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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난주(兰州) 병령사(炳靈寺) 석굴

기암괴석 절벽에 새겨 넣은 신심, 부처님으로 나투다

▲ 병령사 석굴은 실크로드의 길목이라는 지리적 요건이 옛사람들의 신심과 만나 조성된 장엄한 불국토다. 사진은 높이 27m의 병령사 석굴 대불.

천수(天水) 맥적산(麥積山) 석굴에서 2시간여를 달리자 도로 주변으로 민둥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곳곳에 계단식 논이 조성돼 있긴 하지만 헐벗은 풍경을 감추기엔 역부족이다.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갓길에서 도색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도 눈에 띄는데 보는 사람이 아찔해질 정도다. 황무지와도 같은 대지에 주입되고 있는 생명들을 보며 본격적인 실크로드 순례가 시작됐음을 느낀다. 이제부터는 비옥한 토지와 울창한 숲의 풍요로움 대신 누런 모래, 따가운 햇살, 잡히지 않는 지평선만이 순례단의 길벗이 되어줄 것이다.

감숙성 영정현 인근에 위치
183개 석굴에 800여개 불상
171굴 대불은 높이만 27m

실크로드 주요 통로로 번영
서진 시대에 불교 부흥하며
3세기말 개착된 것으로 추정

맥적산 석굴을 출발하고 5시간30분이 지나 난주(兰州)에 도착했다. 난주는 원래 서역 강족(羌族)의 땅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 진나라에 편입됐다. 한나라의 통치를 받던 기원전 1세기부터 천산북로(天山北路)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로 자리매김했다. 황금도시라고도 불렸던 난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이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옥문관(玉門關)까지 확장될 정도였다. 이후 북위, 수나라, 당나라, 티베트족, 송나라, 금나라, 송나라, 몽골족, 청나라 등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부침을 겪었다. 순례단은 황하(黃河)가 관통하고 있는 난주 도심을 통과해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병령사 석굴에 가기 위해선 1시간여 동안 보트를 타야 한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선착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목적지인 병령사(炳靈寺) 석굴에 가기 위해서는 보트를 이용해야 한다. 선착장 너머로 민둥산에 에워싸인 황하가 느릿느릿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달리 이곳 황하는 푸르스름한 빛깔인데, 가이드에 따르면 아직 황토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둥산의 빛바랜 기암괴석과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땅, 청록색 거대한 물줄기가 만나는 풍경은 꽤나 기묘했다. 조그마한 보트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1시간을 달리는 동안에도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느낌은 계속됐다. 이렇게 황량한 곳에 도대체 왜, 그리고 과연 어떻게 석굴을 만들었을까.

병령사 석굴은 황하 상류의 감숙성 영정현(永靖縣)에서 서북으로 40km 떨어져 있다. 영정현은 서쪽으로는 하서주랑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장안으로 통하고 있어 실크로드의 길목이었다. 이와 같은 교통 요지였기에 실크로드의 장도에 오른 상인과 승려들은 반드시 이곳을 통과했다. 실제 서진은 412년 영정현 인근의 임하(臨夏)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다. 서진의 통치자들은 모두 불법을 숭상했는데 특히 걸복국인(乞伏國仁)은 동진의 명승 성견(聖堅)을 초청에 역경에 종사토록 하는 등 역경사업을 부흥시켰다. 한때 역경에 종사했던 승려만도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399년 장안에서 출발한 법현(法顯) 스님 역시 3개월을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일대의 지리적 요건과 불교 흥성 역사를 헤아려 보면 석굴 조성에 과거 사람들의 발원이 숨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 도착한 수많은 상인과 스님들이 앞으로의 여정에 부처님 가피가 내려지길 기원하며 하나하나 석굴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개착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다만 제169굴 제6감 동쪽 윗부분에 ‘建弘元年(건홍원년, 420년)’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것, 400년에 서진에 머물렀던 법현 스님의 발원명(發願銘)이 벽화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반 무렵부터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병령사 석굴을 둘러싸고 있는 소적석산 계곡.

오랜 시간이 흘러 병령사 석굴이 세상이 알려지게 된 건 1951년 일이다. 그 후 전문적인 조사가 진행되고 도록이 발간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병령사 석굴이 위치한 소적석산(小積石山)의 지질구조는 미세한 사암으로 돼 있어 석굴 개착은 용이하지만 풍화에 약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1961년 유가협(劉家峽)댐 건설로 배수지가 형성되면서 습기에 노출된 상태다. 일부 유적은 배수지 건설로 인해 밀려온 토사에 매몰되기까지 했다.

