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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철학자 강신주의 의상 비하와 오만

  • 기자칼럼
  • 입력 2015.11.28 09:42
  • 수정 2015.12.06 01:17
  • 댓글 11

소설 ‘발원’의 강신주 ‘해제’ 논란
긴 해제서 의상 극단적으로 비하
의상 탁월하다는 사람은 “멍청”
국경 외곽에 초소처럼 사찰 건립
당 유학도 “자격증 때문” 강변

화엄을 제국 이데올로기로 매도
“일연도 악마적 편집 구사” 비난
의상 존경하는 이들에게 큰 상처
강신주 오점 두고두고 남을 것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의 ‘발원’(민음사)이 올해 불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출판사측 소개처럼 유려하고 맵시 있는 문장이 읽는 즐거움을 더해줄 뿐 아니라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와 영화적 상상력으로 당시 서라벌을 눈앞에 온전히 펼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처음 기획했던 화쟁위원회도 이 책에 대해 자못 흡족해했다. 당시 신라의 사회상과 원효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풀어냈다는 이유에서였다. 화쟁위원회가 큰 상금을 내걸고 11월27일까지 독후감 공모를 실시한 것도 원효의 삶과 사상을 알리기 위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화쟁위원회의 홍보 덕분인지 이번 공모의 참여자가 1000명이 넘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소설에 대해 불편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발원’2에 수록된 철학자 강신주의 해제와 관련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원효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상을 지나치게 폄하했다는 지적이다.

익히 알려졌듯 원효와 의상은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을 두고 때로는 절친한 도반으로, 때로는 라이벌로 묘사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의상은 한국불교사의 큰 흐름을 형성한 화엄사상을 해동에 전한 초조이자 가장 모범적인 승려로 서술돼왔다. 역사서에 의상은 터럭만치도 계율에 어긋나지 않았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으며, 평생 서쪽을 향해 등지고 앉지 않을 정도로 신심 깊은 수행자였으며, 제자들을 지극히 아꼈던 스승으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신주는 이 책 해제에서 의상에 대해 ‘충격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원효와 의상의 비교를 통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원효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의상을 극단적으로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인 의상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다.

강신주는 대학시절부터 “의상을 깎아내리고 원효를 높이 올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밝혔다. 원효보다 의상이 더 탁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멍청해서 상종조차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긴 해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의상은 대단히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자 신라 왕실의 이익을 우선한 국가불교의 버팀목으로서 결국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신주는 의상이 신라의 왕을 중생 구제하는 법륜성왕으로 전제했다고 못 박는다. 그런 뒤 의상은 국경 외곽에 불교 국가의 초소처럼 사찰을 건립했으며 의상이 세운 사찰들은 종교적 기능과 함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기능도 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국가 권력의 비호로 화엄 10개 사찰을 건립하고 그 사찰의 주인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의상’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 근거는 없고 오로지 상상에 기댄 추론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의상은 세속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음보살의 행을 따르고자 했던 지극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의상이 귀국해서 처음 향한 곳은 경주가 아니라 낙산의 관음굴이었다. 그곳에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지극한 기도로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후 의상이 정착한 곳은 화려한 도성이 아니라 태백산 기슭의 궁벽한 산골이었고 그것이 곧 지금의 영주 부석사다.

의상이 세속의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단장한데 이어 도성까지 짓겠다는 얘기가 들려올 때 의상은 부득이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 성이라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할 것이요, 정교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견고하고 긴 성이 있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고된 부역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을 돕기 위한 배려였고, 왕도 의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사를 중지토록 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강신주는 이런 역사적인 기록에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외려 군사정권 시절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가 사실상 용도 폐기된 화엄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을 전제왕권 이론처럼 언급한 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개개인의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파시즘적 교훈이 떠오르지 않느냐”고 비꼰다. 그는 “당나라 제국도, 통일신라 제국도, 현대 일본의 제국주의도 그렇게 화엄불교를 좋아했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며 의상의 사상이나 화엄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몰아 부친다. 물론 강신주는 이번에도 화엄이 통일신라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후기에도 불교의 주류사상이었으며, 지금도 불교학자 중 화엄연구자가 가장 많을 정도로 화엄사상이 심오하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강신주의 의상 폄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상은 원효가 큰 깨우침을 얻어 신라로 돌아갔음에도 홀로 유학의 길에 오른 것에 대해 독설을 퍼붓는다. 타인의 깨달음이 자신의 깨달음이 될 수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의상이 죽음을 불사하고 삼엄한 국경선을 넘어 홀로 구법의 길에 오른 일은 그에게는 아무런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오늘날 기득권자들이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반드시 박사학위를 손에 넣고 돌아와야 하는 현실을 거론한 뒤 의상도 당시 귀족층 자제들의 숙명인 일종의 (유학)자격증이 필요했다고 강변한다.

그는 선묘설화와 관련해서도 기막힌 상상력을 펼친다. 의상이 선묘 구애를 뿌리친 것과 관련해 “진골 귀족 출신의 한계를 조금도 넘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 “학위를 따러 외국에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여자를 데리고 귀국했다면 모든 걸 잃게 되었을 것(을 두려워했다)” 등 의상을 신라의 골품제도에 연연했던 철저한 속물로 묘사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악마적인 편집 능력을 구사”해서 원효를 깎아내리고 의상에게 흠이 될 만한 일체의 요소를 냉혹하게 제거했다고 혹평한다. 의상은 물론 일연까지도 국문학자나 역사학자에게 무비판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는 국가불교 신봉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 또한 상상일 뿐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철학자인 그에게 의상이 철저히 평등공동체를 지향했음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의상이 머물렀던 부석사에는 가난한 나무꾼인 진정과 노비출신인 지통을 비롯해 법에 뜻을 둔 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졌다. 의상을 존경했던 국왕이 부석사에 토지와 노비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우리의 불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균등합니다. 무엇 때문에 논밭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라고 사양했던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다.

강신주는 의상이 지극한 신앙과 화엄의 밝은 빛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환히 밝혔던 일이나, 어머니를 두고 출가한 제자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풀로 엮은 초막에서 직접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했던 일, 의상이 입적한 뒤 그의 제자들이 “높은 산처럼 우러러 어느 하루도 스승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비통한 절규를 끝내 외면한다.

그는 의상은 차치하고라 원효라도 제대로 아는 걸까. 원효는 다툼을 종식시키는 화쟁의 두 극단을 떠나되 가운데도 아니라는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을 강조했다. 두 극단[二邊]을 벗어나야 방외(方外)에 노닐 수 있다는 게 원효 논리의 근간이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원효와 의상, 성과 속, 지계와 파계, 지배자와 피지배자, 국내파와 해외파 등 이분법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원효와 의상을 화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분별과 선입견을 더욱 부추긴다.

▲ 이재형 기자
철학자 강신주는 스스로 밝히듯 강단철학에서 벗어나 대중아카데미 강연들과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소통과 사유를 나누어왔다. 특히 그 어떤 권위나 전공에 주눅 들지 않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인문정신을 보여주었다. ‘벽암록’과 더불어 천하제일의 선서로 꼽히는 ‘무문관’ 해설을 통해 번뜩이는 선기로 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공덕과 명성이 크더라도 이번 해제로 인해 의상을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마음 아파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오점도 두고두고 아프게 기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통과 사유의 철학자 강신주의 새로운 ‘발원’ 해제를 기대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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