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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형기의 낙화

기자명 김형중

이별 아픔 긍정적으로 읊은 절창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인생 가장 큰 일인 죽음을
아름답게 지는 꽃에 비유
꽃 피고 지는 게 자연이듯
만남 헤어짐 반복이 인생

이별과 죽음 그리고 지위나 권좌에 대한 미련과 집착은 인간의 집착 중에서 제일 크다. 땅에 떨어져도 아름다운 꽃잎처럼 이별할 때 쿨하게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이 있다. 그럴 때는 서로 떠날 줄을 알아야 멋있다. 포기할 줄을 아는 마음이 아름답다.

집착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서 인연 따라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로서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임을 깨닫는 가르침이 ‘금강경’에서 설하는 이상불(離相佛)이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지옥에서도 연꽃이 핀다. 세상 어느 곳 고향이 아닌 곳이 없다.

죽더라도 갈 때까지 가서 죽고, 못 잊어 집착하여 몸도 마음도 모두 상하여 비극에 이르는 어리석음이 있다. 죽음을 맞아서 천상병 시인처럼 “소풍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때 이 세상 아름다웠오” 하고 떠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고 멋있다.

꽃은 순간에 피었다가 온 몸으로 살다가 바람 따라 사라진다. 꽃은 지는 꽃잎도 아름답다. 시인은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하였다. 너무도 애상적이고 슬프다. 그러나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고 읊었다. 그렇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 법이다. 예쁜 꽃이 자태를 드러내기를 너무 오래하면 그만 때를 놓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다음 오는 세대를 위해 기꺼이 의자를 비워줘야 한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대사인 죽음에 대한 이별을 아름답게 지는 꽃에 비유한 ‘낙화’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죽음의 슬픔을 초월할 수 있는 여유와 지혜를 주고 있다. 사람은 주위에서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인생에 대하여 철이 들고 성숙해간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자연의 이법이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반복이 인생이다.

이형기(1933~2005)는 17세에 등단하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다니면서 그의 시 세계를 철학적인 깊이와 불교적 너그러움과 수용으로 확장시켰다. ‘낙화’는 시인의 감수성이 가장 섬세할 때인 20대 초반에 쓴 시이다. 여성적인 감수성이 바탕이 되고 있는 시이다.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사랑하는 소녀는 떠나고 눈물 흘리면서 재수할 때 대학입시문제의 단골손님으로 나오는 이 시를 문제집에서 만났다. 실연의 아픔을 견디며 샘터에 물이 고이듯이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을 발견하였다. 이별의 아픔을 긍정적으로 낙화에 의인화하여 읊은 천재 시인의 최고 절창시이다.

사람은 앞모습 관상보다는 마음속에 담긴 심상이 더 중요하고, 떠날 때의 뒷모습인 배상(背相)이 깔끔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답겠는가.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지금 일어나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우냐.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22호 / 2015년 12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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