의 불교관(이해와 실천)의 튼튼한 기반이 되고 있으며, 불교를 현대적 가르침으로 전개함에 있어서도 모든 영감의 중심이 되고 있다.
대승경전인 『화엄경』에도 선정바라밀을 말하는 장면에서 무수한 삼매를 말한다.(십행품, 십지품 등) 하지만 그 삼매들은 지혜와 자비가 잘 실현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으며, 사선팔정 등의 선정삼매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 혜능 스님이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정定과 혜慧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도 『유마경』과 『화엄경』에서 말한 삼매와 그 맥을 같이한다. 혜능 스님은 정定은 혜慧가 발현된 마음의 상태이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5. 깨달음은 단일, 고정, 완성태가 아님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님 그 분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깨달음이란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도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그 표현이 계속 달라지고, 내용도 덧붙여지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참 뜻을 구현한다는 취지로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별로 다양하게 편찬된 대승경전(반야, 화엄, 정토, 법화, 열반, 해심밀경 등)의 내용, 주요 개념과 용어, 강조 방향은 각각 변화되어 표현됐다.
선불교에서도 역대조사의 가르침은 시대별로, 가풍별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확연무성廓然無聖,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에서부터, 즉심즉불卽心卽佛, 무위진인無位眞人, 삼현삼요三玄三要, 조동오위曹洞五位, 화두참구話頭參究 등 중국적 표현과 사유방법으로 끊임없이 진화한 것이다. 즉 깨달음은 단일한 것도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니며, 완성된 것이 아닌 것이다.(여기서의 완성태가 아니라는 것은 표현하는 언어와 형식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는 뜻임)
깨달음은 스케일, 부피와 무게, 깊이, 색깔과 디자인 면에서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고, 멋있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이다. 그 이유는 시대와 중생계와 자연계가 점점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가르침의 폭과 내용 또한 덧붙여지고 다양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2,600년의 오랜 전통을 가진 세계적인 종교인 불교가 그 가르침이 진화하고 있다거나, 깨달음이 단일, 고정, 완성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표현이다. 그만큼 여타의 유수한 세계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의 철학분야에서는 ‘실재는 과정이다’라는 말을 하는 학자(화이트헤드)도 있고, 그에 영향을 받아 ‘과정신학’이라는 20세기의 새로운 신학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가 경험의 과정 속에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 진리’라고 하면서 진리를 이해의 운동으로 이야기하는 학자(가다머)도 있다. 또 신플라톤파, 신칸트파, 네오마르크시즘 등의 학파가 있듯이, 사상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고전적 가르침을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고도 거룩한 가르침으로 받드는 불교인들도 그 가르침을 시대적 삶 속에 펼치는 과정에서 많은 응용을 해왔다. 그 결과로 초기경전도 진화했고, 아비달마도 진화했다.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자체적으로 계속 진화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불교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포장을 달리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원형질을 이루는 유전자는 무상, 무아, 연기緣起, 공空, 자비라는 점이며, 부처님과 가르침(法)과 승단이라는 삼보를 존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가 진화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을 충실히 재현하여 따른다면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자비를 펼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분들은 불교 가르침의 원형을 수호하고 재현하는 소중한 분들이며, 훌륭한 분들로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이런 분들이 초기경전을 번역하고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과거 인도의 수행법을 재현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근거 없는 공허한 주장과 행위들이 난무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가르침의 원형을 보존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진화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래서 불교의 진화는 초기불교 시대에만 머물지 않고 늘 시대의 변천과 함께 중생들의 삶과 함께 계속하면서 그 성과를 집적해 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인도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 그리고 중국의 많은 불교학파, 선불교 등의 가르침도 이젠 잘 수호하면서 연구해야 하는 과거불교의 고전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초기불교든, 아비달마든, 대승불교든, 선불교든 그 어느 하나를 중시하여 가르침을 잘 수호하고 연구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이러한 과거의 모든 진화적 성취를 바탕으로 지금 시대의 불교를 개척하는 진화적 노력을 하기로 방향을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중 가장 어렵지만 중요하고, 그리고 시급히 필요한 것은 이 시대의 언어와 내용을 담아낸 이 시대의 불교를 만들어가는 진화적 노력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불교는 어떻게 진화되어야 할까? 이 시대에 필요한 불교를 만들어 가기 위한 목적을 세운 현대의 불교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진화를 위해서는 우선 불교의 유전자를 제대로,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설법(강의)과 질의응답, 경전들과 선어록읽기, 불교를 풍부하게 해 줄 다양한 분야의 학습과 독서, 대화와 토론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 초기 수행자들이 설법과 토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던 수행 전통, 그리고 사띠(기억과 성찰)수행과, 초기간화선 시대의 수행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대적 삶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계사와 문명의 흐름도 읽어내야 하고, 특히 한반도와 동북아의 근현대 역사와 과제를 알아야 하며, 한국사회와 국민들의 아픔과 행복의 문제를 불교도(대승보살)들의 구체적 현실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일이 무척 많을 것이다.