▲ 매표소 앞에서 바라본 기암괴석의 절경.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보트가 병령사 석굴 매표소 앞 선착장에 멈춰 선다. 초록빛 융단과도 같았던 황하는 어느새 혼탁한 황토물이 돼 있었다. 보트에서 내려 바라본 기암괴석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뾰족한 봉우리들이 견고한 성채인 듯 대지를 짓누르며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 있다. 다시 살펴보면 황하의 물줄기가 수직으로 솟구쳐 오른 것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을 순례단 스님들과 함께 마음에 담은 뒤 가로수 덮인 길을 걸어 병령사 석굴로 향한다. 햇살은 뜨겁지만 건조한 기후 탓에 바람이 선선하다. 덕분에 옷에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던 땀이 식으면서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 불감 안에 모셔진 부처님. 칠이 벗겨지거나 바래진 가운데서도 옥색 도료만은 그대로 남아있다.

계곡에 만들어진 좁은 길을 15분 정도 걷자 암벽에 새겨진 불감(佛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는 총 183개 석굴에 694개의 석조상과 82개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다. 불감마다 다채로운 형태의 불보살상들이 있는데, 특히 지금까지도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 옥색 도료가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칠이 벗겨지거나 바래진 불감에서 특히 옥색은 조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크고 작은 불감과 불보살상들이 장엄하고 있는 길 끝에서 병령사 석굴을 대표하는 171굴 대불과 만난다. 27m 높이의 대불은 731년 개착을 시작해 803년 완공했다. 상반신은 천연 돌기둥을 사용했으며 하반신은 진흙으로 만들었다. 원래 대불을 보호하는 7층 누각이 있었으나 청나라 말기에 화재로 전소돼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 위를 올려다보니 멀찌감치 봤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옥빛 불감과 불보살상, 그리고 기암괴석을 뚫고 나투신 대불의 군집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방금 찍은 사진을 카메라 액정으로 들여다보니 실제보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마치 꿈결 속을 헤매는 듯 정신이 몽롱해진다. 옛사람들의 갸륵한 신심과 압도적인 대자연, 그리고 지고지순한 진리가 눈앞에서 가물거리더니 아득하게 사라져간다. 떠나는 저것들을 움켜쥘 순 없을까. 뒤돌면 놓쳐버리게 될 풍경들이 못내 아쉬워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례단 스님들과 예불을 올리며 다시 부처님을 올려다보았다. 부처님은 보는 각도에 따라 준엄한 표정으로 굽어보시거나 인자한 웃음을 짓고 계셨다. 미혹한 중생을 꾸짖는 듯하다가도 이내 따뜻하게 품어주시려는 것 같다. 흐리멍덩했던 의식이 선명해진다. 무엇을 움켜쥐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한순간의 욕망에 들끓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부처님을 찬탄한다.

예불을 마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병령사 석굴의 백미라는 169굴은 개방하지 않아 친견하지 못했다. 169굴을 보기 위해서는 대불 왼편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높이만도 60m에 이른다. 저곳에 오르면 높이 15m, 깊이 8.56m 자연동굴 내부의 30여 불상과 협시상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법현 스님의 발원명도 169굴에서 발견됐다. 169굴은 172굴로 연결되는데 서진시대부터 북주, 북위, 명나라에 걸쳐 조성되고 확장됐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밑에서도 석굴을 조성한 이들의 신심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되는 절벽에 매달린 채 꿈틀거리는 신심을 드러내고자 땀을 흘렸던 사람들. 실크로드에서 꽃핀 불법의 찬란한 흔적들은, 결국 이름 없는 이들이 일궈낸 결실이었다. 저곳에서 암벽을 칼로 자르고 정으로 쪼았던 사람들이야말로 실크로드의 숨은 주인공이었음이 틀림없다.

▲ 16굴의 열반상. 6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

보트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 마지막으로 16굴에서 열반상을 만났다. 길이 8.64m로 그리 크진 않지만 6세기 초반에 조성된 열반상은 매우 드물기에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죽음 앞에서도 표정이 그러할 수 있다면 삶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순례단 지도법사 혜총 스님이 모든 중생의 해탈을 기원하며 16굴 바깥에 설치된 종을 친다. 청명한 종소리가 계곡을 지나 세상으로 번져나간다. 혜총 스님의 기도에 동참하며 다시 한 번 손을 모은다. 아득한 거리감에서 비롯된 욕망으로 헤매었던 조금 전 순간들을 곱씹으며 부처님께 기도를 올린다. 과거 실크로드의 기나긴 여정에 오르려 했던 이들도 바로 이 자리에서 그렇게 기원했을 것이다.

김규보 기자 

[1318호 / 2015년 1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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