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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카노 모토노부, ‘향엄격죽도’

기자명 조정육

작은 깨달음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 법을 보림하는 지름길

▲ 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 ‘향엄격죽도(香嚴擊竹圖)’(부분), 종이에 수묵담채, 무로마찌(室町)시대, 175.2×137.4cm, 도쿄국립박물관.

10여 년 전이었다. 한참 ‘육조단경’에 빠져 있을 때라 어디서 강의만 있다면 쫓아다녔다. 책으로 읽는 법문은 자칫 독단에 빠지기 쉽다. 강의로 듣는 법문은 독단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북한산 뒤쪽에 위치한 삼천사에 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분당에서 삼천사까지의 거리가 만만치는 않았으나 일요법회에서 성운 스님이 ‘육조단경’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 예불이 끝나고 스님의 법문이 시작됐다. 한참 강의를 듣는데 우연히 ‘뜰 앞의 잣나무’가 나왔다. 귀가 번쩍 트였다.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주(趙州)선사가 한 대답이었다. 당시 나는 이 화두에 걸려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처가 뜰 앞의 잣나무라니. 조주선사는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조주선사가 살던 곳의 잣나무는 영험한 나무였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해도 해답은 찾지 못했다.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화두가 목에까지 차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때 성운 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를 언급했으니 내가 관심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의외로 답이 시원찮았다.

13세에 출가한 도겐 스님
경전 탐독하다 의문 봉착
공부 위해 송나라 건너가
깨달음 뒤 자력신앙 펼쳐

“조주선사가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나무가 잣나무였겠지요. 어디 잣나무만 부처겠습니까? 두두물물이 전부 부처라는 뜻이겠지요.”

도겐(道元,1200~1253) 스님은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승려로 조요대사(承陽大師) 또는 기겐 도겐(希玄道元)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에서 조동종(曹洞宗)을 들여와 일본에 처음 소개했다. 앞에 살펴본 에이사이 스님이 전한 임제종이 간화선이라면 도겐 스님이 세운 조동종은 묵조선이다. 조동종은 중국에서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본적(曹山本寂,840~901)에 의해 시작된 선종이다.

도겐 스님은 황실 귀족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가 3세 때, 어머니는 8세 때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13세에 출가하여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잔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그가 출가하게 된 계기는 세속에서 겪은 불행과 어머니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6세 때 과부가 되고 재가하여 35세 때 또 다시 과부가 되었으며 가족과 두 남편을 권력투쟁에서 잃었다.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상한지를 절절히 깨달은 그녀는 아들에게는 절대로 권력 가까이 가지 말고 출가할 것을 권했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도겐 스님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불교서적을 읽으며 자랐는데 9세 때 세친(世親)의 ‘구사론(俱舍論)’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출가 후 히에이잔에서 경전을 깊이 탐독하던 그는 어느 날 커다란 의문에 부딪쳤다. ‘본래본법성(本來本法性) 천연자성신(天然自性身)’이라는 구절에서였다. ‘일체 중생은 그 몸 그대로가 부처’라는 의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미 부처인데 수행을 하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부처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들께서는 굳이 고생하며 수행할 필요가 있을까. 화두에 딱 걸린 것이다. 그는 해답을 찾고 또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히에이잔에 있는 수많은 석학들에게 묻고 물어도 만족할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히에이잔을 내려와 에이사이 스님 밑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에이사이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선을 공부하기 위해 송나라로 향했다. 그는 송나라에서 스승을 찾아 여러 해를 운수행각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이름 없는 수행자들을 통해 문자나 지식에 의존했던 공부의 한계를 느꼈다. 그 후 조동종의 법맥을 이은 장옹여정(長翁如淨)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이 바로 ‘다만 좌선할 뿐’이라는 ‘지관타좌(只管打坐)’다.