인터넷과 이동 중에도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경전과 어록 등의 내용들과 불교공부와 응용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찾고 열람하는 데 유용하다. 오늘날에는 니까야는 물론이고, 대승경전, 선어록 등의 내용을 관련 책을 소지하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활용할 수 있다. 지난 발제문에서 나는 ‘사띠’의 본래 의미가 “기록문화가 없던 시대에 부처님의 설법내용을 잘 기억하여 성찰하는 것.”이라 했다. 중국의 조사선 시대부터 시작된 간화선의 유래도 책자를 소지하기 힘든 시절에 “조사스님의 이야기를 기억하여 성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터넷 등 스마트폰의 검색기능도 이동이 많은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기억을 도와주고, 각종 자료를 곧바로 찾아 열람할 수 있게 해주는, 사띠 기능(검색하고 사유하는)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검색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6. 대승불교와 조계선풍의 현대적 계승과 발현

불교정신을 현대사회에 훌륭하게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에서부터 지난 2,600년 간에 형성된 불교 가르침을 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 그중 가장 유용한 가르침은 대승불교와 조계선풍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기불교를 대승적으로 진화시킨 것이 대승불교라 본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승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아함과 니까야 등 초기불교와 아비달마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대승불교 중에서는 반야부 경전(『금강경』, 『소품반야경』, 『대품반야경』, 『유마경』)과 『화엄경』이 특히 현대사회와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승계하되,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용어와 이론으로 변화시켰다. 예컨대 『반야심경』과 『금강경』에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및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을 거론하지만, 반야지에 입각하여 새롭게 해석했다. 우리가 조석으로 염송하는 내용들이다. 특히 반야부 경전과 『화엄경』에서 설하는 6바라밀, 10바라밀 등 보살행에 관한 가르침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 현대사회의 불교실천론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라고 생각한다.
대승불교의 자비는 사회와 역사 속에 실현해가는 윤리의 영역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자비는 바로 ‘삶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출발점이자 목표이다. 조계선풍은 반야부 경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조계선풍을 계승한 조사스님들의 대화와 설법은 반야부 계통인 『유마경』의 각종 문답과 설법을 빼닮았다.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과 결합된 새로운 불교였다. 그런 만큼 선불교, 특히 조계선풍은 무적이었다. 조계선풍을 이어받은 오종가풍의 선불교는 20세기부터 많은 서구인들에게도 깊은 인상과 영향을 미쳤다. 오종가풍 때까지의 선불교는 선정수행을 중시하지 않았다. 조사들과의 설법과 문답과정에서 언하言下에 깨쳤다. 참으로 참신하고도 경제적인 수행법이다.
간결하면서도 직관적이며, 본질을 꿰뚫는 선禪적인 안목은 오늘날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화들을 단숨에 재정리하여 새롭게 통합시키는 안목을 낳는다. 이러한 조계선풍은 이제 산중의 선원 울타리와 일부 매니아들의 취향을 넘어서 현대사회의 문명적 흐름과 같이 해야 한다고 본다. 수년 전부터 나는 ‘자비의 날개를 단 선禪’을 펼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의 자비란 ‘사회’요 ‘역사’요, ‘우리의 삶의 현장’이다.
혜능 스님 또한 『육조단경』에서 “불법이란 세간에 있는 것이며, 세간을 떠나서 불법을 찾는 것은 토끼의 뿔을 찾는 격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조계선풍은 삶과 세상 속에서 가르침을 실현할 것을 말하면서 초기불교와 대승의 뜻을 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선불교가 좋아하는 대혜 스님 또한 ‘일상 삶 속에서의 불법실현’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반야지혜에 입각한 대승보살의 10바라밀행은 2,000년 전부터 천명되었지만, 아직 경전 페이지 속에 갇혀 있다. 중생의 삶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안목과 자비희사의 정신으로 펼치는 각종 바라밀행은 사회현장과 역사 속에서는 아직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 조계종단이 자랑하는 조계선풍 역시 아직까지는 수좌스님들의 전유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한 사회주의자(나카에 초민)가 청일전쟁 직후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닫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유민권은 확실히 진부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실행된 적이 없다.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상은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칸트의 윤리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융합하여 현대사회가 지향할 윤리적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일본의 사상가(가라타니 고진)도 1990년대에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는 진부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당초 소련에서는 공산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에 마르크스주의자도 없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칸트의 윤리학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사상이며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다.”, “틀림없이 그것들은 진부하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것은 아직 새롭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2,600년 간의 모든 불교를 선禪의 정신으로 회통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중생계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조계선풍도 진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것은 아직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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