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2. 조선 무용이 스승 성총에게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시니 저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무용, 어릴 때 양친 잃은 뒤
19살 때 순천 송광사로 출가
참선 매진하다 노장의 말에
교학부터 배우겠다고 결심
침굉 소개로 사제관계 시작

1681년 태풍 때 중국배 표류
나무궤짝마다 불경들이 가득
성총 4년간 수집해 불서 편찬
제자 무용도 스승 위해 참여
조선불교 바꾼 획기적 사건

“몸을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요 마음 인도하신 분은 스승님과 도반입니다. 여러 해 가까이 모시는 동안 듣지 못한 것을 들려주셨으니 그 은혜가 바다보다 깊건마는 그 보답은 티끌보다 못합니다. 사람이 일흔까지 사는 것이 예로부터 드물다고 말을 하지만 느닷없이 광언(狂言)을 숨기셨으니 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요. 감히 석감(石龕)을 조성해 유골을 모셨습니다만 혼령이 어찌 여기에 오겠습니까. 역시 벌써 여기를 떠났을 텐데 오지도 떠나지도 않는 그것은 무슨 면목입니까?”

무용수연(無用秀演, 1651~1719)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승을 떠올리며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스승. 본래 오고감이 없으니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할 일이 있을까만 자신의 내면에 꺼지지 않는 무진(無盡)의 등을 밝혀준 스승을 잊을 수는 없었다.

무용은 자신의 인생이 스승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을 만나기 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1651년 3월 전라도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산다는 일이 괴롭다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했다. 13살이 될 무렵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떠나보냈다. 그는 형의 보살핌 속에서 부지런히 학업을 닦아나갔다. 19살이 됐을 때는 유가경전과 제자백가의 문헌까지 모두 섭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고 죽으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과거시험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고, 출세나 부귀영화는 부질없어 보였다. 답답함을 해결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가야할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집을 나섰다. 불교에서라도 해답을 꼭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극구 반대할 형에게는 아예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송광사였다. 그곳에서 출가한 무용은 오로지 참선에 매진했다. 하지만 은사로부터 받은 화두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점차 절망의 그늘도 짙어졌다. 그때 한 노장이 지나가며 던진 말이 화살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다.

“예부터 큰 도를 통달하고 마음 근원을 깨달은 이는 선과 교를 다 이행했다네. 선문(禪門)에만 밝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네.”

지도나 나침반 하나 없이 어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는 은근한 질책이었다. 무용은 교학을 익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바랑을 걸머지고 침굉현변(枕肱懸辯, 1616~1684)을 찾아갔다. 침굉은 선과 교에 두루 밝았으며 가축을 만나면 귀에다 염불을 해줄 정도로 자비로웠다. 훗날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들판에 버려 들짐승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단호히 유언했던 고승이기도 했다.

무용은 침굉에게서 불경을 익혔다. 몇 해 뒤 무용은 침굉의 소개로 다시 조계산 은적사로 향했다. 그곳에 상주하는 성총이 무용의 안목을 틔워줄 수 있으리라는 노승의 깊은 배려였다.

성총은 침굉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강백이자 선승이었다.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13살에 출가했고, 18살에는 본격적인 구도의 길에 나섰다. 지리산에서 취미수초(翠微守初, 1590~1668)를 은사로 9년간 수학한 그는 선과 교학을 병행해 정진했다. 30살 무렵 경전 강의를 시작한 그는 오래지 않아 큰 명성을 얻었다. 선, 화엄, 천태, 정토 등 불교 전반에 이해가 깊었으며, 특히 화엄학의 대가로 유명했다.

1676년, 이들의 만남은 은적산에서 이뤄졌다. 성총은 무용을 보자마자 “이 사람은 옛 성현의 자리와 금강 선문[金仙]의 자리를 빼앗을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무용도 성총이 그토록 그리던 일생의 스승임을 직감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이 성총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용은 시를 지어 올렸다. 이제 스승을 의지해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겠다는 다부진 각오가 담겨있었다.
‘장부가 한번 그 몸을 맡겼으면/ 칼을 들이대도 마음 바꾸지 않는 법/ 더구나 이 세상이 이처럼 뜨거운데/ 누가 정전백수의 그늘을 벗어나리오.’

그런 무용에게 성총도 시로써 답했다. 그대는 봉황이니 어서 껍질을 깨고나와 구만리장천을 소요(逍遙)하라는 애정 어린 당부였다.
‘조사 마당의 천 길 벽오동나무에/ 어디에서 왔는지 흰 봉황새가 깃들었구나/ 우리 종파의 진실한 뜻을 알고 싶은가/ 바다와 하늘은 텅 비어 넓고 달은 홀로 외로워라.’

이후 무용은 무섭도록 경전에 몰입했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성총에게 물었고, 성총은 곧바로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무용은 모든 경장을 섭렵할 수 있었다. 무용은 스승의 곁을 떠나 만행에 올랐다. 선암사, 송광사, 백운암 등에서 경전을 강의했으며, 화두참구에도 들었다.

