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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2연기-⑨ 애(愛)

애증은 ‘좋고 싫음’의 선판단이 만든 작용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좋아함·싫어함은 쾌감 따라
끌어당기고 밀어내려는 힘
탐심·진심으로 이어지는 것
지혜란 선판단 버림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올바른 분별

쾌감과 불쾌감의 감수작용은 의식이 내리는 판단이 아니라 의식에 선행하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의식의 작용을 방향 짓는다. 쾌감을 주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좋은 이유를 찾으려 하게 되며, 다른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연결하려 하게 된다. 불쾌감을 주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나쁜 이유를 찾으려 하게 되며, 다른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과 연결하려 하게 된다. 물론 이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한 감각을 더욱더 예민하게 한다. 섬세한 미감은 느낌과 의식의 이런 상호결합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된다.

그런데 내가 접촉했던 것에 ‘좋음·나쁨’의 판단을 의식이 내리게 되면, 이후 내게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도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다. 전에 먹었을 때 ‘좋다’고, 즉 ‘맛있다’고 판단했던 것에 대해선 이후에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고, ‘맛없다’고 판단했던 것에 대해선 이후에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실제 만남 이전에 하는 선판단(先判斷)이 되어 그 만남의 양상을 미리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것도 만나는 신체의 상태나 만남의 조건에 따라 쾌·불쾌의 판단마저 달라지게 하기 마련 아닌가. 심지어 만남이 발생하는 양상에 따라 다가온 것은 물론 ‘기관’조차 다른 것이 될 수 있건만, 만남 이전에 이미 ‘저건 좋은·나쁜 것’이란 판단이 달라붙은 어떤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실제 발생할 사건에 대해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 ‘좋지 않은 음식’, 혹은 ‘싫은 음식’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제대로 맛을 알아볼 수 있을 리 없고, ‘시끄러운 소음’이라고 이미 규정한 음악을 대해, 왜 그런 음악을 만들었는지, 그 음악의 ‘맛’이 어떤 것인지 감지할 가능성은 없다. ‘좋음·나쁨(好惡)’이 자연학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개념으로 독립하게 되면 실제 접촉이나 만남과 무관하게 ‘대상’에 달라붙어 그것과 실제 만남의 실상을 놓치게 된다. 탐진치의 삼독심에서 ‘치(癡)’의 기원이 이것일 것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한 이와의 만남이 좋게 풀릴 리 없다. 이미 만나기 전부터 나쁜 만남으로 만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상을 제대로 보려면, 만남이 발생할 때 일어나는 변용을, 감수작용을 정확히 주시하고 관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좋음·나쁨’이란 선판단을, 접촉 이전에 내린 ‘분별’을 내려놓아야 한다.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선판단을 중단하고,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지혜’란 이처럼 선판단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올바른 판단, 분별심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정확한 분별이다. 조주 스님이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신심명’의 구절을 인용하며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쾌감·불쾌감이란 감수작용이 자연적인 것이지만, ‘좋음·나쁨’의 구별이 이렇게 사태의 실상에서 벗어나 우리를 오도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보편적 개념으로 독립되어 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접촉에서 발생하는 쾌·불쾌의 감수작용은 쾌감을 주는 ‘좋은’ 것을 갖고자 하게 만들고 불쾌감을 주는 ‘나쁜’ 것을 피하고자 하게 만든다. 좋은 것을 계속 가지려는 성향과 나쁜 것을 피하려는 성향, ‘애’와 ‘증’이라고 명명되는 성향이 이로부터 발생한다. 즉 ‘좋음·나쁨’이 이제 ‘좋아함·싫어함’이 되는 것이다. 즉 ‘좋아함·싫어함’이란 쾌감을 주는 것을 끌어당기려는 힘(愛)과 불쾌감을 주는 것을 밀쳐내는 힘(憎)을 뜻한다. 이는 좋음·싫음이란 개념에 사실 내장된 것이기도 하다. ‘좋다·싫다’고 판단하는 순간, ‘잡아당기는·밀쳐내는’ 애증의 힘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상을 보기 전에 이미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도, 조주 스님도 “지도무난 유혐간택” 뒤에 바로 “애증을 떠나면 실상을 명백하게 통찰하리라(但莫憎愛 洞然明白)”고 덧붙였던 것일 게다.

