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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와 비폭력-하[끝]

“테러로 인해 미국에는 고통 나누려는 희망이 싹텄습니다”

▲ 달라이라마의 법회에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온 세계의 불자들이 북인도 다람살라의 남걀사원에서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다.

“엄격하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은 가끔 참으로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폭력으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공은 종종 타인의 권리와 복리를 희생하는 대가인 경우입니다. 결국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은 뿌려지게 됩니다.”

저는 공격을 감행한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9·11 폭력 행위를 감행한 이들도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유사한 일이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일어난다면 아마도 그들도 또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그들도 당연히 그런 괴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미래에 재발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취한 그러한 방법(테러)으로 행동하도록 동기부여를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테러 공격자들이 지지하는 명분이 그 무엇이었든 간에 9·11 공격의 기저에 흐르는 증오와 파괴적인 감정은 그들의 명분에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더 이상 과거에 한 때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모든 개별적인 구성 요소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상에 부합되게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구촌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모든 국가는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다른 국가에 상호 의존하게 됩니다. 환경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경제에 있어서는 국가 간 경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공공연히 적대적인 국가들조차도 세계의 자원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종종 똑같은 강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기도 합니다. 경제적 관계가 상호 의존적일수록 우리의 정치적 관계도 더더욱 상호의존적으로 되어가야 합니다.

전체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개별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상의 상호 의존하는 속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실상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느 특정 지역 사회의 관심사가 더 이상 그 지역의 경계 내부로만 한정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 그 곳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바로 이런 관점 때문입니다. 끔찍한 9·11 사태는 그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했건 전 세계인들로 하여금 테러리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실제로 나타난 것은 테러범들이 추구했던 목적이 사실상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비극의 발생은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인 기운을 결집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의지는 이제 전 세계에 걸쳐 분포하게 됐습니다. 장기적인 예방조치 체제를 구축하는데 이런 합의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 그리고, 다른 파괴적인 감정에 근거해서 과도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는 궁극적으로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폭력적인 대응에 대한 유혹은 이해할만 합니다. 하지만 좀 더 신중한 접근이 더 생산적일 것입니다.

테러와 같은 폭력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세대에 걸친 고통과 불만이 이런 폭력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불자로서 저는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원인과 조건(인연)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원인의 일부는 최근에 나온 것이지만 다른 것은 수십년 또는 수백년 된 것도 있습니다. 식민주의, 선진국에 의한 천연자원의 개발, 차별, 불신, 빈부격차의 확대 등이 그것입니다. 가난과 억압에 대한 오랜 기간의 방치와 무관심이 테러리즘 급증의 원인들 중에 꼽힐 수 있을 것들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충격적이며 안타깝고, 끔찍한 테러 공격은 많은 요인들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테러범들은 누구일까요?

이슬람교도를 테러범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종교도 테러리즘을 용인하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자비, 용서, 자기수양, 형제애 그리고, 자선이 모든 주요 종교의 핵심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가치를 강화시키고, 보편적인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종교적 신념을 왜곡시킵니다. 종교를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하는 위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특정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종교적 분열은 최근에 다시금 위험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다원주의는 현대사회 구조의 한 부분입니다. 불교가 내게는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이나 또 다른 누구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미국은 정말로 평화롭고 개방된 사회입니다. 그 곳에서 개인들은 각자의 인간 창의성과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 이후 미국인들, 특히 뉴욕시민들이 자진해서 기꺼이 서로를 돕고자 하는 의향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이런 높은 의기 즉, 미국의 기상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폭넓은 견지에서 어떻게 최선의 행동을 취할 수 있을 지 냉철히 판단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침착해지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사건은 증오, 근시안적 접근, 질투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수년간 진행되어 온 세뇌의 결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파괴하기 위해 승객을 실은 비행기 전체를 납치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흥적인 부정적 감정에 따른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치밀한 계획의 산물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오로지 더욱 잔인했습니다. 높은 수준의 인지(人智)와 인류가 이룩한 고도의 기술이 어떻게 처참한 결과로 이르게 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건은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 저의 근본적인 신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내적 동기에 놓여있고 또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 함양하고 있는 감정과 태도 같은 것에 달려 있습니다.

폭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뿌리 뽑고자 한다면 먼저 폭력이 어떠한 효용성이라도 있기나 한 것인지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엄격하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은 가끔 참으로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폭력으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공은 종종 타인의 권리와 복리를 희생하는 대가인 경우입니다. 결국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은 뿌려지게 됩니다.

반면에 그 명분이 확고한 논리로 뒷받침된다면 폭력을 행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은 바로 이기적인 욕망 이외의 다른 동기가 없는 경우이거나, 타당한 논증을 통해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라도 정당한 근거를 가진 사람은 하나씩 하나씩 그것을 나열하고, 차근차근 논증해 나갑니다. 반면 합리적인 근거가 빈약한 사람은 곧바로 분노의 먹잇감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따라서 분노는 강력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유약함의 상징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의 내적 동기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동기도 함께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폭력과 비폭력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외형적인 요소만으로 그것들을 분간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동기가 부정적인 경우라면, 그에 따른 행동은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폭력적입니다. 비록 그 행동이 기만적으로 온순해 보일지라도 그렇습니다. 반대로 동기가 진실하고 또 긍정적이지만 주변 환경으로 인해 냉혹한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는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위한 자비로운 배려, 바로 그것만이 무력 사용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전문위원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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