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법 제정이 주는 의미
웰다잉법 제정이 주는 의미
  • 김형규 기자
  • 승인 2015.12.14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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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죽음으로 평가받는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흐트러짐이 없었다면 예사롭지 않은 삶이다. 고귀하고 바른 삶을 산 이들은 대체로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다. 탐욕과 욕망에 찌든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 비루했다. 고귀한 삶으로 포장됐던 이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거나 신에게 구원을 갈구하는 비루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차이는 있지만 삶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완벽하게 초월한 분이 있다.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삶에 대한 애착은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육체가 소멸되는 그 순간까지도 자비로운 미소로 삼천대천세계를 울렸다. 죽음에 관한한 부처님의 입멸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사례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자연스런 죽음 맞을 권리
법적 제도적인 근거 마련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
품위있는 죽음 되새겨야

웰다잉법(Well-Dying,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웰다잉법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법안이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거나 가족이 결정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그렇다고 자살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병이 더 이상 나아질 가망이 없거나, 노환과 같은 자연적인 임종이 명백할 경우 연명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웰다잉법 제정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태로부터 시작됐다. 병원비가 없다는 가족의 요청에 뇌수술 환자를 퇴원시킨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처벌되면서 거센 후폭풍이 일었다. 의사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어 진료에 몰두했고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환자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연명치료에 착수했다. 환자와 가족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됐다. 의식이 사라진 환자에게도 산소 호흡기가 부착됐고 가족들은 환자와의 만남도 차단된 채 천문학적인 병원비에 고통을 겪었다. 환자도 마지막까지 아무도 없는 차가운 병실에서 각종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매단 채 고통에 몸부림치다 임종을 맞았다. 2008년 병원들의 이런 행태에 제동이 걸렸다. 연명치료를 받던 김 할머니 가족이 병원이 연명치료 중단을 들어주지 않자 소송을 벌였다. 대법원은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했다. 웰다잉법 제정의 필요성은 사회적인 화두가 됐다. 보라매병원 사태 이후 18년 만에 결국 집에서 죽을 권리,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웰다잉은 존엄한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사하는 것이 품위 있는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준비할 때 품위 있는 죽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은 온통 살아가는 이야기뿐이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들이 차고 넘친다. 부를 쌓고 탐욕을 키우는 지식들이 대부분이다. 삶에 대한 집착 속에서 죽음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날 느닷없이 죽음을 대면하고 두려움 속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죽음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은 명징하다. 불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윤회(輪廻)의 한 과정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삶의 한 모습일 뿐이다. ‘고승전’에 나오는 수많은 스님들의 죽음은 평소의 삶과 결코 다르지 않다. 좌선을 하거나 경전을 읽거나 염불을 하며 일상의 모습 그대로 삶을 벗었다. 죽음이 삶과 다르지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 김형규 부장
그러나 절 집안에 이런 전통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큰스님들을 병원으로 모셔가 연명치료를 하다 입적에 들게 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큰스님이 남기는 소중한 경책을 산소 호흡기에 넘겨주는 일도 다반사다. 부처님은 죽음을 명확히 인식하면 탐욕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불교에서 부정관을 권하는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웰다잉법  제정을 계기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돌이켜봐야 한다. 불교에서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이며 또한 새로운 시작이다. 결국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웰다잉의 시작이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삶이 곧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겠는가.

김형규 kimh@beopbo.com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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