지관타좌는 다만 앉음으로 인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겐 스님은 좌선을 해서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은 중생의 좌선이라 부르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가르친 것은 ‘부처의 좌선’이었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해서 앉는 것이 아니다. 본래본법성의 부처인 본래의 자기가 앉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앉는 자의 좌선과 달마대사의 좌선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수단으로서의 좌선을 엄격히 비판하고 ‘본래의 부처’로서 그냥 앉는 ‘단좌참선(端坐參禪)’을 정문(正門)으로 삼았다. 즉 불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그 정문은 지관타좌다. 지관타좌를 뒷받침한 것은 본증묘수(本證妙修)의 사상이다. 즉 본래의 깨달음은 반드시 스스로 드러나서 묘하게 닦아 나가야 한다. 수행과 깨달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그의 사상은 송나라에서 만난 스승 여정의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다. 여정은 좌선이 ‘신심탈락(身心脫落:몸과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즉 분향, 예배, 염불, 참회, 간경 등의 방법을 쓰지 않고 다만 앉는 좌선이 신심탈락이다. 청화선사(淸華禪師,1924~2003)는 신심탈락에 대해 ‘공부를 해서 마음이 일념이 되면, 몸도 마음도 쑥 빠져 버리고 환희가 충천하는 기분’이 된다고 표현했다. 신심탈락이 되면 오욕 등을 떠나기 때문에 오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도겐 스님 또한 지관타좌, 곧 좌선전수를 열심히 할 것을 가르쳤으며 수행과 깨달음의 합일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전한 것이 순일한 불법이며 자신만이 정전(正傳)의 불법을 일본에 전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도겐 스님은 당시의 말법사상을 배격하고 철저한 정법만을 고집하면서 석가모니의 법을 일반 대중에게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에서는 1052년부터 말법시대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를 믿어 죽은 뒤에 그곳에 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정토종 신앙이 크게 번창했다. 이에 대해 도겐 스님은 ‘대승불교에서는 정상말(正像末)을 나누지 않는다’라고 정토종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철저한 석가신앙의 입장을 견지했다. 당시 불교계를 평정한 정토종, 정토진종, 일련종 등이 모두 타력신앙인 데 반해 도겐 스님이 들여온 선종은 자력신앙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가 20년 이상 걸려 집필한 ‘쇼보겐조(正法眼藏)’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총 95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지관타좌를 열심히 할 것과 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 원리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위산영우선사가 향엄지한(香嚴智閑)에게 물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분에 대해 한마디 하라.”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던 향엄이 스승에게 답을 청했다. 그러나 위산선사는 “내가 말하는 것은 내 견해이고 그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거절했다. 향엄은 해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책을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그는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운수납자가 되어 몇 년 동안 돌아다녔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도량 청소를 하다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스승이 그때 알려주었더라면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향엄격죽도(香嚴擊竹圖)’는 그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한 손은 위로 쳐들고 다른 손에는 빗자루를 든 향엄이 대나무에 부딪친 기와 조각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을 벌리고 감탄사를 내지르는 향엄 얼굴이 깨달음의 기쁨으로 환하다. 가사장삼을 그린 윤곽선이 칼로 도려낸 듯 날카롭다. 무로마찌시대(室町, 1336~1573)가 되면 중국 선종의 조사들을 소재로 한 선종화뿐만 아니라 주돈이나 도연명 등의 고사인물도가 주 화제(畫題)로 등장한다.

‘향엄격죽도’는 카노파(狩野派)의 대가 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1476~1559)의 작품이다. 카노파는 성(姓)이 카노인 사람들이 무로마찌시대부터 에도(江戶,1603~1867)시대까지 근 400년 동안 혈연으로 화사(畵師)의 가계를 이어 온 화파를 의미한다. 속된 표현으로 카노집안에서 그림판을 다 해먹었다는 뜻이다. 그 기간 동안 막부와 봉건귀족의 에도코로(繪所:궁중에서 그림을 관장했던 관청)는 거의 카노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노파를 대표하는 화가들로는 카노 쇼에이(狩野松榮, 1519~1592), 카노 에이토쿠(狩野永德,1543~1590), 카노 산라쿠(狩野山樂, 1559~1635), 카노 산세쯔(狩野山雪,1590~1651) 등 대략 언급해도 일본 미술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거물들을 들 수 있다. 카노파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카노파의 시조(始祖)는 교토에서 쇼군의 어용회사(御用繪師)가 된 카노 마사노부(狩野正信, 1434~1530)다. 그는 선승(禪僧)들의 전유물과도 같던 수묵화를 그린 최초의 속인화가였다. ‘향엄격죽도’를 그린 모토노부는 마사노부의 아들이다. 그는 카노파의 기반을 굳힌 사람으로 일본 전통미술에 내재된 서정성과 장식성을 가미한 장병화(障屛畵:벽이나 병풍 등의 칸막이용 가구에 그린 그림)를 선종사찰에 그렸다. 그가 중국 고전인물이나 화조화를 곁들인 산수화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향엄격죽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향엄격죽도’는 카노파의 대표작이면서 선종의 화두가 일본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삼천사에서 성운 스님의 대답을 듣고 나는 오도송을 부르는 대신 허탈감을 느꼈다. 알고 보면 지금 이대로가 부처님이고 진리의 현현(顯現)이란 굉장한 법문이었는데 공부가 부족한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뭔가 그럴듯한 형이상학적인 답을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내 스스로가 끝까지 궁구해서 얻은 답이 아니라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진리는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에게 그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다.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는 찾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다.”

성운 스님의 법문을 들은 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산영우선사가 향엄선사에게 답을 주는 대신 직접 찾도록 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내 스스로 삼켜야 내 것이 된다는 진리였다. 아마 그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불교 공부가 시작된 것 같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달하기 힘드니 먼저 이해하고 나중에 닦는 선오후수(先梧後修)를 수행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작은 깨달음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 법을 보림(保任)하는 지름길이라는 것도 선오후수를 통해 알았다. 성태장양(聖胎長養)이란 말이 있듯 작은 법문이라도 가슴에 품고 오랫동안 잘 보림하면 언젠가 내 안에서도 부처의 싹이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록 향엄선사처럼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에 깨우치지는 못하더라도 궁극에는 부처가 되지 않을까. 이것이 도겐 스님이 얘기한 본래의 부처로 앉아 있는 지관타좌일 것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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