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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힐링 멘토 정목 스님

고통이 밀려오는 순간 연꽃의 싹이 피어납니다

▲ 정목 스님은 ‘다르게 반응하기’와 ‘덕행’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동시에 성불로 나아가는 첫 걸음임을 강조했다.

불자들 만나면 인사할 때 ‘성불하세요’라고 많이 하시죠. 그런데 언제 성불하실 겁니까? 우리가 늘 주고받는 인사법인데 이 인사처럼 내가 언제 성불할 것이지, 언제까지 중생으로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다음 생으로 미룰 수도 없고 바로 이생에서 성불해야 하는데, 정말 언제 성불할 것인가요? 그리고 성불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르게 반응하기’와 ‘덕행’은
해탈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
스스로 선장 되고 경영자 돼
삶을 니르바나로 이끌어야

마음 속에서 분노가 일어날 때  
믹서기로 갈아 버리는 상상하면 
분노의 진흙 속에서 연꽃 필 것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는 부처님의 탄생설화를 보면 마야 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태어나신 부처님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한 손으로는 위를, 한 손으로는 아래를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하리라. 삼계가 모두 고통 받고 있으니 내가 이를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신기한데 동서남북으로 각각 일곱 걸음을 걸으셨어요. 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도대체 이 모든 일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해야 할까요.

설화라는 것은 그 진위에 여부를 떠나 설화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그 종교의 가르침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해석에 따라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 하지만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일어서서 홀로 일곱 걸음을 걸으셨다는 것은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육도윤회의 여섯 걸음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삶에 대한 의미가 ‘일곱 걸음을 걸으셨다’는 상징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면 한 차S원 다른 성불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봉은사다 어디다 다니며 천일기도, 만일기도를 하는데도 이게 뭐가 뭔지 끝이 안 나는 것 같죠.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여기서 한 걸음도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일까. 왜 우리 삶은 이렇게 끊임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고만 있는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가 이런 의문을 가져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두 가지로 요약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겠지만 여러분이 가장 알기 쉽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쉬운 방법으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 “부처님 법 여기 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보였다.

육도윤회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성불입니다. 미루어둔 성불이 아니라 바로 직면한 성불입니다. 한 걸음 내딛는다는 것은 백척간두의 진일보입니다. 그런데 그 걸음 내딛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한 걸음 내딛는 찰나에 닥쳐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맹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한 발 내 딛는 것이 곧 죽는 것 같으니까요. 죽겠는다는 말은 밥 먹듯이 하지만 죽기는 싫은 것이 문제지요. 뭔 말만 하면 내가 살아 뭐하나라고 하지만 그래도 저승사자 오면 아니라고 하죠. 왜요? 육도에 있는 것이 너무 재미있으니까요. 죽겠다는 소리는 빈말인 거죠. 그러니 진일보, 한 걸음이 앞으로 안 나아가는 거예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죠.

이러니 백척간두 진일보 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어마어마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한 걸음 내딛는 방법이야 다양하겠지만 부처님이 보여주신 매뉴얼에 정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다르게 반응해 보자’입니다. 어떻게 반응할까. 내게 마주치는 모든 대상, 모든 감정들에 대해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집에 일하는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하인 중 한 명이 어느 날 아무 연락도 없이 오질 않는 것입니다. 타고르는 평소 약속을 굉장히 중시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하인에게 화가 난겁니다. 화가 잔뜩 나서 오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아무 연락없던 하인이 오후가 되어서야 나타났어요. 그 하인은 아무 말도 없이 평소 일하던 곳으로 가 빗자루를 들고 와서는 평소 하던 대로 청소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걸 보는 순간 타고르는 더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인이 쓸고 있던 빗자루를 뺏어 집어던지면서 ‘이런 식으로 할꺼면 나가버려. 너 같은 하인은 필요 없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하인이 아무 말도 없이 집어던진 빗자루를 들고와 대답을 합니다. ‘주인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실은 어제 저녁에 제 딸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순간 타고르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훗날 타고르는 그 날, 그 느낌을 회상하며 글을 썼습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그 사람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가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고 어떤 마음을 겪고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할 때 내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습관을 고쳤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를 바꾸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백척간두 진일보입니다. 내 방식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납득할 수 없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백 번 천 번을 봐도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안에서 남에게 드러내지 못할,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정말 작고 외로운 영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반응하기, 이것은 바로 여섯 걸음 걸어간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같은 방식으로 같은 패턴으로 반응합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주고받는 말의 패턴이 늘 똑같습니다. 봉은사에 와서 1년을 기도했는데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대학에서 3년을 공부하고 졸업했는데도 내 스타일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똑같이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차원의 반응이라는 것은 써먹어 본적이 없어요. 습관화 돼 있고 매일 썼던 반응이 가장 쉽기 때문이죠. 아이를 대할 때도, 스스로에 대해서도 늘 같은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니 늘 그 자리에 맴도는 사람일 뿐이지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속 터지는 일이 보일 때 마다 먼저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해보세요. 내가 나를 먼저 다잡아야 합니다. 달려 나가는 마음, 채찍 휘두르려는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말이 바로 칼날이 되어서 남을 찔러 버립니다. 입을 붙잡지 못할 때, 내가 보는 방식으로 상대를 봤을 때 사람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두 번째 방법은 덕행을 쌓는 것입니다. 수없이 들은 이야기지만 이 일을 생활 속에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부처님께서는 어느 한 생도 덕행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2600여 년 전 이 사바에 강림하실 때까지, 이 사바에 탄생하셨을 때에도 마지막 입멸에 드는 순간까지 덕행을 행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사슴의 몸으로 탄생하셨던 적도 있고, 사자의 몸으로, 코끼리의 왕으로 태어나신 적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향나무로 태어신적도 있어요. 향나무로 태어나 600년의 생을 사는 동안에는 사방 400리가 넘는 곳에 향기를 전했습니다. 향나무의 향기를 전해 그 향기를 맡기만 해도 심신의 고달픔이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만 생명과 만 중생에게 안식을 주었습니다.