▲ 1681년 6월 전라도 신안 앞바다의 임자도에 모습을 드러낸 난파선에는 불경이 가득했다. 성총은 4년간 바다에 떠다니는 불경들을 입수해 제자 무용과 함께 이곳 징광사에서 불서들을 판각했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징광사는 남도의 대표적인 대찰이었으나 19세 중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그 무렵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1681년(숙종 7년) 6월로 접어들면서 태풍이 불어왔다. 그로인해 70여명의 어민이 목숨을 잃는 등 전국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며칠 뒤 전라도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 돌연 난파선이 표착했다. 그런데 배 안의 나무궤짝에는 불경이 가득했다. 인근 바다에도 불경이 담긴 나무궤짝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주 관아에서는 배 안에 있던 불경 궤짝들을 꺼내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얼마 후 왕실창고에 보관돼 있던 불경들은 남한산성 개원사 등 사찰로 옮겨졌다. 숙종이 불경을 열람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불편하게 여긴 신하들이 불경을 궐 밖으로 내보내라고 주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나무궤짝 속 불경이 조선불교의 판도를 바꿀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자도 앞바다에 홀연히 나타난 표류선. 그것은 대만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상선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무역은 순탄하지 않았다.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에 반발하는 세력들은 대만으로 옮겨가 계속 저항했다. 주도자는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었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수시로 본토를 쳐들어갔다. 이에 청은 일반인들의 해상무역을 원천 금지시켰다. 주민들도 아예 해안에서 30리 안쪽으로 이주시켜 접촉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저항세력들은 일본과의 교역에 눈을 돌렸다. 대만과 일본 사이에는 온갖 물품이 오고갔으며 그 중에는 불경도 포함돼 있었다.

임자도에 난파한 배에 실렸던 경전은 명나라 말기부터 120여년에 걸쳐 간행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었다. 가흥대장경은 중국에서 간행된 역대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여기에 수록된 전적이 무려 2195부, 1만332권으로 중국불교의 결정체였다. 일본에 건너가 황벽종을 개창했던 중국 출신의 선승 은원(隱元, 1592~1673)의 뜻에 따라 제자들이 일본에서 가흥대장경을 간행하려 추진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태풍을 만나 대장경을 실은 배가 조선에 표류했던 것이다.

경전을 담은 궤짝들 중 일부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많은 궤짝들이 바다 위를 떠다녔다. 영광 불갑사에 머무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총은 곧바로 표류선이 있는 임자도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중국의 화엄학자인 거사 섭기윤(葉祺胤)이 1625년 간행한 ‘화엄경소연의초(華嚴經疏演義鈔)’가 놓여있었다. 성총은 뛸 듯이 기뻤다. 많은 이들이 자기를 화엄에 밝다고 했지만 정작 오묘한 뜻은 깨닫지 못해 마음의 병이 된지 이미 오래였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조선초에 일실된 ‘화엄소’를 읽어보는 게 일생의 꿈이었다. 그런데 비록 전체는 아니지만 그토록 소원하던 책이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었다. ‘대명법수’ ‘회현기’ ‘금강기’ ‘기신기’ ‘정토기신문’ 등 국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귀한 책들도 많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50살을 넘긴 성총은 부처님의 가피라 여기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 경전들을 모아 간행하겠고 서원했다. 관아에서 수습해 조정에 올린 것 외에도 해변 곳곳에 떠내려 온 경전들도 대단히 많았다. 성총은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습득한 경전이 있는지 수소문했다. 50을 넘긴 나이에 인근 바닷가 마을을 찾지 않은 곳이 없었다. 행여 바다에서 건진 불서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곧바로 찾아가 그 책을 얻거나 필사했다. 한번은 구봉산 보현사를 찾아가자 그곳 주지는 ‘화엄경소연의초’ 여덟 권을 보관하고 있다며 흔쾌히 보여주었다. 성총은 너무 기뻐 사찰로 돌아온 뒤에 감사의 편지를 썼다.

“제가 3번 능가사에 갔고 2번 선운사에 찾아갔습니다. 그 외에 바다와 산들도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화엄경소연의초’ 80권 중 겨우 절반 정도 얻었지만 아직 전체를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아침저녁으로 마음에 걸려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귀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8권을 기꺼이 보여주셔서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해주시니 이 또한 법보시의 일대 인연일 것입니다.”

