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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엔이, ‘잇펜쇼닌에덴’

기자명 조정육

“정토왕생은 나무아미타불 명호 염불하는 순간 이뤄진다”

▲ 엔이(圓伊), ‘잇펜쇼닌에덴(一遍上人繪傳)’(부분), 1299년, 비단에 색, 38.2×802cm, 일본 교토 칸키코지(歡喜光寺).

대학원 다닐 때였다. 도서관에서 일본미술전집을 뒤적거리는데 독특한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다니. 놀라웠다. 인물상의 주인공은 스님이었다. 당시에 제작된 대부분의 초상조각이 좌상(坐像)인 데 반해 그 인물상은 입상(立像)이었다. 짚신을 신은 스님은 배꼽까지 늘어뜨린 징을 목에 걸고 오른손에는 징을 칠 방망이를, 왼손에는 사슴뿔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입이었다. 스님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입 앞에 6명의 작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게 뭘까. 스님이 입김을 불어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장면일까. 아니면 스님이 허공중에 떠다니는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걸까. 궁금해서 설명문을 읽어 보았다. 그렇게 구야(空也,903~972) 스님과 나는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정토종에 출가한 잇펜 스님
일본 전역 유행하며 가르침
어려운 이론·교리 설파 대신
춤과 염불 통해 불법 홍보

30여 년 전에 내가 본 조각상은 ‘목조구야상인입상(木造空也上人立像)’이었다. 구야 스님은 헤이안(平安)시대 때 활동한 둔세승으로 질병이 만연한 도시를 걸으면서 징을 치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했다. 그의 염불은 귀족들을 위해 히에이잔에서 행해진 ‘산속의 염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자신이나 귀족들만을 위해 염불하지 않았다. 그는 계급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연민하는 마음에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고 다녔다. 그는 개인구제를 위한 포교가 금지된 시대에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일반서민들을 위해 염불을 전파했다. 그의 보살행은 포교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포교와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위해 도로를 정비하고 우물을 파고 다리를 놓는 등의 민중구제 사업을 병행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아미타히지리(阿弥陀聖)’ 혹은 ‘이치히지리’(市聖:거리의 성자)라고 불렀으며 그가 판 우물을 ‘아미타정(阿弥陀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구야 스님이 염불을 할 때면 ‘나무아미타불’ 6자가 6체의 아미타불로 변해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전해진다. 그 전설을 200여년 뒤에 태어난 천재 조각가 코쇼(康勝)가 들었다. 코쇼는 카마쿠라(鎌倉)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 운케이(運慶)의 4남으로 아버지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구야 스님이 염불할 때마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가 여섯 구의 아미타불로 변한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이렇게 해서 구야의 입에서 6체의 아미타불 소상이 튀어나오는 기상천외한 형식의 ‘목조구야상인입상’이 탄생되었다. 6체의 아미타불은 ‘나무아미타불’ 6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염불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의 형상화다. 허공에 뜬 6체의 소상은 금침으로 입과 연결된다. 이 조각상은 로쿠하라미츠지(六波羅蜜寺)에 소장되어 있는데 비슷한 작품이 쇼곤지(莊嚴寺)에도 소장되어 있다.

