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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성덕대왕신종

기자명 신대현

가장 아름다운 소리 간직한 우리나라 범종 최고의 걸작품

▲ 성덕대왕신종.

미술과 음악은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서로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인 것 같다. 미술작품을 아름답게 느끼는 요소 중 하나가 색(色)인데, ‘색은 눈으로 보는 음악’이라는 말도 이를 뒷받침하는 듯 하다. 예술을 감상할 때 ‘보고 들으면’ 이 둘의 상승효과가 커지는 것은 여러 연구로 밝혀져 있다. 음악연주회를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 안에서 갖거나, 미술교육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 음악을 함께 들려주어 작품의 이해를 높이려는 시도도 그래서 종종 이뤄진다. 그런데 이렇게 미술과 음악이 서로 어우러지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둘이 곧 하나가 된 것, 다시 말해서 미술 작품 자체가 악기인 것이 있으니 바로 범종(梵鍾)이다.

인류가 발명한 최고 악기 ‘범종’
771년 조성된 성덕대왕신종은
불교문화 꽃피운 황금기에 조성
경덕왕대 시작해 혜공왕대 완성

‘에밀레종’ 설화로 알려진 것은
신라 문화 폄하 위한 일제 의도
안전 위해 타종 중단돼 아쉬워

범종은 인류가 발명해낸 악기 중에서 가장 크고 또 아름답다.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야 저마다 특색이 있으니 서로 비교해 더 좋고 나쁨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범종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퍼져 내려오는 그윽한 울림 같다는 게 듣는 사람마다 한결같은 느낌이다. “사방에 짙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깊은 산 속에서 길 잃은 나에게 힘을 준 것은 불빛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고 저 멀리 골짜기 너머 산사에서 흘러나오던 은은한 종 소리였다.” 30년 동안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범종목록을 만들고 또 여러 범종 논문을 발표해 범종 연구의 지평을 넓혔던 미술사학자고 김희경(金禧庚, 1923~2012) 선생의 회고다. 그가 만든 범종목록은 사찰 문화재에 대한 일제조사가 아직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2000년 무렵까지 범종에 관한 가장 방대하고도 정확한 자료로 꼽혔다.

▲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우리나라 범종 중에서 최고 걸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바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인데, 상원사 범종과 더불어 걸작의 반열에 놓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일명 ‘봉덕사 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지금 경주박물관 뜰의 종각에 걸려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간 숱한 곡절을 거치며 여기까지 왔다. 이 종이 처음 완성된 것은 통일신라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인 8세기, 771년이다. 주조 직후 경주 봉덕사(奉德寺)에 봉안되었지만, 1460년 봉덕사가 수해로 폐사되자 영묘사(靈廟寺)로 옮겨졌고, 이후 영묘사마저 폐사되자 1488년 경주 부윤 예춘년(芮椿年)이 경주읍성 남문 밖에 있는 신라 고분 봉황대(鳳凰臺) 옆에 별도로 종각을 짓고 거기서 보관토록 했다. 그 뒤 1915년 경주박물관의 전신으로 현 경주문화원 자리에 있던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졌고, 1975년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지어지면서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 성덕대왕신종 비천 탑본.

이 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나 된다. 이 범종은 ‘구리 12만 근’으로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요즘 단위로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지만 너무 무거워 측량을 제대로 못하다가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전자계측기를 동원해 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초대형 작품이면서도 전체 모양이나 세부의 무늬들은 다른 미술작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극도의 장식미를 띠고 있으니,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악기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이 종은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8세기 중반의 걸작이다. 경덕왕(재위, 742~765)은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종을 만들게 했다. 성덕왕과 경덕왕 부자(父子)가 통치했던 시대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로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 조선의 영조와 정조에 비견될 만한 임금들이다. 그러나 금관이나 감은사 사리장엄처럼 세계사에 우뚝할만한 공예작품을 만들어낼 정도로 금속기술이 뛰어났던 신라에서도 이렇게 거대하고 정교하게 디자인된 종을 한 번에 만들기 어려웠는지 쉽게 성공하지 못했고 여러 차례 실패했다. 경덕왕은 임종하면서도 이 종을 끝까지 완성토록 당부했고, 뒤를 이은 혜공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드디어 771년에 완성했다.

범종은 크게 맨 위의 용뉴(龍鈕)와 그 아래의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범종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가 맨 위의 용뉴다. 한 마리 또는 두 마리 용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고 등에 원통형으로 생긴 용통(甬筒)을 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서 우리나라 범종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부른다. 기계공학자들에 따르면 범종 소리가 유달리 그윽하고 울림 있는 것은 음성학에서 볼 때 ‘맥놀이 현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종을 쳤을 때 나오는 소리는 이 용통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대부분 종 아래로 퍼져 나온다는 연구도 있다.