성총은 부지런히 불서를 수집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뒤에는 상당량의 불서를 모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 ‘화엄경소연의초’ 80권 전체도 포함돼 있었다. 1685년, 성총은 그 책들을 싣고 낙안(보성군 벌교읍) 징광사(澄光寺)로 향했다. 그곳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었던 침굉이 머무르던 사찰인데다가 종이 생산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징광사에 도착한 성총은 책의 판각 순서부터 정했다. 그리고 화엄보다 정토 전적부터 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잇따른 대기근과 전염병 창궐로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민심의 흉흉함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성총은 사람들이 정토신앙에 의지해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랐다. 또 송, 명, 청 등 중국의 지식인들도 열렬한 불교신봉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선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 백암성총이 무용수연의 도움을 얻어 편찬한 ‘사경영험’. ‘사경지험기’라고도 불린다. 출처=문화재청
성총은 자신이 입수한 ‘정토기신문’ ‘권수정토지업’ ‘염불요문’ ‘불시염불심종공덕’ ‘일과염불’ 등 정토신앙과 관련된 내용을 편집해 ‘정토보서(淨土寶書)’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이 책은 정토신앙의 교리를 망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염불수행법과 영험담까지 폭넓게 수록한 정토입문서였다. 또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관음경’과 관련된 송, 명, 청대의 영험담을 수록한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도 판각해 유포했다.

무용도 만행을 멈추고 성총의 불서 편찬을 적극 도왔다. ‘대명삼장법수’ ‘금강반야경간정기’ 등 수많은 판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는 스승이 불서간행으로 조선의 불교를 일신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성총은 그런 무용이 백만대군처럼 듬직했다. 그는 자신을 돕는 무용 등 제자들이 화엄의 오묘한 현리를 모두 터득할 수 있도록 ‘화엄경소연의초’를 직접 강설했다. 그런 뒤에야 ‘화엄경소연의초’의 방대한 판각작업에 들어갔다. 61살 되던 1692년에는 선암사 창파각에서 화엄대회를 열어 화엄학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했다.

성총은 무용 등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15년 동안 197권 5000여판의 방대한 서적을 간행했다. 성총이 없었다면 조선후기 정토사상의 흥성과 화엄학의 중흥은 있을 수 없었으며, 불교가 서민들 속 깊숙이 스며들기도 쉽지 않았다. 또 성총이 승려교육의 정비를 자신의 시대적 과제로 삼았기에 선(禪), 교(敎), 율(律)이라는 조선후기 삼문수행(三門修行)의 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성총은 만년에 화엄과 정토의 보급에 더욱 힘썼다. 정토와 염불에 관한 내용을 변주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7언 율시 100수에 담은 ‘정토찬(淨土讚)’을 간행했다. 더불어 광활한 화엄의 세계를 압축해놓은 ‘화엄현담회현기’를 펴냈다. 성총은 ‘화엄경소연의초’ 발간이 마무리되던 1700년 7월25일, 쌍계사 신흥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가 열반에 들자 매일 밤 상서로운 빛이 감돌았으며, 7일째 밤 다비식 때 그 빛이 모여 남북으로 뻗쳤다고 전한다.

무용이 스승을 떠올리며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쓴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스승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선적으로 표현했다. 무용은 헛헛했다. 이는 성총의 다른 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문도들은 무용에게 스승의 강석을 계승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수차례 사양하던 무용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법석을 열었다. 하지만 몇 해 뒤 “한갓 혀나 놀려대는 것이 어찌 염불에 전념하는 것만 하랴”며 자신의 길을 향해 홀로 떠나갔다. 그는 용문산 은봉암에 머물고 때로는 각지를 돌며 시를 쓰고 인연 닿은 곳에 암자를 세우기도 했다. 종종 유생들과도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불교를 멋대로 재단해 폄훼하는 일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나도 세속에 있을 적에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잠을 자다가도 크게 소리 내어 웃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그쪽의 가르침은, 깊고 깊은 것도 우리 가르침의 얕고 얕은 것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그 깊고 얕음이 어떠한지 깊이 따져보지도 않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의 별주부에게 ‘나의 즐거운 이 우물 속으로 들어와서 왜 구경하려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1719년, 69살의 무용은 영호남의 장로와 강사들이 거듭된 요청에 따라 화엄강회를 열었다. 그러고는 그해 10월17일 용문산 은봉암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며 왼발을 오른쪽 무릎에 얹고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선시의 달인 무용수연이 조선불교의 새로운 틀을 구축한 백암성총에게 쓴 글은 ‘무용당유고’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정토보서’(백암성총 지음, 김종진 옮김, 동국대출판부), ‘사경지험기’(백암성총 지음, 성재헌 옮김, 동국대출판부), ‘백암정토찬’(백암성총 지음, 김종진 옮김, 동국대출판부), ‘무용당유고’(무용수연 지음, 이상현 옮김, 동국대출판부),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이종수, 불교학연구 21호),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이종수, 서지학연구 제56집),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조명제, 역사와 경계 제68집), ‘종교적 이상향과 자기서사의 교직, ‘백암정토찬’의 작품세계’(김종진, 한민족문화연구 제32집), ‘17세기 징광사의 불서출판’(이희재, 불교학보 제49집), ‘무용수연의 선시 연구’(원법 스님, 한국선학 제34호)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