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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기자명 김택근

▲ 10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했던 성전암에서의 성철 스님. 수많은 이들이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성전암을 찾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이라도 해 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같은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성철 인터뷰)

사람들은 큰절 파계사를 지나 작은 성전암으로 몰려왔다. 성철은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신도와 시자가 ‘점잖은 대치’를 했다.

“스님 좀 뵈러 왔습니다.”
“지금 정진중이십니다.”
“언제 뵐 수 있습니까?”
“오늘은 뵐 수 없습니다.”
“스님 뵈러 먼 길을 왔는데 어찌 안 되겠습니까?”

천제, 만수, 성일은 고개를 숙일 뿐 답을 할 수 없었다. 신도 거의가 서울이나 부산, 마산 등 큰 도시에서 성철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철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철조망 너머에서 서성거렸다.

성전암에는 신도들만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스님들도 계단 길을 올라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인홍 스님 또한 석남사 대중을 이끌고 성전암을 찾아왔다. 그 속에는 성철의 딸 불필도 있었다. 안거가 끝나는 전날이면 울진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대구에서 내려 걸어서 재를 넘었다. 무려 30리 길을 걸어 해가 진 뒤에야 성전암에 도착했다. 철조망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모두 큰방에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혹시 오늘은 큰스님이 말씀 하나 주실까.’

그러나 이내 “나가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성전암이 무너질 듯했다. 성철이 주장자를 휘두르며 대중을 내쫓았다.

“내 말 잘 들어. 나한테 속지 말라 이거야.”

인홍과 석남사 비구니들은 신발도 꿰지 못한 채 우르르 쫓겨났다. 겨울에는 성전암 주변이 온통 눈밭이었다. 언 발을 구르며 서 있으면 시자들이 소쿠리에 신발을 담아 내주었다.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어두운 산길을 서로 손을 잡고 내려갔다. 더듬더듬 뒤뚱뒤뚱 거리다 더러는 눈길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들은 큰 절 파계사에서 잠을 잤다.

법문은커녕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났지만 인홍과 석남사 대중은 철마다 성전암을 찾아갔다. 산을 오르는 30리 길은 그들만의 순례길이었다. 석남사 비구니들은 성전암 찾아가기와 쫓겨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석남사 안거는 성철에게 쫓겨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성철은 공부는 가르침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진해서 이뤄진다며 그들을 내쳤다. 분심을 일으켜 정진하라는 다그침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비구니들은 성철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사자 어미와 사자 새끼 같았다. 홀로 살아가라며 내치는 어미에게 달려드는 새끼들 같았다.

불필과 백졸도 출가한 이후에는 성전암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행자 시절에는 이것저것을 챙겨주었지만 삭발하자마자 성철의 태도가 돌변했다. 얼굴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암을 찾아갔을 때였다. 성철은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었다. 당황한 불필과 백졸은 무엇을 물었는지도 몰랐다. 쩔쩔매는 불필과 백졸에게 성철이 고함을 질렀다.

“저 가시나들 속가로 보내라. 절로 다시 가면 내가 그 절을 불사를 것이다.”

혼이 나간 불필과 백졸이 도망쳤다. 그 뒤통수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 법문노트 내놓고 가라!”

불필은 생명처럼 지니고 다녔던 법문노트를 내놓아야 했다. 수행의 지침이 없어지자 그간의 수행이 모두 빠져나간 듯 허전했다. 그렇다고 성철에게 다시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불필은 천제에게 법문노트를 찾아 달라 간청했다. 천제는 청을 뿌리칠 수 없어 법문노트 전체를 베껴서 전해주었다.

성전암에서 쫓겨난 사람 몇몇은 분을 참지 못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도인은 당신만 도인인가. 우리도 공부하면 도인이지.’

그렇게 분심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다. 성철이 무자비하게 내치면 시퍼렇게 눈을 뜨고 공부하는 사람이 나왔다.

“큰스님이 그 먼 길을 걸어갔어도 밥 한 술 주지 않고 내쫓은 것은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또 ‘왜 이렇게 쫓겨나야만 하는가’ 하는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혼자 걸어가라’는 뜻이다. 그렇다. 공부는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불필 ‘영원에서 영원으로’)

스님과 행자들은 그렇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면서도 다시 성전암이 그리웠다. 이 땅에 큰스님 계심이 그저 든든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공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느 날 고요한 성전암에 인기척이 났다. 제자 천제가 으레 내쫓으러 밖에 나가니 웬 부인이 홀로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부인은 꼭 성철을 만나봐야겠다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 그런 사람이 한 둘인가. 천제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해질녘이 되어 살펴보니 그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돌아갔겠지 여기고는 절집 식구끼리 저녁공양을 마쳤다. 성전암은 서서히 어둠을 빨아들이고 사위가 조용했다. 그때 밖에서 우당탕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본 바로 그 부인이 잠긴 문을 밀치고 들어온 것이었다. 부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성철이 소리쳤다.

“빨리 쫓아내! 빨리 쫓아내라니까.”

시자들이 부인을 붙잡았다. 부인은 끌려가면서도 성철을 노려봤다. 부인이 소리 질렀다.

“스님, 내가 할 말이 있어 왔소! 내 말 좀 들어주시오!”

성철은 그러나 쳐다보지 않았다. 부인은 바로 묵곡리에서 온 속가의 아내였다. 제자들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인을 파계사까지 끌고 내려갔다. 부인이 숨을 돌린 후 말했다.

“행자님들, 내 다시 올라가지 않을 테니 이제 올라가 보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전암을 찾아왔지만 이렇게 당차게 대든 경우는 없었다. 제자들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성철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내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데려가는 남편이 너무도 야속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담판을 지으려 성전암을 찾았던 것이다. 찾아가봐야 소용없는 줄 알았지만 찾아갔고, 헛걸음이라도 해서 속을 가라앉히려 했을 것이다.

1958년 초가을 아버지 이상언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9일장으로 치렀다. 성철은 부음을 듣고 묵곡리 속가에 제자 천제를 보냈다. 천제는 그때서야 그날 자신들이 쫓아낸 부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문상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소복을 입은 맏며느리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 거예요. 한참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얼마 전 억지로 쫓아낸 그 부인인 겁니다. 얼마나 무안하고 참담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남에게 굽힘없이 당당하게 살았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끌어온 삶을 77년 만에 내려놓았다. 유학자 이상언은 임종을 앞두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나는 성철 스님에게로 간다.”

사람들은 아버지 이상언이 자신을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에게 호통을 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남긴 말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도 불가에 들었음이었다.

아버지보다 한 해 먼저 어머니 강상봉이 세상을 떠났다. 1957년 봄이었다. 성철이 있는 곳이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다녔던 강상봉은 비록 세속에 있었지만 반듯하게 살았다. 큰스님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는지 늘 자신을 살폈다. 임종을 지키는 노스님에게 삭발을 부탁하고 어머니는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다음 생에는 출가하여 손녀(불필)의 상좌가 되고 싶다.”

떠나간 남편 영주를 기다리면서도 승려인 성철은 미워했던 아내 덕명도 결국 딸을 따라 출가했다. 훗날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가에 들었다.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세상을 버려서 얻은 참세상, 갇혀서 얻은 참자유, 그곳에는 세상보다 더 큰 법력과 희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량불사의 방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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