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의 깨달음에 지혜 영역은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11.26 12:53
  • 수정 2015.11.30 00:40
  • 댓글 1

육조사 현웅 스님, 현응 스님 주장 비판
“깨달음은 지혜·이해 영역” 주장은 잘못
지혜는 지식과 달리 영역 제한 두지 않아
교가 보여주는 마음 알려면 ‘지식’ 놔야

서울 성북동 육조사 선원장 현웅 스님이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보내왔다. 현웅 스님은 현응 스님이 “깨달음이 이해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관련해 “불교의 깨달음에 지혜 영역은 없다”며 “지식은 영역을 짓지만 지혜는 영역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현웅 스님은 1967년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용화사선원 등의 제방 선원을 거친 후 산중 토굴에서 6년 동안 정진했다. 1984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로부터 초청을 받은 스님은 유럽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2년 동안 한국 선을 전파했다. 1986년 북미로 건너간 스님은 시애틀에 돈오선원을, 버클리에 미국 버클리 육조사를 창건해 후학을 지도했다. 2005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육조사를 세워 간화선을 지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묻지 않는 질문(민족사)’ 등이 있다. 편집자

현웅 스님의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반론’ 전문
-지식은 놓고 마음을 만나야 밝아져!

▲ 육조사 선원장 현웅 스님
교학을 먼저 익힌 이들은 그 익힌 것을 놔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 교학이 불교이고 마음이라고 애지중지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도 마음은 있다. 다만 마음이 붙들린 것 때문에 가려져 있다. 부처의 말이 교학이지만 미혹 속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 교학은 미혹이 덮고 있는 교학이 된다.

어록에 있는 말 또한 다르지 않다. 선(禪)은 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아는 것이 선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미 스스로 있는 성품을 믿고 드는 공부가 선(禪)의 시작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성품을 보고난 뒤 이 깨닫는 공부인 선에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권한다. 아는 것을 놔야 스스로 있는 성품인 자성을 보기 때문이다. 이 자성이 세존이 말하는 중도이고 불심이며 곧 선심(禪心)이다.

이 선심은 교학에 붙어 있는 지식을 놔야 그 뜻을 얻어 세존이 말하는 교학이 다시 살아난다. 이 선심은 선과 교에 치우쳐 있는 마음이 아니다. 중도는 선을 내세워 지키고 교를 따로 두어 지키는 것이 없다. 다만 중도를 설하신 세존은 경계를 만나 묻는 자가 오면 인연을 따라 말로 나온다. 그것이 교이다.

묻는 자가 없어 경계가 없으면 선을 지키는 것도 없고 교학을 내놓을 것도 없다. 어떤 지키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불심 속에 있는 중도는 그 성질이 닦을 것이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중도에 붙어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닦아야할 선이 있고 알아들어야 할 교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이나 교는 경계 속에 있는 자에 속하는 것이다. 선정을 닦지 않고 중도를 안다는 것은 지혜와 지식이 뒤바뀌어져 있는 데서 나온 말이다. 교학은 믿음의 방향을 얻는데 필요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엔 달이 없다. 손가락을 보고 놔야 달이 있는 곳으로 눈이 간다.

마땅히 교학에 붙어 있는 지식을 놔야한다. 놔야 교가 보여주고 있는 마음이 있는 곳을 알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알면 비로소 일고 꺼지는 마음을 봐 놓는다. 이 놔두는 곳에 고요함이 있고 지혜가 있다. 옛 사람들이 사교입선을 권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황벽은 불법은 배우지 말라”하고 서산(西山)은 “마음을 모르고 공부하려 들면 하려는 그 마음이 이미 공부를 그르친다”라고.

지식 속에서는 번뇌라는 이름은 알지만 번뇌의 실체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지혜는 번뇌를 보아 놓고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선정이라는 호수에 들어간다. 현응 스님은 말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 “깨달음은 지혜와 이해의 영역이며, 선정수행을 통해 이루는 몸과 마음의 높은 경지를 뜻함이 아니다.”
종단 교육수장 자리에 있는 스님의 주장이다.

그러나 불교의 깨달음에 지혜의 영역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세존은 일체지가 여래지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치 거울이 사물을 만나 비춰주는 것과 같다. 사물이 오면 그 사물에 제한을 두지 않고 비추어준다. 지혜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영역이 없는 것이다. 영역이 없는 깨달음을 ‘금강경’은 정한 법이 없다고 보이고 있다. 사람이 영역을 짓는다. 영역에 있는 사람이 영역이 없는 세계로 내가 들어가 변해져 나온 것이 깨달음이다. 미리 알고 드는 곳엔 짓는 것은 있고 깨달음은 없다. 지식은 영역을 짓지만 지혜는 영역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느 때 세존은 “옳은 사문을 묻는 이에게 중도가 있는 곳은 8정도가 나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견해에 8정도가 없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해로 된 연기법에 마음이 들떠있는 것을 보인다.

“부처님은 성도 이전에 고행과 선정수행 모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떠났으며, 마침내 연기(緣起)를 살피고 통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현응 스님의 말이다.

