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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혜근(慧勤-하

기자명 성재헌

나옹이 다시 회암사(檜巖寺)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불교에 대한 민중들의 신망(信望)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개경과 회암사를 오가는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공양물이 전국에서 바큇살처럼 쏟아졌다. 고려 왕조와 함께 불교를 처단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진 유교세력에게 이는 위협거리였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공민왕이 있었다. 공민왕은 나옹과 함께 고려의 부흥과 불교의 부흥을 꿈꾸면서 계획을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랬던 공민왕이 죽자 유교세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민왕 죽자 유교세력 반격
회암사 불사를 빌미로 탄핵
귀향길 병얻어 신륵사 도착
제자들과의 법거량 후 열반

1376년(우왕 2) 4월15일, 오랜 기간 공들였던 회암사 공사가 마무리 되고 드디어 낙성식이 열렸다. 그리고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간(司諫)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회암사는 서울과 너무 가까워 사부대중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 나옹이 백성들의 생업에 폐해를 끼친다.”

신진 유교세력은 어처구니없는 죄목을 붙여 나옹을 탄핵하였고, 실권이 없던 유약한 임금 우왕은 신하들의 뜻에 굴복하였다. 곧바로 나옹에게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가마를 타고 산문을 나섰던 나옹은 남쪽 연못가에 이르러 갑자기 가마를 세웠다.

“절로 돌아가자.”

회암사로 돌아간 나옹은 다비할 시체를 옮기던 작은 열반문으로 다시 나왔다. 대중은 앞날을 직감하고 목 놓아 울었다. 나옹은 돌아보며 대중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부디 힘쓰고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5월2일, 행렬이 한강에 도착하자 나옹이 호송관 탁첨(卓詹)에게 부탁하였다.

“내 병세가 더 심해지는군요. 배를 타고 가고 싶소.”

나옹은 문도 1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랐다. 그리고 7일 만에 여흥에 이르렀다. 나옹은 다시 호송관 탁첨에게 부탁하였다.

“병세가 너무 위독해 이곳을 지날 수 없소. 이 사정을 나라에 알려주시오.”

탁첨이 보고하는 동안 나옹은 신륵사(神勒寺)에 머물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여흥수 황희직(黃希直)과 도안감무 윤인수(尹仁守)가 다시 출발을 재촉하였다. 시자를 통해 소식을 들은 나옹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이제 아주 가련다.”

나옹의 뜻을 확인한 제자들이 스승 앞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리고 선사(禪師)의 제자들답게 법거량으로 이별의 예의를 다하였다. 문답을 마치자 나옹이 말하였다.

“노승이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완수하리라.”

1376년 5월15일 해가 한발이나 오른 오전에 열반하셨으니 나이는 56세였다. 그의 비명은 당대 유학의 태두였던 동향의 벗 이색(李穡)이 지었다. 불교와 유교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둘은 평생의 지기였다. 나옹이 가고 20년 후, 조선을 건국한 세력에게 불교에 협력한 사상적 불순분자로 내몰린 이색은 변방을 떠돌다가 여흥에서 그 역시 삶을 마감하였다.

나옹의 죽음은 의문투성이다. 중창불사를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분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 한 달 만에 죽었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아직은 젊다고 할 56세 때 갑자기 그런 병이 찾아왔다는 것도 믿기 힘들다. 이런 의심에 힘을 보태는 사료가 실록에 있다.

1494년(성종 25), 신미대사의 제자 학조(學祖)가 왕족과 사대부들의 신망을 얻어 불사를 크게 일으키자 송질이 이를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기강(紀綱)이 흐트러졌던 고려 말엽에도 오히려 나옹(懶翁)을 귀양 보냈다가 주륙(誅戮)하여 여러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던 바를 통쾌하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당당(堂堂)한 성조(聖朝)에서 한 사람의 요망한 중을 용서해 그로 하여금 성화(聖化)의 기강을 문란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권력의 향배에 따라 오락가락 기술되는 역사이니, 병사인지 주살인지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성리학 외에 어떤 사상도 용납하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들, 그들이 자행한 불교탄압의 신호탄이 나옹화상이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19호 / 2015년 1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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