▲ 성덕대왕신종 구연부 무늬.

용통을 내려와 몸통 맨 위에는 연꽃 9개씩을 놓고 그 주위를 띠를 둘러 공간을 나눈 연곽(蓮廓)이 사방에 배치되어 있다. 연곽 안의 연꽃봉오리는 상원사 범종이 돌출된 데 비해 두 겹으로 된 연꽃으로 표현된 게 다르다. 성덕대왕신종의 아름다움은 몸체 중앙에 새겨진 천인상(天人像)에서 극대화 된다. 상원사 범종 등 다른 범종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비천상(飛天像)인 게 보통인데, 여기서는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고 않아 향로(香爐)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든 자세인 게 독특하다. 천인 주위로는 모란당초무늬가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듯 하고 옷자락도 허공을 향해 흩날리고 있다. 막 하늘에서 내려와 향공(香供)하는 천인의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표현된 것이다. 맨 아래 종구(鍾口)와 바로 그 위에 있는 띠(帶) 역시 밋밋한 직선이 아니라 여덟 번의 굴곡을 두어 변화를 주어 처리한 점도 독특하다.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에 생기는 여백은 당초무늬를 연결시켜 짜임새를 높였고, 당목으로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마저도 주변을 보상화 무늬로 장식해 아름다움을 더 했다. 이 범종을 만든 이유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인데, 이런 아름다운 범종의 그윽한 소리를 듣는다면 그 누구라도 극락왕생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좌와 천인상 사이에 범종을 조성한 동기와 과정 그리고 관계자들의 이름을 적은 1037자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대단히 빼어난 솜씨의 이 문장은 한림랑(翰林郎) 김필오(金弼奧)가 지었다. 학문을 주관하던 부서의 최고 벼슬인 한림랑의 글답게 천 자가 넘는 글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 그 문장이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무릇 지극한 도(道)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없어서 보고도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그윽하고 커다란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고 있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빌려와 삼진(三眞)의 깊은 의미를 알리기 위해 신종을 걸어둠으로써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범종인 것이다(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 其原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是故 憑開假說觀三眞之奧 載懸擧神鍾 悟一乘之圓音 夫其鍾也).”

▲ 1915년 봉황대에서 경주고적보전회로 옮기는 장면.

이 글은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 역시 아주 뛰어나다. 글씨를 쓴 사람은 김부환(金符晥)과 요단(姚湍)인데 두 사람 모두 신라 최고의 명필가였음에 틀림없다. 또 이 글 중에는 종을 만든 장인(匠人)들의 이름도 나온다.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 박종일(朴從鎰)을 비롯해서 차박사(次博士) 박빈나(朴賓奈)·박한미(朴韓味)·박부악(朴負岳)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천 여 년 전의 예술가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어, 이들은 우리 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인물들이다. 특히 장인을 일러 ‘박사’라 칭한 것은 신라가 기술인에 대해 얼마나 큰 존경을 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범종 주조의 막후에는 성덕왕의 아내이자 효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역할이 컸다. 만월부인은 왕실을 대표해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석굴암 조성에도 커다란 공을 세웠으니,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에 못잖은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다고 할 만하다.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 종’으로 유명하지만, 종에 새겨진 명문의 제목이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니 정식 명칭은 이렇게 불러야 맞을 것 같다. 봉덕사에서 이 종을 만들 때 아무 것도 시주할 게 없는 가난한 사람이 돈 대신에 바친 아기를 종에 넣어 만들었고, 종 칠 때마다 죽은 어린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나온다는 전설에 따라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전설은 일제강점기에 신라의 문화와 불교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1980년대 이후 범종 연구자들의 확신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전설이 존재하지 않았고, 또 20여 년 전 구조 분석을 했을 때 뼈의 주성분인 인(燐)이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을 봐서도 이런 전설이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우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박사는 성덕대왕신종에 대해 ‘신라의 신종’(통도사박물관)이란 책을 낼 만큼 평소 깊은 애정을 보였다. 그는 이 범종과 상원사 범종에 표현된 용뉴를 문헌과 함께 살펴본 결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곧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전설의 피리가 조형화된 것이라는 탁견을 펼친 바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만파식적에는 감춰진 신라 역사의 한 자락이 묻어있다.” 선생이 평소 자주 하던 이야기다.

이 범종은 1992년까지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면 어김없이 서른세 번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줬다. 그러다가 2001~2003년까지 세 차례를 제외하고는 안전을 위해 타종이 중단되었다. 고요한 달밤에 퍼지는 만파식적 피리소리마냥 그 아름답고 우아한 소리가 언제까지 온 국토를 감싸 모든 사람들이 다 편안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  buam0915@hanmail.net

[1322호 / 2015년 12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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