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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고도 버텨낸 조선 포로들과[br]그들을 버린 비겁한 지배층 남자들

기자명 이병두

‘화냥년- 역사소설 병자호란’ / 유하령 지음 / 푸른역사

▲ ‘화냥년- 역사소설 병자호란’
각각 스무 살, 열일곱 살이었던 강(康) 도령과 선(鮮) 아가씨.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은 조선을 유린한 만주족에게 포로가 되어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 세 달을 걸어 선양(瀋陽)으로 끌려간다. 포로들은 끌려가는 도중 열에 여덟은 맞아 죽고, 강간당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압록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당시 조선 인구의 10%가 포로로 잡혀갔다. 이 책 ‘화냥년― 역사소설 병자호란’은, ‘돌아오게 할 수도 있었지만 돌아오게 하지 않아서 그렇게 죽어가고 또 그렇게 살아남은’ 포로들과 ‘이들을 버렸던’ 당시 지배층 남자들의 한없이 비겁한 이야기다.

압록강을 건넌 지 닷새 만에 한양까지 내달리는 동안 청군은 “조선의 무장이나 군사들을 보지 못했다. 조선의 무장들은 전투도 해보지 않고 도망갔다. 명과 청, 두 군주를 섬길 수 없다고 꼬장꼬장하게 버티던 조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앞세웠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들의 수도를 버리고 달아났다. 조선의 왕은 하루 만에 궁궐을 버렸다.” ‘뿌리 깊은 제도와 문화를 갖고 있다’며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은 입으로 큰소리만 쳤지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쉽게 도망가고 쉽게 항복”하였다. “칼 앞에 맞서는 자들은 없었고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오랑캐 만주족의 “청나라를 가볍게 여겨 치욕을 당한 조선의 군주와 신하들은 절개와 지조를 잃었지만 백성은 목숨을 잃었다.”

최근 시리아 사태에서도 환하게 드러나듯이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보다 오히려 민간인, 그 중에서도 여자와 어린이들이 더욱 큰 고통을 당한다. 전쟁에 진 쪽의 여성들은 “죽음을 택하지 못한다면 능욕에 익숙해져야 했다.” 싸구려 자존심만 가득 찼던 비겁한 남자들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충과 효의 나라, 절개의 나라, 사내들은 자신들이 지키지 못한 것을 여인네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렵민족인 만주족에게 “포로는 최고의 재산이며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이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더 이득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아녀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속환가가 얼마더라도 데려와야 하지만 숨겨두기 위해 데려와야”했고, 그래서 조선 양반 여자들의 몸값을 높였기 때문이다.

비참하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서도 조선 왕 인조(仁祖)는 자신의 ‘어여쁜 백성’인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려는 노력보다는 선양에 잡혀간 ‘소현세자가 청 조정과 합세해 자신을 밀어낼까’ 전전긍긍하고, 도망쳐온 백성을 다시 붙잡아 보내는 포로쇄환을 허가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고난의 세월에도 자리 지키기에 쩔쩔 매는 인조와 그를 농락하고 있는 청 조정, 조선인 친청(親淸) 세력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끔찍하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를 악문 채 “비명 한 마디,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르지 않는” 조선의 젊은이, 그의 살갗이 터지는 것을 보며 만주인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 ‘강’이 있고 그를 믿고 사랑하는 ‘선’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영화 ‘언브로큰’의 주인공이 일본인 수용소장의 학대에도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며 그 무거운 목재를 머리 위에까지 들어 올려서 모두를 놀라게 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작가는 “반겨줄 고향도, 받아줄 고향도 없지만” 그렇게 모진 시련을 버텨낸 포로들이, ‘포로로 잡힌 조선 땅과 끌려온 선양(瀋陽) 땅, 그 원한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몽골 초원에서 어울려 새로운 ‘꿈’의 마당을 만들어가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뚫기 어렵게 여겨졌던 진흙층 밑에서 가냘프고 부드러운 어린 풀의 싹이 트고, 그것이 장차 뿌리를 내려 상처가 내부에서 나아가고 있는’(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병두 대한불교진흥원 사무국장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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