여기에서 세존이 고행과 선정에서 떠난 것은 중도가 없는 고행과 선정이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세존이 연기법을 살피는 것은 먼저 익힌 고행과 선정에 중도가 없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이미 그의 안에 중도가 와 있었던 것이다. 이 중도가 있는 곳에서 연기법도 바로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무에 달린 푸른 잎과 가지를 본 사람이면 그 나무 끌텅이 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을 모를 사람이 있겠는가. 중도(中道)는 잎과 가지가 있는 나무가 그 뿌리를 흙에 두고 있는 땅과 같은 말이다. 땅 속엔 나무가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길러 주는 무엇이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하게 하는 성질을 깨달음 또는 중도라고 한다. 중도를 떠난 연기법은 따로 없는 것이다.

연기법이란 인연법으로 몸에 붙어 있는 6식이 바깥 경계를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세존이 연기법을 설하고 있을 때는 그 곳에 반듯이 중도를 바탕하고 있고 중도를 설하고 있는 곳 역시 연기법이 바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듣는 자가 인연법을 먼저 듣는 동안 그 듣는 것이 중도에 닿아 있지 못하고 중도를 먼저 듣는 동한 인연법에 닿아 있지 못한 것뿐이다.
듣는 자가 인연법을 바로 들으면 그 속에 중도가 있고 중도를 바로 터득하면 인연법을 바로 보는 눈을 갖고 나온다. 어느 한 쪽에 붙들려 있는 것은 이것도 바로 보지 못하고 저것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불교집안 시끄러움은 항상 이런데서 온다. 그리고 마음이 들뜬다. 나도 시끄럽고 남도 시끄럽고 세상도 시끄럽게 한다.

치우쳐져 있는 것은 항상 시끄럽다. 그런 이들이 사물을 대하면 그 사물 또한 시끄럽다. 그러나 중도에 의지된 지혜는 만나는 사물마다 불사(佛事)가 되어 나온다.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중(中)을 떠난 마음은 이리저리 바쁘게 오고가는 헤아림만 있다. 이런 곳에서 아는 것은 아만을 짓고 증상 만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음을 놔두고 주장하는 고집만 심하다. ‘법화경’에는 그런 들떠 있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들을 보고 세존은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을 설하고 있다.
‘불경(不輕), 가볍지 않는 마음’

그러나 이 ‘보살품’을 듣지만 믿지 않는 비구들은 그들 안에 중을 벗어나 언어의 유희로 들뜬 논쟁을 일삼는다. 현응 스님은 ‘잘’이라는 언어를 쓰고 있지만 이 잘 또한 중도를 벗어나온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본시 ‘잘’은 마음이 장애 속에 있지 않을 때 나온 말이다. 곧 중도가 있는 곳에서 쓰이는 말이다. 언어는 그 쓰는 자가 중에서 쓰면 어떤 언어든지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중을 벗어나 쓰면 중을 멀리한 변명의 언어로 쓴다.

그가 말하는 ‘잘’은 중을 벗어난 언어 속에 숨은 변명으로 나온 말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잘’이 중도에서 쓰면 ‘잘’에 중도가 묻어 나와 그 언어는 변병이 아닌 시비를 끊어 준 언어가 된다. 살아 있는 언어가 된다.

이런 중이 묻어 있는 언어가 선에서 보이는 ‘할’이다. 사람을 살려낸 언어가 되어 나온다. 이렇게 언어는 쓰는 자에 따라 시비를 끊어지기도 하고 시비를 불러일으킨다. 중을 안 떠난 언어는 생명을 살리는 지혜와 자비가 있다.

‘상불경보살품’은 이런 말을 대신하고 나온 말이다. 이 보살은 곧 내 안에 마음이 들떠 있지 않고 다툼이 그쳐 있는 마음 곧 우리들 마음에 계신 분이다. 이런 비구들은 절집탱화를 빼돌려 안 팔아먹어도 복덕이 주변을 둘러싸고 사람의 공경을 받는다. 불사(佛事)도 저절로 되고 가난 속에 풍요로움이 스스로 따라온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세존이 가신지 오래된 출가 집안에는 아는 불교와 깨닫는 불교가 뒤바뀌어져 있다. 무분별하다.

지혜인지 지식인지 우리는 혼돈 속에 살고 있다. 마치 눈이 먼 거북이가 천년 만에 바다 위로 나와 지나가는 통나무 만난 것과 같은 비유가 요즈음에 더 실감나는 세상이다. 오직 선정을 닦는 공부 ‘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한하는 것이 아님’을 관하는 곳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다툼이 그친다. 마음에 다툼이 그치면 나는 복덕이 갖추어져 있는 상불경보살을 만난다. 이 상불경보살을 만나면 몸으로 하는 것, 마음으로 하는 것에 중도가 묻어나온다.

이때 ‘잘’이라는 말은 비로소 변명의 언어가 아닌 중도가 된다. 불교는 마음을 떠나 글에 붙어서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다. 이미 내게 있는 마음을 믿고 시작하는 공부이다. 아는 것을 놔두는 곳에 바른 믿음이 시작된다. 그래서 신앙인 것이다.

서울 육조사에서 조계사문 현웅(玄雄)은 쓰다.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