잇펜(一遍,1239~1289) 스님을 얘기하면서 구야 스님에 대한 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잇펜 스님의 사상적 원류가 구야 스님이기 때문이다. 구야 스님에서 시작된 염불은 호넨 스님과 신란 스님을 거쳐 잇펜 스님에게 이어졌다. 이들 모두 정토왕생을 위한 수행방법으로 염불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염불을 향한 사람들의 신심은 깊어지고 논리는 정교해졌다. 그 결정체가 잇펜 스님이다. 정토왕생에 대한 세 사람의 논리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차이가 있다. 호넨 스님은 생전에 열심히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임종 시에 아미타부처님이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신다고 했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수많은 ‘아미타내영도’가 제작되었음은 이미 살펴보았다. 반면 신란 스님은 아미타내영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지금 한 생각, 아미타부처님의?원력을 믿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왕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믿음을 내는 순간에 왕생이 결정되므로, 굳이 아미타부처님께서 왕생자를 맞이하러 수고롭게 내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잇펜 스님은 내영이니 불래영이니 하는 논리마저도 간단히 뛰어넘어 버린다. 그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하는 순간 왕생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하는 순간 그 명호가 왕생하기 때문이다. 즉 나무아미타불이 왕생한다는 뜻이다. 신란 스님이 믿음을 중시한 데 반해 잇펜 스님은 믿음이 없어도 염불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염불하는 순간 정토왕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로써 호넨 스님과 신란 스님에서 시작된 정토왕생사상이 잇펜 스님에 와서 정점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잇펜 스님은 10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정토종에 출가한 것으로 처음 불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출가와 환속 그리고 재출가를 거듭하면서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 전역을 평생 유행(遊行)하며 염불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가마쿠라(鎌倉)에서의 도시민 구제에 집중했다. 그는 포교할 때 춤을 추면서 염불하였는데 이것을 유야쿠염불(踊躍念佛) 혹은 오도리넨부츠(踊念佛)라고 한다. 염불에 가락을 붙여 징이나 호리병박을 두드리며 추던 춤염불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춤염불은 구야 스님이 가장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구야넨부츠(空也念佛)라고도 하는데 잇펜 스님이 세운 지슈우(時宗)에 의해 널리 퍼졌다. 춤염불은 기아나 질병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어려운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염불을 통해 불법을 전하기 위한 포교방법이었다. 잇펜 스님은 춤염불과 함께 후산(賦算)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후산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결정왕생육십만인(決定往生六十万人)’이라 적힌 부적을 나눠주는 것이다. 여기서 60만명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염불을 하고 부적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왕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돈 받고 판 부적이 아니다. 부적을 받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우리 동네에 잇펜 스님이 오셨단다. 드디어 스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사는 형편은 팍팍해도 전생에 지은 복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잇펜 스님같이 훌륭한 성인을 친견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설렌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집 밖으로 나왔다. 말 탄 사람, 우차를 탄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한산했던 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잇펜상인에덴(一遍上人繪傳)’은 잇펜 스님의 생애를 그린 에마키(繪卷)다. 에마키는 두루마리그림을 뜻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호넨 스님 편에서 살펴보았다. 잇펜 스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춤염불과 민중구제 사업을 병행한 결과 250만명 이상이 귀의했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닐 때면 항상 사랑하는 제자들이 동행했다. 그 중 제자이자 동생인 쇼카이(聖戒)는 스승의 전기를 썼고, 화가 엔이(円伊)는 스승의 행적을 12개의 두루마리에 48장면으로 묘사했다. ‘잇펜상인에덴’이 바로 엔이의 작품으로 1299년에 제작했다. 스승이 입적한 지 10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엔이는 스승의 행적을 그리면서 단순히 스승의 모습만을 그리지 않았다. 스승이 방문한 장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자세하게 스케치를 한 다음 이것을 바탕으로 에마키를 그렸다. 특정 지역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계절의 변화와 가옥과 논밭 등을 꼼꼼히 그려 넣었다. 또한 잇펜이 가는 곳마다 만났던 귀족, 무사, 상인, 농부를 비롯해 심지어는 거지와 여행객까지도 시시콜콜 그렸다. 그 결과 ‘잇펜상인에덴’은 스승의 성스러운 자취임과 동시에 그 시대를 증언하는 훌륭한 풍속화가 되었다. 아무리 위대한 선사라도 그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저작물이 남아 있지 않을 경우 그는 역사에서 잊혀지기 쉽다. 그런데 잇펜의 행적은 엔이가 그린 ‘잇펜상인에덴’이 있어 글보다 더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을 길에서 산 잇펜 스님은 51세 되던 1289년 8월에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전부 태워버렸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명호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내 교화는 내 일생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 제자들의 교화는 제자들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내가 죽고 나면, 나의 문제(門弟)들은 장례의 의식을 행하지 마라. 들판에 내다 버려서 짐승들에게 베풀어주라”고 유언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수행자의 삶을 보면서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잇펜 스님과 구야 스님의 염불의 뿌리가 원효 스님의 무애춤에 가 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문헌과 구전에 따르면 원효 스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무애(無碍)춤을 추며 염불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문헌상의 기록일 뿐이다. 춤염불의 원조인 위대한 원효 스님의 모습은 현재 그림이나 조각 등 그 어떤 예술품으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는 잇펜 스님을 비롯한 호넨 스님, 신란 스님 등 수많은 스님들의 삶의 자취가 여러 점의 그림과 조각으로 남아 있다. 일본미술사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부러움과 아쉬움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찰 치고 원효대사, 의상대사와 연관 없는 사찰이 없다. 명함 좀 내민다 하는 사찰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두 분을 개산조로 하거나 창건주 혹은 중창주로 한다. 그 절들이 모두 진짜 두 분과 연관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황룡사와 분황사 그리고 낙산사와 부석사처럼 정확하게 두 분의 수행처를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찰도 분명히 있다. 반면 두 분과 전혀 관련 없는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명성에 편승해가려는 사찰도 수두룩하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왕이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고승을 끌어들여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찰이 정말 두 분과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만 정통성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두 분과의 인연을 언급했으면 그분들의 뜻을 현양하고 기리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를 개산조로 하거나 창건주 혹은 중창주로 한 사찰에서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물로 증명해야한다. 그런데 말만 무성할 뿐이다. 그 많은 사찰에서 원효대사나 의상대사의 동상이나 진영(眞影)을 모시거나 그분들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제작해 보존하는 사찰이 몇이나 될까. 이제부터라도 아무 관련 없는 분들의 이름만 도용하지 말고 이름 사용권을 지불해야 한다. 그만큼 두 분 이름을 팔아먹었으면 이제 저작권료를 돌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우리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다. 도대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같은 분을 잊고서 어떻게 중생구제를 논하고 화엄학을 언급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불화를 그린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입이 닳도록 부탁한다.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같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조사들의 생애를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말이다. 불은을 입은 불자라면 부처님의 혜명을 이은 조사들의 생애를 당연히 그림으로 남겨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작가들에게만 호소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생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그만 두고서 의무에만 충실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어느 시대고 뛰어난 예술작품은 항상 위대한 주문자가 있어 탄생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사찰이나 뜻있는 후원자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기록으로만 남은 위대한 고승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분들의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그런 아름다운 일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면 좋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22호 / 2015년 12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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