좋은 것을 끌어당기려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마음을 탐심(貪心)이라고 하고,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마음을 진심(嗔心)이라 한다. 애증의 마음이 약간 증폭되면 탐심과 진심이 되는 것이다. 탐심, 즉 좋은 것을 당기려는 마음은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자기 옆에 있는 어떤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상태로 지속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진심, 즉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는 마음은 싫어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마음이고, 자기 옆에 있는 저 싫어하는 것이 사라져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탐심이란 자신이 만나게 되는 것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동일화하려는 마음이라면, 진심이란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자신의 인근에서 배제하거나 제거하려는 마음이다.

김기덕의 영화 ‘빈 집’에서 선화의 남편은 돈을 잘 번 덕에 자기가 좋아하는 예쁜 여자를 아내로 얻는다. 좋아하는 아내의 누드 사진을 크게 벽에 걸어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라고 하며, 싫어하는 옷을 입으면 비난을 하며 입지 말라고 한다. 자기 옆에 두고자 하기에 자기가 왔을 때 항상 집에 있기를 바랐을 것이며, 나가고 없다면 필경 비난을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도록 하며, 그렇지 않았을 땐 심지어 때리기도 한다. 그것을 그는 사랑이라고 알고 행한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이를 자기 옆에 묶어두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자기 뜻대로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생각이나 감각에 동일화하려는 의지다. 정확하게 탐심이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비난하고 때리는 것은, 싫어하는 모습을 아내에게서 제거하고 없애버리려는 진심의 작용이다. 그것은 또 다른 진심을 낳는다. 즉 아내로 하여금 그를 떠나가게 만든다.

탐심과 진심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화와 배제의 힘을 작동시킨다. 좋아하는 이들끼리 모이는 것은 비슷한 신체의 결합으로 능력이 증가하며 발생하는 쾌감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모인 이들로 하여금 집단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동일화하려는 것은 집단적 차원에서 탐심의 작용이다. 이로 인해 이견을 가진 이들을 미워하게 되고 결국 그들을 집단에서 추방하거나 제거하고자 하게 되는 것은 탐심의 이면인 진심의 작용이다. 내부에 있는 이질적인 이들, 혹은 ‘배신자’에 대해 애초의 적보다도 더 미워하여 분개하는 것은 그것이 진심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상쟁과 적대의 근저에는 좋아하는 모습으로 동일화하려는 탐심과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고 제거하려는 진심이 있다.

탐심과 진심은 불쾌감과 다른 차원의 ‘고통’을 야기한다. 세상일이 무상하여 가까이 두려고 해도 멀어지고, 밀쳐내도 다시 만나게 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애초의 불쾌감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과 멀어지는 고통, 싫어하는 것과 다시 만나는 고통, 그것은 두 번째 고통이고, 이중의 고통이다. 애증의 마음, 탐진의 마음이 있는 한, 누구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면하는 길은, 멀어져 가는 것을 억지로 당겨 옆에 붙잡아 두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는대로 떠나보내는 것이고, 갖기 힘든 것을 애써 갖고자 하는 게 아니라 가지려는 마음을 접는 것이다. 반대로 오는 것을 억지로 피하려 하는 게 아니라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사들은 심지어 도를 얻고자 하는 마음 또한 탐심이니, 그마저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던가! 불쾌에 더해진 두 번째 고통에 또 한 층의 고통을 쌓기 위해선 고통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 경우 고통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고통에 더해지며 세 번째 고통을 낳는다. 이 고통 또한 고통을 멀리 밀쳐내려는 진심의 작용임을 알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접촉으로 인한 감수작용에 쾌감과 불쾌감이 동반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지만, 그것이 호오의 범주로 일반화되면 사태의 실상을 놓치게 하는 ‘어리석음’이 발생하고, 거기에 애증의 힘이 더해지면 좋아하는 것과 멀어지고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애증은 자연학적 불쾌감이나 고통과 다른 차원의 고통이, 무지에 따른 고통이 시작되는 본격적인 출발점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역으로 간단하다. 애증의 마음을 내려놓고 탐진으로 이어지는 호오의 분별심(치심)을 떠나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할 만큼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 호오가 쾌·불쾌의 감수작용에 직접 이어져 있는 한, 그걸 쉽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세상일이 쉽지 않은 것이고, 지혜로운 삶은 그토록 멀리 있는 것일 게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22호 / 2015년 12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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