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금강산 수바위-성인대-화암사
23. 금강산 수바위-성인대-화암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5.12.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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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새벽 품은 산사, 하얀 침묵에 들다

▲ 한겨울 푸른 새벽 산사에 달 하나 걸려있다.

'북금강 남설악' 들었다
해금강 너머로 툭 던질

선기 가득한 절로 초대
'숲은 제 스스로 거둔다!'


설산(雪山)에 걸린 시린 달 벗 삼아 푸른 길 걷는다. 새벽 공기 차지만 피는 뜨겁다. 아니, 쿵쾅거린다. 금강산 가는 길 아닌가.

변산반도 의상봉 동편 절벽에 걸린 암자(불사의방)서 수도하던 진표 율사.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 받은 직후 금산사와 법주사 창건하고는 금강산에 이르러 동쪽에 발연사, 서쪽에 장안사, 그리고 남쪽 신선봉 아래 지금의 화암사(禾巖寺)를 세웠다. 신선봉은 금강산 1만2천봉 중 제1봉. 지금은 설악산 북주 능선에 포함된 봉우리로 기록하지만 한반도 허리가 잘리기 전까지만 해도 남으로 힘차게 뻗어 내려온 금강산 줄기. 길이만도 60Km에 이르는 이 산 종주하려 할 때 남녘서 시작한 나그네가 처음으로 올라야 할 봉우리고, 북녘서 시작한 나그네가 마지막으로 밟아야 할 봉우리다. 지금 그 길을 걷는다.

▲ 한국 선사들의 대자유가 올곧이 새겨져 있는 시비.

일주문에 들어서니 길가에 서 있는 제법 큰 돌 하나 어렴풋 보인다. 다가가 빛을 비추니 제 모습 드러낸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 구나’

한국 대표 선지식 일타 스님 오도송이다. 가만, 저 앞에 큰 돌 또 하나 서 있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말 들으매 온 우주가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는 경허 선사 오도송에 이어 ‘지금 대낮에 닭 울음소리 듣나니, 대장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서산 대사 오도송도 있다. ‘북금강 남설악’ 통째로 들었다 해금강 너머로 툭 던져버릴 만한 선기를, 하늘 길 걸어내려 온 눈송이도 숨죽여 땅 밟는 이 고요한 새벽에 마주하게 하다니! 그 누구의 배려인가. 시비는 절까지 이어질 터.

▲ 설악산 달마봉서 시작된 여명은 이내 금강산 화암사로 퍼져 밀려왔다.

그렇다. 시비 끝나는 곳에 절 있다. 길 떠날 때부터, 미시령 넘어설 때도, 따라오던 벗은 신선봉 넘기 전 숨 한 번 고르려는 듯 구름에 안겨 쉬고 있다. 수바위로 난 길로 들어선다. 어찌 보면 계란 바위에 왕관바위 하나 더 얹혀 있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야수에 올라 탄 장수처럼 보이는 수바위. 멋진 바위라서 빼어날 ‘수(秀)’요, 바위 꼭대기 중앙에 큰 웅덩이 있어 물 수(水) 붙여 ‘수바위’라 한다지만 이건 다 산 사람들 이야기일 뿐 절 사람들에겐 가당치 않다.

▲ 수바위 여명.

진표 율사가 창건(769년)할 때 이 절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다. 절 역사를 기록한 문헌은 이렇게 전한다. “화엄이라 한 것은 화엄대교를 강론하여 인천(人天)의 여체(餘滯)를 씻어내셨기 때문이다.… 율사께서 ‘화엄경’으로 신도 100명을 교화하니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31명이요, 그 나머지 69명은 돈오무상(頓悟無上)을 얻었다. 그러므로 절 이름을 화엄사라 했다.”

진표 율사를 비롯한 대덕고승들이 주석하던 도량이지만 심산유곡에 자리한 터라 먹을 양식은 늘 부족했다. 어느 날 정진하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바위에 작은 구멍 하나 있다. 지팡이 넣고 세 번 흔들면 끼니 때마다 두 사람 먹을 만한 쌀이 나올 것이다.” 절 인근 바위라 하면 지금의 수바위뿐. 바위로 올라가 구멍에 지팡이 넣고 흔드니 정말 2인분의 쌀이 나왔다. 어느 날, 절 찾아온 객승이 이 일 지켜보고는 ‘여섯 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며 구멍에 지팡이를 집어넣었더랬다. 객승의 욕심 알아차린 바위는 쌀을 삼키고 피를 토했다. 바위가 다시 쌀을 내주었다는 소식은 그 이후 영영 들려오지 않았다. 저 바위는 그 때부터 ‘쌀 바위’란 뜻으로 ‘쌀 수(穗)’자를 써 ‘수암(穗巖)’이라 불렸고, 저 절의 원래 이름 ‘화엄사’도 ‘쌀 바위 절’ 이란 의미의 벼 화(禾)자를 써 ‘화암사(禾巖寺)’라 부르게 되었다.

▲ 수바위서 바라본 화암사 전경. 오른쪽 끝에 서있는 정자가 찻집 ‘란야원’이고, 왼쪽 끝 암자가 영은암. 저 암자 뒤 산길 따라 오르면 설산 상봉에 이른다.