사리불존자는 전생에 벽에 그려진 부처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하시도다. 어떻게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멋진 분 옆에 함께 있을 수 있을까’하며 진실한 마음 한 번 낸 공덕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니르바나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생각만하여도 그 생각이 100% 진실할 때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법화경’에서는 비록 화가 난 상태에서 조차 고개 들어 부처님을 우러러 공양하는 공덕이 크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환희심과 신심으로 우러러 뵐 때 그 공덕은 어떠하겠습니까.

▲ 마음 속 분노를 믹서기로 갈아 하수구에 부어 버리라는 스님의 가르침에 대중은 참회와 동감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경영하는 CEO가 돼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배를 니르바나로 건너가게 해주는 캡틴이 돼야 합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순간에 죄를 안 짓는 것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고 분노심이 치밀 때 욕을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지만 안할 수 있는 것도 나입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안 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요. 내가 욕할 수 있지만, 죄 지을 수 있지만, 흉 볼 수 있지만, 나쁘다고 말하고 시기 질투할 수 있고, 저 사람이 갖은 것을  뺏어올 수 있지만 안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일곱 번째 걸음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근심걱정에 잡혀 삽니다. 자식, 돈, 집안, 죽음, 치매 온갖 것을 걱정합니다. 오늘 치매 아니면 아닌 것으로 끝이면 됩니다. 내일 치매가 오더라도 오늘 아니면 오늘 하루에 감사하면 됩니다. 그 생각 하나가 덕행을 짓는 겁니다. 걱정하느라 공덕 깎아 먹지 말고, 걱정 안하는 공덕 쌓는 하루가 되면 됩니다. 부처님의 법신을 모신 탑처럼 내 안에 공덕의 탑을 쌓아야 합니다. 번뇌 망상에 찌들어서 발걸음이 무겁고 인생살이 자체가 짐처럼 무겁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내게 어떻게 부처님이 오실 수 있으며 그런 눈에 어떻게 부처님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그 어떤 걱정거리도 지나치지 않은 것 없었고, 그 어떤 고통도 이제는 내 앞에서 저 멀리 흘러간 강물일 뿐입니다. 흘러간 강물을 다시 끌어와서 옛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에 매달려있느라 부처님께서 먼저 등불 밝혀 걸어가신 그 길 가는 그것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법이 펼쳐져 있어 귀가 있는 자 들을 것이요, 눈이 있는 자  볼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가르침을 펴주신 부처님 앞에 감동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살면서 여러분에게 정말 힘든 일이 있고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마음에 믹서기를 하나 준비하세요. 분노가 일어나며 눈 딱 감고 ‘믹서기가 여기 있다’ 상상을 하면서 분노를 넣고 입으로 ‘뚜르르르르르’ 하며 갈아 버리세요. 그리고 바로 하수구에 부어 버리세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버리는 거예요. 아시겠죠? 여러분이 갈아버린 그 부정적인 마음 감정은 다 진토가 되어서 그 진토 위에서 연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고통이 오면, 괴로움이 오면, 고통과 괴로움이 더 크면 클수록 마음속으로 생각하세요. 곧 연꽃이 피어나겠구나. 그 한 송이 연꽃이 세상 속에 향기를 전하게 되겠구나라고.

내가 하는 말 하나, 생각 하나, 행동 하나가 고귀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요하고 그 속에서 피어낸 연꽃 한 송이가 온 세상 만방에 향기를 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일곱 걸음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고 삼계개고를 아당안지 하리라’를 내 스스로 외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십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마음자리가 삼계개고를 아당안지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믿는다면 감히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내가 어찌 관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내가 어찌 내 삶을 경영하는 경영자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내 배를 운행하는 캡틴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부디 여러분에게 허락된 이 삶을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여러분 스스로가 불성있는 부처임을 깨닫고 자각하는 사월초파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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