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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의상대사와 화엄 오도 심각하다”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12.07 17:57
  • 수정 2015.12.10 15:56
  • 댓글 10

이찬훈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기고
소설 ‘발원’ 강신주씨 해제문 비판
원효와 의상은 나이 초월한 도반
한쪽 패자로 폄하하는 것은 ‘유치’
화쟁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글
‘황당 소설’ 안 됐는지 돌아봐야

이찬훈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가 12월6일 철학자 강신주씨가 김선우의 소설 ‘발원 : 요석 그리고 원효’(민음사)에서 의상대사를 폄하한 것과 관련해 이를 반박하는 글을 법보신문에 보내왔다. 이 교수는 기고문에서 “원효와 의상은 8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초월해 끊임없이 서로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평생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도반이었다”며 “원효와 의상도 꼭 대립시켜 놓고 그들 사이의 우월을 가려 한쪽은 승자로 찬양하고 다른 쪽은 패자로 폄하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 유치함이 놀랍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비록 해제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기획된 글에 화쟁의 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글이 실려 한국 불교의 위대한 사상가인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에 대해 많은 대중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유감스럽다”며 “(강신주씨의 글이) 근거 없이 위대한 사상가를 모독하고 그를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한 사람으로 모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공연히 상처를 주는 ‘넋 나간 황당한 소설’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찬훈 교수는 부산대 철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예문서원), ‘불교의 미를 찾아서’(담앤북스),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 ‘한 권으로 읽는 동양미학’ 등 저서 및 역서들과 ‘불이사상과 불교미학’ ‘화엄의 불이사상과 과정 형이상학’ ‘화엄경 보살사상의 현대적 계승’ ‘불교예술에서 화엄경의 활용가능성에 관한 연구’ 등 불교 관련 논문도 많다. 편집자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에 대한 강신주의 황당무계한 폄하와 매도에 대하여

이찬훈(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 이찬훈 인제대 교수
강신주는 김선우의 소설 ‘발원 : 요석 그리고 원효’의 해제로 쓴 글 ‘소설가의 데뷔 기회를 박탈당한 철학자의 행복한 넋두리’라는 글에서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에 대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폄하와 매도를 행하였다. 강신주의 글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법보신문의 이재형 기자가 ‘철학자 강신주의 의상 비하와 오만’이라는 기자칼럼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필자는 이재형 기자의 칼럼을 통해 강신주의 글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그걸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는 그동안 화엄사상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2014년에는 범어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사보인 ‘금정’에 ‘의상대사의 자취를 따라’라는 기획 연재 글을 통해 총 6회에 걸쳐 의상대사의 생애와 자취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필자는 불교사상 그중에서도 특히 화엄사상은 심각한 위기와 파국에 직면해 있는 현대문명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문명을 열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과 실천의 지침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의상대사는 ‘법성게’ 등을 통해 그러한 화엄사상의 요체를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간결하게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상사에서는 물론이요 세계사상사에서도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 서 있는 필자로서는 소위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강신주의 글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상상력을 동원해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에 대해 일방적인 폄하와 매도를 행함으로써 대중들을 심각하게 오도할 위험성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그러한 위험성을 지적하고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강신주의 글 1절에서 의상대사 및 화엄사상과 관련된 주장을 살펴보자. 강신주는 대학원 시절에 웬만한 일이면 그저 논쟁했고 반드시 그 싸움에서 이기려고 했으며, 그중 특히 기억에 생생한 것이 원효와 의상이란 두 구도자 중 누가 우월한지 싸웠던 경험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에 의상을 깎아내리고 원효를 높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하면서, 지금도 역시 원효가 의상보다 탁월하다고 믿는다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 그는 심지어 원효를 좋다고 하는 사람은 너무나 영민하게 보이며, 반대로 의상이 더 탁월하다고 하는 사람은 멍청하다고 판단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강신주는 의상을 폄하하고 원효를 높여야만 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들고 있다. 그 이유로 우선 그는 의상이 권력 지향적이었던 데 반해 원효는 민중지향적이었으며, 의상이 가문과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유학을 다녀온 진골 출신의 해외파 학자인 반면 원효는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은 육두품 출신의 국내파 학자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의상이 전한 불교의 가르침은 가짜이며 (자유와 사랑이라는) 인문학적 가치에 부합되지 않는 반면 원효의 가르침은 진짜이며 인문학적 가치에 부합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는 의상이 신라 왕실의 이익을 우선함으로써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승려로서의 서원을 배신했기 때문에 가짜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의 자유와 사랑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강조했으므로 의상의 불교 사상은 인문학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의상의 10개 사찰이 모두 국경 외곽에 세워진 국가의 초소 역할을 했으며 의상은 오늘날의 안기부적 소명 의식의 화신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의상은 국가 권력의 비호로 화엄 10찰을 건립하고 그 주인으로서 권위를 행사했으며, 중생들 속에 들어가 동고동락하면서 중생을 구제하기는커녕 숭배와 존경을 받으며 중생들 앞에서 그들을 이끌려고만 한 권위적인 인물이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원효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춤과 노래, 술과 여자도 마다하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민중들과 어울리면서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불교의 가르침을 설파한 진정한 자비의 화신이었다.

