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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총림 방장 지선 스님

“대신심으로 사회아픔 치유할 때 불자의 삶 완성”

 
오늘날 종교는 이익집단이 되고 거대한 조직이 되었습니다. 종교와 종교집단이 현재 잘못 가는 세상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충효, 인문학, 전인적인 관계가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했어도, 아무리 보살행의 원력이 지극하고 대단해도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란 힘든 상황이 됐습니다. 깨달았다, 청정하게 살았다, 거룩하게 일생을 수행자답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현실에서 증언해 내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논리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이나 수행자들의 말씀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세대는 종교가 필요 없는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종교에서 말하는 절박함이나 지극함을 간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법석을 통해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야망 무상함 깨닫고
절박함 있어야 수행도 가능

마음공부로 일체유심조 알고
무한 긍정으로 새롭게 거듭나

심신 출중한 시민불자로서
더불어 사는 삶 고민하길

도를 깨닫는다, 성불한다는 것도 굉장히 절박해야 합니다. 호랑이에게 쫓기듯, 밤에 가위눌린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쓰듯, 죽느냐 사느냐 판가름의 절박함이 있어야 수행도 열심히 되는 겁니다. 그런 절박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봐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려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얘기해서 증언을 해야 할까요? 이럴 때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 깊고 넓음은 바로 이런 것이다”하고 봉사로서 증언해 보여야 합니다. 특히 불자들이 남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갈애, 갈등이라는 삶의 치열한 현실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란 어렵습니다.

수행자들은 감정이입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감정은 업(業)에서 일어납니다. 업은 과거에 짓고 익혀 온 습성입니다. 말려도 눌러도 막아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오랜 과거부터 익히고 익혀 왔던 나쁜 악습이 불쑥불쑥 튀어 나옵니다. 수행을 웬만큼 해도 누르기가 어렵습니다. 감정에서 튀어 나오는 갈애를 해소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과거의 인식, 개념, 습관을 직시해서 이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결국 집착에서 옵니다. 무상한 것들에 대한 집착, 깊지 못하고 크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허무맹랑한 것들에 대한 집착, 영원한 것인줄 착각하는 물질과 야망은 모두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은 스스로도 잘 압니다. 하지만 누르지 못합니다. 수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문명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성인의 가르침대로 살면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성인들의 가르침과는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성인의 가르침입니까? 지금까지 얘기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가 곧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출가자의 삼대 원칙도 무상, 무아, 무소유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법칙들이 온몸으로 체화되었을 때 갈등을 벗어나 중생을 제도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에서는 스님뿐만 아니라 불자들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불안하고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불신, 불안, 부조리의 세상입니다. 요즘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에는 대부분 부정어가 붙었습니다. 부정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가 중요합니다. 불교는 안심법문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법문입니다. 달마대사의 안심법문은 많은 분들이 익히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해소해달라는 혜가 스님의 청에 달마 대사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고 혜가 스님이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하자 달마 대사는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라고 답을 합니다. 그것이 안심법문입니다. 안심을 다른 말로는 해탈, 열반입니다. 영원한 안심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탐진치 삼독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무소유 사상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공부해서 바르게 알고 실행해야 합니다.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서 어영부영 살다보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대로 불교공부를 해서 어떤 사람이 어떤 막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는 이론이 너무 많다 보니까 생각도 너무 많습니다. 궁리가 많다 보니 선(禪)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생각을 다하고 다해서 생각이 사라진 자리를 선방에서는 신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세계는 욕망이 가득한 탐진치 삼독이 만든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무상합니다. 모든 진리는 현실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실에서 모든 진리가 나왔지만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준 종교가 불교입니다. 깨달음은 비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현실을 본래의 세상으로 돌려놓게 됩니다. 그래서 사부대중 모두 마음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실력이 되고 힘이 되어서 현실의 모든 모순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겉으로는 좋은 옷, 명품 가방을 들고 자신을 과시하지만 속으로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자, 권력자들조차 발을 뻗고 잘 수 없다고 합니다. 있는 사람은 있어서 불안하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불안합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지키기가 어렵고, 그것이 없는 사람은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불자들은 평소 공덕을 쌓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좋은 일, 착한 일 많이 해서 복을 지었다고 합시다. 농부가 농사를 지어 가을에 수확해서 먹고 다시 씨를 뿌려서 또 농사를 짓는 것처럼 복을 지어서 인생을 누리고 사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것도 좋지만 불교는 거기에서 업그레이드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만들어지는 허망한 육체 안의 마음, 하루에도 5만번, 10만번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마음입니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잡생각들입니다. 근본은 따로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는 근본, 온갖 생각을 일으키는, 무상하고 무아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마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본래면목이요, 생명의 근원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생사도 없습니다. 그 자리는 어떤 것도 막을 수도 죽일 수도 없앨 수도 없습니다. 공덕과 복덕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 크고 넓고 기쁜 우주와 같은 근원자리를 아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영원히 공덕 짓고 복덕을 누리고 살아도 윤회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신심으로 그것을 하면 됩니다.

‘화엄경’에서도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해서 믿음을 최우선으로 삼고,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도 대신심(大信心)이라고 해서 믿음을 먼저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시신앙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어릴 때 모친께서는 부엌을 깨끗이 청소하고 난 뒤 물을 한 그릇 떠 놓고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런 신앙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신앙을 하다가도 선지식을 만나서 불교의 법, 사성제, 12연기, 팔정도를 배워 확실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2단계입니다. 3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계에서는 중생들이 무상, 무아, 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길라잡이가 되셔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무속신앙에 치우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결코 비난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마구니들도 있습니다. 공부만 많이 했지 욕망을 끊지 못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마십시오. 불자라면 삼 단계 정도는 실행해야 됩니다. 마음공부를 더 많이 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향상일로(向上一路)라 하였습니다. 무한히 부정하고 무한히 긍정하면서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지금은 세상이 종교를 걱정합니다. 종교가 이익집단을 형성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신도님들은 종종 점(占) 잘 보는 곳을 찾아가서 사주 관상을 봅니다. 물론 사주, 관상은 동양의 사상서인 주역에 나오기 때문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 가지 상이 다 좋아도 마음 하나 잘못 쓰면 안 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생로병사를 뛰어넘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도들이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훌륭하다고 표현하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신뢰도 받아야 하지만 쓴소리도 많이 듣고 성장해야 합니다. 양변을 다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런 불자정치인도 많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사실상 타종교는 시작부터 현실참여로 시작합니다. 지역의 시의원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도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 불교도는 교세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는 타종교에게 밀린 형국입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오히려 불교의 명상, 힐링이 유행입니다. 신학대학 다니고 철학공부한다는 서양 지식인의 상당수는 이제 불교에 관심을 갖습니다.

앞으로 우리 불자들이 민주사회의 일등시민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 참 좋더라. 보니까 불자더라”라고 회자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모범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성숙된 시민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에서 출중하고 공덕과 복덕을 짓는 신심에도 출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불교도가 세상과 더불어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승속이 합일되고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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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1월5일 부산 기장군청 대강당에서 개최된 ‘선지식 초청 대법회’에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이 설한 법문입니다.

지선 스님은
스님은 1961년 16세에 석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67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하고, 1972년 서옹 스님으로부터 ‘학봉’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법제자가 됐다. 제주 관음사와 전남 백양사 주지, 종회의원 등을 역임한 스님은 2004년 4월부터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소임을 맡아 제방 수좌들을 지도했다. 2013년 고불총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318호 / 2015년 1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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