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4. 법현(法顯)-하

기자명 성재헌

파미르 고원, 새하얀 준령이 끝없이 펼쳐진 그곳은 은세계(銀世界)였다. 그 언저리에서 감탄하고 돌아서는 사람에겐 일생에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장관이지만, 꼭 넘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겐 두려운 한빙지옥(寒氷地獄)이었다. 법현 일행은 변변한 준비도 없이 그 세계로 들어섰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굉음이 울리고,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모래와 자갈들이 날렸다.

한빙지옥과 같은 파미르고원
도반들 넘지못하고 주검으로
목숨걸고 30여국을 순방하며
불적 참배 후 삼장 모아 귀국

그 눈보라의 장막을 뚫고 이어진 산길은 좁고 험준했다. 한참을 돌고 돌아야 겨우 한 길 올라서고, 아찔한 계곡과 절벽을 넘어야만 다시 이어지는 길었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돌산에서 맞닥뜨린 절벽, 천 길 깎아지른 그곳에는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쇳덩어리처럼 반질반질한 절벽,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어지러운 그것은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절벽을 깎아 만든 비좁은 통로와 구멍만 있는 사다리를 기어올라 그 관문을 넘어서야 했다. 그렇게 넘어선 무쇠의 장벽이 700여 곳이나 되었고, 외줄을 의지해 건넌 계곡이 수십여 곳이었다.

불굴의 의지도 설산의 칼과 방패 앞에서는 무릎 꿇어야 했다. 동지인 혜경(慧景)이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쓰러졌다. 매서운 찬바람을 등에 지고 서로의 체온으로 독려했지만 혜경은 일어서지 못했다. 이빨이 부딪치는 신음 틈새로 혜경은 말했다.

“어서 가십시오.”
“스님을 두고 어딜 갑니까.”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함께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눈물이 얼음으로 맺혔다. 법현 일행은 싸늘한 벗의 시신을 버려두고 길을 재촉해야 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고서야 402년 서북인도에 도착하였으니, 장안을 출발한 지 3년만이었다. 부처님 나라에 도착한 법현 일행은 30여 국을 순방하며 부처님의 유적지에 참배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왕사성(王舍城) 인근에 다다랐다. 이른 새벽, 법현은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셨던 영취산(靈鷲山)으로 향했다. 그러자 머물던 절의 주지스님이 손을 붙잡고 만류하였다.

“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진 곳입니다. 왜 그런 곳에 가려고 하십니까?”
“설산을 넘어 수만리 길을 걸어온 것은 영취산(靈鷲山)에 참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는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법현이 합장하고 조용히 말하였다.

“스님의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스님, 목숨은 기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쉰 숨조차 다시 들이쉬는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스님, 여기 오기까지 제게 쉬운 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해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도 왔는데, 어찌 여기서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법현을 만류할 수 없자, 주지스님은 건장한 두 승려를 딸려 보냈다.

독수리바위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법현은 부처님의 옛 자취에 가슴 설레며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상상의 나래를 편 그의 두 눈에는 부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완연하였다. 어둠이 내려앉고 따라온 두 승려가 하산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법현의 예배는 그칠 줄 몰랐다. 건장한 두 승려는 두려움에 떨다가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섰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다가왔다. 사자는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법현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하며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사자가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하였다.

“만일 나를 잡아먹을 생각이거든 내 독경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다오. 그게 아니라 그냥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바로 물러가는 것이 좋으리라.”

사자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부처님의 유적지를 두루 참배한 법현은 중인도에서 여러 부의 경률론 삼장을 수집하였고, 실론을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tjdwogjs@hanmail.net
 

[1322호 / 2015년 12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