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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월정사탑의 건립시기 문제

대표적인 팔각다층석탑…문헌·양식 따라 다양한 편년 추정

▲ 강원도 평창 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높이 15.2m.

고려시대에는 팔각다층석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평양의 영명사 및 홍복사 7층석탑, 그리고 묘향산 보현사 13층석탑처럼 고려의 수도 개경에 가까운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드물게 남한에서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남아있다. 이러한 팔각형 평면의 탑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되고 있다.

안정적인 높이·균형미 압권
명확한 조성 연대는 알수없어

유연 스님 중창때 조성 추정되나
유사 형태로 중국 연관성도 제기
10세기~조선까지 견해 다양해

월정사탑은 비록 개경의 입장에서 보면 멀리 떨어진 지방사찰의 탑일지 모르지만, 북한에 남아있는 7층, 13층 석탑에 비교하여 9층이라는 안정감 있는 높이와 균형, 그리고 장중함을 두루 겸비한 탑이라는 점에서 고려를 대표할만하다.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월정사는 삼국시대 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세웠다고 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오대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을 방문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했었다는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 북한 묘향산 보현사 13층석탑.

자장율사와 문수보살은 말하자면 애증의 관계라고나 할까? 평생에 걸쳐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친견했다고도 할 수 있고, 못 했다고도 할 수 있는 다소 애매한 상황이다. 자장은 중국 오대산 청량사에서 문수보살을 뵙기는 했지만, 문수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분이 문수보살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또한 신라의 오대산도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알려줘 자장으로 하여금 오대산에 들어가 수행하도록 했지만, 막상 문수보살이 그를 만나자고 불러낸 곳은 ‘갈반지’, 지금의 정선 정암사였다.

약속대로 문수보살은 정암사의 자장을 찾아왔지만 남루한 옷차림에 죽은 개를 삼태기에 메달고 왔으니, 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그럼에도 자신을 못 알아본 자장을 책망하며 문수는 떠나버렸다. 그래서 직접 문수보살을 문수보살로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날아가 버렸고, 심지어 자장은 충격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까지 하다. 문수보살은 왜 자장에게 이렇게까지 가혹한 시험을 했던 것일까?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아예 나타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에 의상대사(義湘大師)를 더 높이 부각시키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설화 속에서 자장을 폄하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하간 그는 문수보살을 뵙는데 실패했고, 원효(元曉) 역시 관음보살을 뵙는데 실패했다. 오로지 의상대사만 성공했으니 역사적으로 보면 최후의 승자는 의상이다.

여하간 월정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그 흔적만 뵙고 온 문수보살 친견에 재도전하기 위해 자장율사가 신라에 세운 거대한 불교테마파크였다. 아마도 자장율사 당시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자장의 뜻을 이은 왕족·승도들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기본 컨셉이 자장율사에게서 비롯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자장율사 당시에는 이렇게 거대한 탑이 세워진 사찰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사 발굴 결과 그렇게 오래전으로 올라가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초막 같은 수행공간만 있었고, 그 외에는 자연 그 자체로서 성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지금 만날 수 있는 월정사의 기초는 범일(梵日, 810~889) 문하의 두타승(頭陀僧) 신의(信義)가 자장율사의 수행처에 세운 것이었으며, 후에 수다사(水多寺)의 장로 유연(有緣)이 크게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팔각구층탑은 대체로 유연의 중창 때 세워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연이 어느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월정사탑의 건립 연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가장 올려보는 견해는 두타승 신의가 월정사를 세운 이후, 빠르면 9세기, 보통은 10세기 무렵, 결국은 고려초기 건립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 근거는 우선 중국과의 교류관계 속에서 보면 월정사탑과 유사한 형태의 탑들이 중국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오대~북송 초기인 10~11세기 무렵으로 비견되기 때문이다. 이들 탑들의 특징은 팔각형 평면의 목탑을 석탑으로 충실히 번안하였다는데 있다. 즉, 전탑 형태보다는 목탑의 흔적을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941년에 세워진 복건성의 숭묘보성견뢰탑(崇妙保聖堅牢塔)과 같은 오대 시기의 불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목탑을 완전히 정교하게 모방하여 1250년 세운 천주 개원사(開元寺) 쌍탑보다 과감한 생략이 보여서 월정사탑에 보다 가깝다. 월정사탑 봉안 유물 중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과 같은 예도 고려와 밀접하게 교류했던 오월(吳越, 907~978)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어 그러한 추측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 중국 복건성 복주시 숭묘보성견뢰탑. 941년. 높이 35m.