의상대사에 대한 이토록 놀라운 폄하에 이어서 강신주는 화엄사상에 대해서도 지극히 편협하고 일방적인 비난을 행한다. 그는 ‘일즉다, 다즉일’의 이념을 표방하는 화엄사상은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라는 파시즘적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전체주의 사상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와 통일신라, 그리고 현대 일본의 제국주의에서 화엄 불교를 그렇게 좋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강신주의 글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자. 우선 철학이 반드시 무슨 사상가들끼리 싸움을 시켜놓고 그들 사이의 우월을 판정해야 하는 것인 양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원효와 의상도 꼭 대립을 시켜놓고 그들 사이의 우월을 가려 한쪽은 승자로 찬양하고 다른 쪽은 패자로 폄하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 유치함과 천박함이 놀랍다.

물론 여러 철학자들은 어떤 문제를 놓고 사상적으로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철학사상마다 서로 다른 관점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논점과 가치를 갖고 있으며, 강조하는 바가 달라서 한 곳에서는 어떤 점을 배울만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부족한 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배울 점이나 부족한 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승패를 가리고 자기가 승리를 선언한 쪽은 진짜요, 패배했다고 선언한 쪽은 가짜라고까지 몰아붙이는 그 독선에서야말로 자신의 견해만이 진리이며 상대방의 견해는 모두 오류라고 단언하는 파시즘의 망령이 떠오른다.

