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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혜근(慧勤)-상

기자명 성재헌

유교세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고려 말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희생자는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였다. 사대(事大)와 자주(自主), 보수와 혁신, 유교와 불교 등 갖가지 이념이 충돌하며 국운이 흥망의 기로에 섰던 공민왕 시절, 그는 스승 지공(指空)과 함께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존경받으며 온 백성에게 사랑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비운의 삶을 마감한 공민왕과 함께 그 역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배경엔 신진 유교세력의 모함과 결탁이 있었다.

생불로 추앙받던 지공
나옹을 법제자로 지목
불교 지도자로 급부상
유교세력 견제 시작돼

1328년(고려 충숙왕15), 인도 마가다국 왕자 출신으로 날란다에서 수학한 지공이 고려를 방문하자 고려의 백성들은 그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맞이했다. 지공화상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예배하고, 연복정(延福亭)에서 보살계를 설한 후 원나라 연경으로 돌아갔다. 이때 나옹은 여덟 살 어린나이였다. 나옹이 지공으로부터 받은 보살계첩이 금강산 유점사에 소장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나옹과 지공의 인연은 이 시절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나옹은 영덕에서 성장했다. 평생지기로 지낸 성리학의 태두 이색(李穡)과 교우를 맺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20살 때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한 그는 출가를 단행한다. 눈물로 만류하는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나옹은 땅에 지팡이를 거꾸로 꽂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지팡이가 살아나면 제가 살아있고, 죽으면 제가 죽은 줄로 아십시오.”

그의 의지는 단호했다. 상주 묘적암(妙寂庵)에서 요연(了然)에게 출가한 나옹은 명산대찰을 두루 참방하다가 1344년 회암사(檜巖寺)에 머문다. 회암사는 지공화상이 지목한 삼산양수(三山兩水)의 길지였다. 이곳에서 좌선에 매진한 나옹은 4년 만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다. 도를 깨친 나옹은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받기 위해 지공화상을 찾아 연경(燕京)으로 향한다.

1348년 11월, 고려를 출발한 나옹은 이듬해 3월13일 연경 법원사(法源寺)에 도착했다. 나옹은 지공의 인가를 받고 2년여 동안 스승 곁에 머물렀다. 그 후 스승 곁을 떠나 3년 동안 강남을 떠돌았다. 평산 처림(平山 處林)을 비롯한 임제종의 고승들 역시 그를 인가하고 벗으로 대했다. 나옹은 1353년 3월에 다시 법원사로 돌아왔다. 나옹이 무학(無學)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건 이 무렵이었다. 이후 나옹은 원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2년여 머물다가 지공과 하직하고 1358년 3월23일 고려로 귀국했다.

귀국 후 나옹은 그를 음해하는 세력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다. 평양과 동해 등지를 떠돌다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고, 용문산·원적산 ·금강산·묘향산 등 변방을 떠돌며 법을 설해야만 했다. 이 시절 늘 그와 함께 했던 이는 무학대사였다.

그렇게 특별히 주목받지 못하던 그의 위상은 한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부상한다. 1367년 보암장로(寶菴長老)가 지공화상의 유훈을 받들어 가사 한 벌과 친히 쓴 글 한 장을 들고 중국에서 고려로 찾아온 것이다. 고려에서 생불로 추앙받던 지공화상이 나옹을 법제자로 지목한 것은 괄목할만한 일이었다. 나옹은 곧 회암사 주지가 됐다. 그리고 1370년 1월 지공의 유골이 고려에 도착했다. 공민왕이 직접 왕륜사(王輪寺)로 찾아가 유골을 궁궐로 봉안하는 등 지공에 대한 추모열기는 대단했다. 나옹은 지공의 추모불사를 주관했고, 이를 계기로 고려불교계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나옹은 가지산문의 백운 경한(白雲景閑)과 천태종의 신조(神照), 화엄종의 천희(千熙)와 함께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여 불교계의 질적 쇄신을 주도했다. 그리고 1371년 8월26일, 왕사로 책봉되어 송광사 주지가 된다. 당시 송광사는 선종 제일 사찰이었다. 하지만 나옹의 뜻은 회암사에 있었다. 회암사를 고려의 날란다로 만들라는 스승 지공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지공과 나옹의 뜻에 동참하는 발길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나옹의 꿈은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는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신진 유교세력에게 나옹은 큰 위협이었다. 그들의 눈엔 쓰러져가던 고려의 구세력이 나옹을 중심으로 다시 집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18호 / 2015년 1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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