수암 중턱에 올랐다. 거센 바람 휘몰아쳐 온다. 머리와 허리 숙이고 무릎까지 꿇었지만 선인봉서 내려친 세찬 칼바람이 200여개 뼈 깊숙이 꽂혀온다. 물러설지언정 굴복할 순 없다. 머리 들고 허리 폈다. 아, 동녘 끝 달마봉에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붉은 빛 서쪽 화암사를 향해 쭉쭉 퍼져 밀려온다. 장관이다! 돌아보니, 어느 새 붉은 빛이 산사를 휘감았던 푸른 새벽을 거두어 가고 있다.

도량 서쪽 끝에 자리한 암자가 영은암이고, 동쪽 끝 예쁜 집이 ‘청정찻집’ 란야원(蘭若院). 조선의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을 편찬한 김병학이 ‘금강산 신선봉’이란 시 한 수 지을 때 분명 란야원처럼 예쁜 정자에 올라 저 신선봉 바라봤을 것이다. ‘붉은 난간’이라 시어를 썼기 때문이다.

▲ 미륵불 서있는 용화도량서 대웅전으로 난 길이 정갈하면서도 시원스럽다.

‘굽이굽이 맑은 물 붉은 난간 감싸 흐르고/ 옥피리 소리 가을의 푸른 하늘(벽락·碧落)서 들려오네/ 서른 두 봉우리 있으나 신선은 안 보이고/ 흰 구름만 빈 배 가득 채우니 구슬프다’

산자락에 솟아난 암봉과 그 위 펼쳐진 흰 구름 어우러진 풍경이 그려진다. 이 멋진 풍광 앞에 선 그는 왜 구슬퍼할까? ‘벽락’이란 신선이 사는 푸른빛 안개 가득한 신비한 공간. 그곳으로부터 인 바람소리를 옥피리 소리로 들을 줄 알았던 유생 김병학은 정녕 신선봉 자체가 신선인줄 몰랐던 것일까? 그 스스로 산을 올라 ‘내가 신선!’이라 한 번 외쳤다면 저 산 온몸으로 품지 못한다 해도 결코 구슬퍼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성인대 서니 설악의 울산바위 웅대하게 다가온다. 고개 돌리니 속초요, 고성 땅이고, 이마에 손 올린 채 눈 가늘게 떠 보니 푸른 동해도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엔 설악의 울산바위, 오른편엔 금강의 성인봉. 화암사,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니 두 태산을 품고 있음이다.

성인봉과 화암사로 하산하는 갈림길. 이런, 입산금지 푯말 서 있다. 2003년 8월 설악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된 후 화암사서 상봉,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멸종위기 1급인 산양과 2급인 삵의 서식지여서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신선봉 오르고 싶은 유혹 떨쳐내기 어렵다. 누가 지키고 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시간 정도 오르면 닿을 봉우리다. ‘딱 한 번만 외면할까!’ 하는데 저 아래 ‘쌀바위’가 이른다. “발길을 돌려라.”

▲ 성인대서 바라본 울산바위.

신선봉 밀어낸 만큼 화암사는 더 안겨온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산사 그윽하다. 오늘 지나 하루 더해지고, 또 하루 얹어지면 산사는 더 깊은 ‘하얀 침묵’에 잠길 터. 가을 내내 뽐냈던 화려한 단풍도 제 스스로 거둘 줄 아는, 마지막 남은 단 한 개의 열매와 잎까지도 철저하게 내려놓은 숲이 있기에 화암사는 적멸에 든다.

나그네 마중한 일주문 저 멀리 보인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도 시비 서 있다.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이니라’ 월산 스님 열반송이다. 열반송 새긴 시비 저 일주문까지 이어지겠지. 산 오르다 깨쳤다면 내려오는 길에 열반에 들어 보라는, 아니 하산 후의 홀가분한 마음 하나라도 잘 간직해 일주문 나서라는 어느 선사의 당부인 듯싶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편액, 눈 맞은 손돌바람에도 두 기둥에 의지한 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금강산을 품은 문이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화암사 주차장. 일주문을 지나 2.7km 오르면 화암사 매점에 닿는다. 매점 맞은 편에 수바위로 난 산길이 있다. 수바위서 다소 가파른 산길을 30여분 오르면 퍼즐바위고, 여기서 다시 30여분 오르면 성인대에 닿는다. 500m 거리에 신선봉과 화엄사 갈림길이 있다. 갈림길서 화암사까지의 하산길은 1.5km. 수바위서 화암사로 이어지는 산길 총 길이는 4.1km이며 2시간이면 충분하다. 

이것만은 꼭!

 
용화도량: 대웅전 앞 탑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14m 높이의 미륵대불이 서 있다. 대불 뒤편은 높이 7m 길이 45m에 이르는 화강암 장엄불이 조성돼 있다. 속초 시내와 동해안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삼성각 : 삼성각 안 벽에는 금강산 천선대, 상팔달, 세전봉, 삼선대 등 금강산의 풍경이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시비 : 한국 선사들의 대자유가 올곧이 새겨져 있는 시비다. 오르는 길 오른 쪽에 오도송이,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열반송 시비가 서 있다.

 

 

 

 

 
수바위 : 수행하는 스님에게 쌀을 내주었다는 ‘쌀바위’를 지날 때 꼭 바위에 올라가 보기 바란다. 화암사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새벽에 닿았다면 달마봉과 울산바위에 펼쳐지는 일출을 볼 수 있다.

 

 

 

 


[1322호 / 2015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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