원효와 의상은 8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초월해 끊임없이 서로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평생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도반이었다. 분명 원효는 선배로서 초기에 의상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이후 선후배로서 또한 동시에 도반으로서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던가는 그들이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두 차례나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시도했었다는 기록을 통해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두 번째 당나라 유학 길 도중에 각자의 길을 개척해 나가게 되었지만,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에도 둘 사이의 교류와 깊은 우정이 계속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서로 각자의 사상영역을 개척해 가면서도 뗄 수 없이 친밀한 우정과 교류 속에서 중생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사상을 정립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위대한 두 사상가가 동시에 이 땅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상가를 대립시켜 한쪽은 높이고 다른 쪽은 폄하하며, 한쪽은 진짜요, 다른 쪽은 가짜라고 내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어떤 것들을 둘로 나누고 부당하게 차별하는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원효대사의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다양한 사상들이 각기 갖고 있는 진리적 요소들을 모두 포용하고 회통시키는 화쟁사상이다. 원효와 의상 사이의 편 가르기와 차별은 이런 불교와 원효대사의 가르침에도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의상이 진골 출신의 귀족으로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왔으며 또한 귀국 후에는 왕실의 후원으로 여러 사찰을 건립하여 화엄사상을 전파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의상이 ‘권력지향적’이었고, ‘신라 왕실의 이익을 우선함으로써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승려로서의 서원을 배신’했으며, ‘인간의 자유와 사랑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강조했다’고 단언하며 비난할 수는 결코 없다. 단지 출신 성분과 유학했다는 사실, 그리고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논리인가? 만일 그렇다면 동서고금에서 그런 부당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의상대사가 왕권의 강화보다는 백성들의 편에 서고자 했으며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일화를 통해서도 능히 알 수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이 경성(京城)을 새롭게 보수하는 역사를 일으키려고 할 때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염려한 대사는 반대의견을 펴 공사를 중지시켰다. 또한 ‘송고승전’에 따르면 대사는 그를 존경한 왕이 전답과 노복을 내리자, 불법은 평등하여 위아래와 귀천이 없이 함께 살아간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의상이 귀국하여 활동하던 당시의 신라 상황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거쳐 삼국이 통일되고 당을 몰아내는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미 이루어진 통일국가 속에서 불쌍한 모든 중생을 불심으로 감싸 안아 구제하고 교화하여 불국정토로 이끄는 것이었다. 의상대사가 여러 곳에 사찰을 세우고 화엄사상을 널리 펼쳤던 것은 중생구제의 이런 사명의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상대사의 노력을 국가와 정권의 안위를 위해 음지에서 일하는 안기부와 같이 교묘하게 위장하여 오직 신라 왕실만을 위해서 봉사한 것으로 폄하한 데 이르러서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고 만다.

▲ 이찬훈 인제대 교수는 강신주씨의 의상대사 평가와 관련해 “(그는) 근거 없이 위대한 사상가를 모독하고 그를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한 사람으로 모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공연히 상처를 주는 ‘넋 나간 황당한 소설’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림은 의상대사 진영.
화엄사상에 대한 강신주의 일방적인 비난 역시 지극히 편벽된 시각을 보여준다. 일찍이 화엄사상이 전제왕권의 이념적 뒷받침을 하였으며, 당나라의 화엄사상은 측천무후의 전제정치에 유용한 역할을 하였다는 주장이 일본 학계로부터 제기된 바 있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화엄사상이 봉건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그럼으로써 모순과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변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의상대사의 활동과 화엄사상에 대한 강신주의 폄하는 그러한 주장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적인 왕조체제나 제국주의 체제 아래서 지배계급에 의해 화엄사상이 당시의 사회체제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어느 정도 이용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상이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어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 사상 자체를 비판하고 부정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동서의 여러 위대한 종교와 철학 사상 가운데서 지금까지 지배계급에 의해 오용되지 않은 사상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만약 오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사상을 모두 부정해 버린다면 인류의 위대한 사상적 자산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우주와 인생에 대한 매우 포괄적이고 심원한 철학과 종교 사상은 다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운용이 가능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는 해석하고 활용하는 주체에게 달려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법이다.

강신주가 말한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는 화엄사상의 핵심은 불교의 연기설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모든 존재들이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원융무애한 불이(不二)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엄사상은 오늘날 현대문명 속에서 중생들이 맞이하고 있는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해 나갈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위대한 세계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화엄사상이 갖는 그러한 의미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여유는 없지만, 필자는 이미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충분히 밝힌 바 있다. 시대적 제약과 일부 오용된 사례에도 불구하고 화엄사상은 의상대사의 전교 이후 한국불교를 이끌어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의 존재론적 실상을 제대로 밝혀주면서 그들의 삶을 이끌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 중 하나는 의상대사 이후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뤄 온 화엄사상을 현대 사회에서 중생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과 모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강신주의 글 2절은 승려의 수준은 여인의 연정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선묘 낭자를 뿌리친 의상과 요석 공주를 받아들여 아들까지 낳은 원효 중 누가 더 훌륭한 인물이냐고 또 다시 선택과 평가를 강요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이하의 절에서 강신주는 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제시한다.

