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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24. 행복의 운명학(1)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11.24 14:20
  • 수정 2016.01.05 16:03
  • 댓글 0

앞 일 미리 걱정할 필요 없지만 현실도피는 더 어리석어

 
우리 모두는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희망하지만, 단지 형체가 없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합니다. 예컨대 신체의 건강을 개선하거나 사업에 활력을 주도록 노력하며 화평한 가정을 운영하거나 좋은 인적 관계를 세우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나서야 스스로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에 우리는 운명을 바꾸는 일에 손을 댈 수 있습니다. 운명이란 정말 바꿀 수가 있는 것일까요? 내 대답은 “그렇다. 할 수 있다.”입니다. 다만 운명을 바꾸기 전에 반드시 먼저 운명이 시작되는 곳을 이해해야 합니다.

운명에 미치는 영향은 나로부터 
모든 결과에는 원인 있는 법
좋은 인연 문 열어야 운명 장악
하지만 절대 맹신해선 안될 것

운명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우리가 일생 동안 경험하는 모든 고난과 부귀함은 모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운수[天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운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체가 움직이며 회전하는 규율을 말합니다. 광대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규칙을 가지고 변화하며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규칙의 움직임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대와 나, 다른 사람 그리고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가 우주 안에 존재하고 있는 물질인데, 이것들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대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생명은 이미 존재했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생명은 계속 존재할 것이며, 단지 끊임없이 껍질만을 갱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움직임 가운데에는 우리가 장악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데, 여기서 장악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하늘의 운수입니다.

나는 거리에서 한 장애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제작한 휠체어에 앉아 작은 장식품을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아주 정교하고 아주 예뻤습니다. 그는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 비해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화장실 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장식품을 만들어 돈을 벌어야만 하고 혹시 잘 팔리지 않으면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생활도 곤경에 빠질 것입니다. 언뜻 봐도 그의 일생은 참으로 고달파 보입니다. 저 사람은 왜 이런 장애를 가져 곤경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고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미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생(生)은 우리의 첫 번째 생이 아니라, 실제 우리는 많고 많은 전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전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에 살아왔던 이야기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생에 그대가 선생님일지라도 전세(前世)에는 장군이었을 수도 있고, 그 앞선 전세(前世)에는 수행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生)과 세(世)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어서 어떤 모양으로도 변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과거로부터 누적된 공로와 허물이 총결산되어 내려온 것이 운명입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인연의 업력(業力)을 통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런 여러 생과 세의 업력은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우리의 전생뿐만 아니라 부모와 선조들의 업력까지도 모두 더해져서 이생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전생에서부터 쌓아 온 삶의 업력은 우리를 따라 다니는 그림자와 같아서 벗어날 수가 없고,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운명은 보시·자비로부터 온다
우리는 누구나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탁월한 지혜를 갖고 있고, 감정적으로는 행복을 느끼며 한 가정을 이루고 가업을 일으켜서 대대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이를 ‘원만(圓滿)’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생(生)에서 부귀하고 행운이 깃든 사람은 본인의 공덕이 깊고 두터운 이유도 있겠지만, 선조들과 집안사람들이 전세에 많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생에서 순탄하게 복을 받고 여유로운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어떤 좋은 일을 했을까요? 아마도 부처님과 보살과 천신 그리고 진정한 수행자를 공양하고 또한 도움이 필요한 중생에게 자비로운 보시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불타가 말씀하시기를 이 세계의 공덕 가운데 ‘보시’의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보시는 ‘법보시’를 가리킵니다. 법보시는 스스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자비의 이념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법보시 얻은 공덕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이 큽니다. 이것은 ‘원인을 심으니 결과를 얻는다.’라는 간단한 이치입니다. 오늘 내가 선과 자비와 관심 그리고 사랑의 씨앗을 심었다면, 내일, 모레 그리고 어쩌면 내세에 우리의 후손들이 아름다운 선의 결과를 얻게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전세의 인(因. 원인)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고, 내세의 과(果. 결과)를 알고자 하면 금생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나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박애인지 알지 못해 오로지 나만 위하고 나만 도우며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는 내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의 아이들과 빈궁하고 지능이 약한 아이들까지 모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 사랑으로 품어주며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빈곤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되어 마음속에 자비와 박애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여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나는 내 자신만을 소중히 여겼는데 이는 내가 사람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해야 하고, 부모도 자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또 회사의 사장이 우리를 입게 하고 먹게 하는 부모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람 노릇이라는 것이 나를 겸허하고 낮추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부모와 스승을 비롯한 나를 아껴주는 모든 분들과 그 환경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인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인지, 그래서 더 나아가서 배우고 탐색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자비와 선을 이해하며 나의 생각과 행동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받들어 모시고 헌신으로 봉사한다.’라는 것은 부귀함을 얻는 가장 기본이 되는 방법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념에서 180도 돌아서서 사사로운 이익만을 취하려는 태도에서 용감하게 벗어나, 평소 만나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사랑해보십시오. 이와 함께 보시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즐기며 미래를 위해 상서롭고 행복하며 부귀한 좋은 인연의 문을 열어야 진정으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미혹되지 않아야 바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운명을 절대로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한 수행자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병이 있어서 매일 배가 편안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스님께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씀하시길, 제가 전생에 지나치게 은행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생에 나타나는 많은 현상들이 모두 전생의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지만 전생에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이생에서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번뇌와 고통의 원인을 모두 전생에 귀착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입니다. 실제로 아주 정확히 맞출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많은 번뇌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운명에 미혹되지 말아야 운명을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 매일 염불을 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들이 집에서 누워만 지내는 것을 보며 이웃들은 노인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당신 아들은 이제 말도 탈 수 없을 정도로 다쳐서 집안에 누워만 있는구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매일 염불을 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 일이 생기고 얼마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동네의 젊고 힘 있는 남자들은 모두 군대로 끌려갔지만 노인의 아들만은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 새옹의 아들이 말에서 떨어진 것은 오히려 복이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의 사건만을 보고 나쁜 일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늘리고 넓혀서 생각해본다면 좋은 일임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이해하고 나면 운명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찰은 단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감과 직관을 거쳐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평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마음의 눈’을 통해 운명을 관찰할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범위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전부 다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욕을 듣거나, 혹은 다치게 되는 원인은 아주 간단한 인과관계인데, 이것을 전생의 운명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 한 명이 운전을 하다가 실수로 길거리에서 애완견을 치어 죽게 했다며 물었습니다.

“상사님, 저는 어제 제가 치어죽인 강아지의 주인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이는 전생에 그 사람에게 빚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까?”

“전생은 무슨 전생! 네가 그 강아지를 죽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너를 때린 것이지! 그 사람이 네 뺨을 때린 것은 사랑하는 강아지를 치어 죽게 한 것에 대한 현세의 너의 과보다. 아무튼 그 삶이 네 목숨을 달라고 하지 ㅇ낳고, 그저 뺨 한 대만을 때리고 널 보내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 게냐!”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운명에 미혹되어 끌려 다녀서는 안 되고, 또한 인과응보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에 지혜와 이성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만약 쉽게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다시 눈을 감고 넓게 생각해보십시오.

절대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쓸데없이 걱정해서는 안 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일은 더더욱 곤란합니다.

진푸티상사 저서 ‘깨달은 눈으로 본 인생’에서 발췌 (번역:권중달)
제공:보리선수 약사선원 (1661-0803)


[1320호 / 2015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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