▲ 중국 복건성 천주시 개원사 쌍탑 중의 서탑인 인수탑(仁壽塔), 1250년. 높이 44m.

그러다가 1983년 평창 수항리의 한 사지에서 ‘태백곡 수다사’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월정사 중창의 주체 유연이 주석했다는 수다사의 위치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어 1987년에는 ‘대정(大定) 28년’ 명문이 적힌 금동촛대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1188년이 된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유연은 수다사에 도둑들이 창궐하여 이를 피해 월정사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1188년까지 수다사가 운영되고 있었다면, 아직 월정사가 창건되기 이전일 것이다. 이것은 월정사의 창건이 1188년 이후, 즉 빨라도 12세기를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2004년에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가 간행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월정사탑 아래에는 현재의 기단 아래로 또 하나의 넓은 기단이 묻혀있으며, 그 안에서 12세기초에 사용된 북송(北宋)의 숭령중보(崇寧重寶)가 발견되었고, 더불어 조선 중기로 편년되는 백자편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월정사탑은 최소한 12세기초 이후에 세워졌고, 현재와는 다른 위치에 세워져 있다가 조선 중기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 고려 전기로 편년되는 월정사탑 앞의 공양보살상.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이전되어 있다.

혹자는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월정사탑은 다른 곳에서 이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이었으며, 연대는 조선 중기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월정사 주변에 현재의 자리 말고는 이렇게 큰 탑을 세울만한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이렇듯 대략 10세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년을 가지게 된 월정사탑은 미술사학계의 이슈로 부각되었다.

문제는 다양한 자료들이 발굴, 출토될수록 문제는 복잡해지는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결정적 단서로 판단해서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나 건축물인 경우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시간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므로, 아무래도 모든 단서들을 종합하여 서로 다른 양상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조선시대 건립설은 조선 중기 백자의 출토를 토대로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탑이 옮겨왔을 가능성은 부인한 것인데, 실제 옮겨올 만한 자리가 없는 것은 맞지만, 대신 위치는 그대로일지라도 탑이 중간에 해체되었다가 다시 세워졌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발굴결과는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오직 백자편 하나로 다른 모든 자료를 무시할 수는 없다.

12세기설은 수다사 청동촛대의 발견 및 숭령중보의 발견으로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월정사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인 민지(閔漬, 1248년~1326년)의 ‘오대산사적’에서는 월정사 탑 앞의 보살상을 금강연에서 솟아올라왔다고 신비롭게 기술하였다. 또한 고려의 문인 정추(鄭樞, ?~1382)는 “자장의 오래된 사찰에는 문수가 있고, 탑 위에는 천년동안 새가 날지 않았네”라고 하여 마치 월정사탑을 천년고탑처럼 읊고 있다. 이렇듯 13~14세기의 인물들이 불과 100여년 전의 사찰의 내력을 몰라 이렇듯 신비롭게 묘사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추정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11세기에는 최소한 월정사탑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듯 싶다. 편년의 근거가 되었던 수다사도 평창 외에 강릉 등 몇 군데 동일한 이름을 사용했던 사찰이 있고, 평창 지역에서 월정사탑을 세울 정도의 후원세력이 활동했던 시기, 그리고 틀림없이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탑 앞의 보살상의 양식적 특징, 중국 불탑들과의 양식 비교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기존의 11세기설이 가장 무리가 없다고 판단된다.

월정사 탑을 계승한 팔각형의 탑들이 조선시대에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초 세조와 연관된 양평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그리고 그 인근의 묘적사 팔각칠층석탑이 대표적인데, 세조는 특히 진신사리 신앙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주목된다. 우리나라 진신사리 신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자장율사의 월정사와 이들 조선 초기 팔각탑과의 묘한 인연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21호 / 2015년 12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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