강신주는 ‘송고승전’에 전해오는 ‘선묘와 관련된 의상의 스캔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의상이 등주에 머무는 동안 그와 선묘 사이에는 격렬한 감정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강신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의상이 국가 대표 승려가 되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선묘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지위와 기득권을 안전하게 보전하였기 때문에 정말 보잘 것 없는 남자라고 비난한다. 더 나아가 강신주는, ‘삼국유사’에서는 ‘송고승전’에 전해오는 선묘 낭자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국가 불교의 이념에 사로잡혀 역사의 왜곡을 넘어 자신의 이념에 맞지 않는 사실의 삭제까지 감행한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강신주는 상상력을 한껏 펼치며 ‘요석과 원효 사이의 스캔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그것은 김춘추가 민주주의적 혁명을 꿈꾸며 권력에 맞섰던 원효를 파괴하기 위한 덫으로 요석을 이용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강신주는 원효가 그런 김춘추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요석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자비를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강신주는 이런 자신의 상상력에 기초해 일연은 그런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악마적인 편집 능력을 구사하여 왜곡하며 원효를 낮추었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일연을 비난하며 화를 낸다.

‘송고승전’에 전해오는 의상과 선묘 낭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적이고 설화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어서 전체적인 진실을 알기가 어렵다. 또한 ‘송고승전’에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기록이 적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연대사가 ‘삼국유사’에서 그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의상이 당나라로 건너가 머물렀던 곳조차 ‘송고승전’과는 달리 등주(登州)가 아니라 양주(揚州)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고승전’의 그런 단편적이고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에 근거해서 의상대사를 한 여인의 순정을 짓밟고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지위와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째째한 파렴치한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고인을 심하게 모독하는 일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동원하여 김춘추와 요석 그리고 원효의 관계를 해석하고, 원효가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적 혁명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을 파괴하려는 권력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자비행을 실천함으로써 불교를 삶에서 실천하는 부처가 되었다는 강신주의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왈가왈부하려 하지 않는다. 인류의 공적이거나 중생에게 해를 끼친 죄인도 아니고, 더욱이 온 중생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위대한 사상을 제시한 인물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동원해 찬미하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불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인물에 대해 심한 모독이 되는 비난을 가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정말로 엄격한 검토를 거쳐 확증된 분명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불명확하고 부족한 기록과 과잉된 상상력에 의거한 의상대사에 대한 강신주의 비난이야말로 분명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강신주는 그의 글 3절에서, 오늘날 유학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유명 대학의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상이 당나라로 가던 도중 깨달음을 얻은 원효를 따라 신라로 되돌아오지 않고 굳이 당나라로 유학을 간 이유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의상은 화엄종의 2조인 지엄의 실질적인 후계자라는 지위를 얻고 돌아와 화엄종을 국가 불교의 이념으로 삼아 국가 불교의 중심자로 권세를 누렸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신주는 오늘날 학문적 열정으로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과 구도의 열정으로 먼 이국땅까지 찾아가 치열하게 공부하고 수도했던 의상대사의 구도의 역정을 싸잡아 조롱한다. 물론 유학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리 탐구보다는 그럴듯한 자격증을 따서 출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누군가를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하려 했다. 그렇다면 원효 역시 자격증을 따서 출세하기를 도모한 사람이었는가? 원효는 당나라로 가려다 도중에서 깨달아 돌아섰다. 그것은 원효의 깨달음이지 의상의 깨달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상도 원효를 따라 덩달아 돌아설 이유는 없다. 그는 그 자신의 길을 가야만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의상대사는 자신의 구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의상대사는 중국에 가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화엄사상을 널리 펼침과 동시에 관음신앙과 미타신앙도 널리 전파하여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동안의 반목과 갈등으로 찢겨있던 민심을 화합하여 중생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 서 노력하였다.

강신주는 그의 글 5절에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나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면서, 원효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고 함으로써 여기서도 역시 원효와 의상을 대립시키며 원효가 의상보다 사상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제발 공부를 좀 해서 두 사상가의 사상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를 제대로 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원효와 의상은 각기 사상적 특징을 갖고 있다. 원효의 흥미를 가장 강하게 끌면서 그의 사상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우선 무엇보다 유식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원효는 자장 등을 통해 유식학을 접하고 있었는데, 자장이 신라로 귀국한 직후인 645년에 중국에서는 현장이 인도로부터 신유식학을 들여와 널리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유식학에 관심이 많았던 원효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유학하고자 했던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비록 도중에 유학을 하지 않고 돌아왔지만 그 후 유식학에 대한 깊은 천착은 원효 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유식학을 깊이 연구한 원효는 독자적인 깨달음을 통해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융회하여 종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원효는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지양하여 종합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여래장사상의 대표적 경론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통해 자세히 밝혔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깨달음의 이론적 근거를 밝히고 공유의 대립을 회통시킨 원효는 그것을 실천적인 체험으로 살려나갈 수 있는 길을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밝혔다.

원효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부분은 화엄사상이다. 일찍이 낭지와 자장 등으로부터 화엄사상을 접했던 원효는 화엄사상이야말로 불교사상에서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것은 불교의 여러 사상의 위치를 그 자신의 기준에 따라 판정한 교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불교사상 모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사상적 위치는 서로 다른 4교로 구분하였는데, 그 중에서 우주 전체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높은 경지의 가르침을 일승만교(一乘滿敎)라고 부르며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화엄사상을 꼽았다. 원효는 그의 사상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인생의 후반기에 자신의 화엄사상을 가다듬어 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은 현재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화엄의 세계는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의 ‘초술대의’에 나오는 일다불이(一多不二) 및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일심세계와 통하는 것이며 그것을 우주적 차원으로 넓혀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원효의 이 ‘화엄경소’의 내용은 의상 화엄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법성게(法性偈)’의 내용과도 완전히 상통한다. 원효는 독자적인 사상의 행로를 거치면서 불교사상의 최고의 경지인 화엄사상에 도달하고 그것을 그 나름대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원효의 화엄사상의 완성과정에는 의상과의 사상적 교류도 큰 역할을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몇 가지 기록에 따르면 원효는 당나라에서 화엄사상을 배워 체득하고 돌아온 의상과의 교류를 통해 자기의 깨달음을 확인하고 미진한 부분은 보완하면서 자신의 화엄사상을 완성시켜나갔다. 이 때문에 원효의 화엄사상은 그 나름의 특색을 가지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의상의 화엄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당시 다양하게 갈라져 있던 불교사상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체계화한다는 이론적 과제와 그것을 바탕으로 불교를 널리 전파해 백성들이 고통의 바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불교의 대중화라는 실천적 과제를 치열하게 추구해 나간 선지식이었다. 그리고 원효와 평생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도반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의상 역시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의 중심을 세우고 화엄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통해 대중을 교화하려 했던 또 한 명의 선지식이었다.

이 위대한 두 사상가들 중 누군가로부터 깊은 감명과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녕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각자의 아름다운 인연에 의한 것이리라. 하물며 그 두 분의 선지식 모두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두 사상가의 위대한 사상을 탐색하는 일은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수많은 선지식을 찾아 보살도와 보살행을 배워나가는 구도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 위대한 선지식들 사이에 우열을 정하고 서열을 매기고, 서로를 대립시켜 싸움을 시키고 승패를 정해 누군가는 진짜로 숭배하고 누군가는 가짜로 매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필자로서는 둘 가운데 누가 낫고 누가 진짜인가를 정해놓고 그 가운데 자신은 더 낫고 진짜인 사람을 좋아하니 영민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상종조차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자기자랑을 위한 것 이외에는 도저히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비록 해제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기획된 글에 화쟁의 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글이 실려 한국 불교의 위대한 사상가인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에 대해 많은 대중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유감스럽다. ‘소설가의 데뷔 기회를 박탈당한 철학자의 행복한 넋두리’가 근거 없이 위대한 사상가를 모독하고 그를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한 사람으로 모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공연히 상처를 주는 ‘넋 나간 황당한 소설’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러나 이번 일이 오히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상대사와 화엄사상에 대해 더 많이 탐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우리들에게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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