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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계룡산(1) 동학사-오뉘탑-삼불봉-신원사

애잔함 서린 오뉘탑 전설서 ‘계룡의 당찬 선기’를 읽다

▲ 계룡산 해발 615m에 서 있는 오뉘탑(남매탑)에 동녘의 붉은 빛이 들기 시작한다. 7층 석탑이 오라비 탑이고 5층 석탑이 누이탑이다.

“나라 잃은 애환
유독 짙게 배인 산
원통함은 설산에 묻어라
새 전설 써야할 우리다” 

동학사 일주문부터 꽤 서둘러 걸음 했는데도 오뉘탑까지 400m나 남았다. 달 하나, 별 몇 개 나뭇가지 사이로 확연히 보이니 아직 시간은 좀 남았다. 돌계단에 앉아 차오른 숨 크게  한 번 고른다. 삼불봉 아래 상원암 옆 오뉘탑! 달빛 받으면 눈물 흘릴 정도로 아름답다는 말 익히 들었지. 그럼, 한 겨울 동녘서 피어오른 붉은 빛살 내려앉은 풍광은 어떨까! 설렘 가득 안고 서둘러 길을 떠났었다.

어슴새벽 속 오라비탑(7층 석탑)과 누이탑(5층 석탑)은 요 며칠 내린 눈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여명의 빛을 구름이 살짝 가렸다. 수줍게 떠오른 빛이라 해야 하나? 그 빛 들기 시작하니 한 겨울 서 있는 오뉘탑에 애잔함이 더하는 듯하다. 살아생전 나눴을 그 법담 얼마나 많았을까. 그 많은 사리 남겨 두고 적멸에 든 두 사람 오늘은 또 무슨 대화 나누고 있을까? 그들이 나눴을 법담 이리저리 생각하다보니 암자 태운 노파 ‘파자소암(婆子燒庵)’ 화두에 닿는다.

▲ 오늘도 상원암은 오뉘탑 곁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할머님 한 분이 선사 한 분을 20년 모셨다. 어느 날, 자신의 딸에게 이른다. “오늘은 네가 공양구(供養具) 갖고 방에 들어가거라. 그리고 스님 한 번 껴안아 보거라!” 수행 정도를 시험코자 한 연극. 스님이 아침 공양 마치자 딸은 스님을 껴안았다. “스님, 이럴 때 기분이 어떠하세요?” “고목나무가 엄동설한의 차디찬 바위를 기대고 선 것 같고, 불씨가 꺼진 재처럼 따듯한 기운 또한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딸이 그 사실 고하자 노파는 대노하는데 그 일갈 대단하다. “20년이나 속된 맹추를 공양했구나. 흑산귀굴(黑山鬼窟)에 앉은 마귀 더 받들다가 나도 그 놈과 함께 지옥에 가겠다!” 노파는 암자를 태워버렸다.

노파 말이 맞다. 아무런 감정 없는 사람 되자고 수행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를 놓고 혹자는 “처녀 한 번 끌어안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욕정에 끄달리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는 건데 정녕 그럴까?

선사가 ‘고목나무’ 운운하자 노파의 자식답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딸은 한 발 더 나간다.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스님을 사모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정 받아주세요.” 그러자 선객이 호령했다. “나는 도를 닦아가는 스님이오. 내게 있어 여인은 사마외도(邪魔外道)요. 썩 물러가시오.” 노파가 대노한 건 남자와 별 다를 바 없는 여인을 사마외도로 밖에 보지 못하는 극단의 분별 때문 아니었을까?

▲ 관음봉서 내려 다 본 동학사 전경.

오뉘탑 전설 다소 비약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파자소암’ 구조에 넣어보자. 호랑이, 정신 잃은 처녀 암자에 내려놓았다. 깨어난 처녀 상원 스님에게 청혼했다. 상원 스님 어찌했나? 상원 스님도 처음엔 “수도승으로서 부부연은 결단코 안 된다”며 거절했지만 처녀의 간곡한 부탁 수일 지나도 그치지 않자 결국 인연을 맺는다. 그런데 부부연이 아닌 오누이 인연이다. 비구와 비구니의 삶, 한 공간에 살았지만 서로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 아름답지 않은가?

상원 스님도 끝내 “수도승에게 여자란 요물일 뿐”이라 했다면 호랑이가 상원조사의 암자를 부숴버렸을지 모른다. ‘한국의 파암소자’가 회자될 수 있었을지언정 애잔함 속에 담긴 불퇴전의 정진력과 당찬 선기 어린 오뉘탑 이야기는 피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 봉우리가 모두 부처님 형상 닮았다 해 삼불봉(三佛峯)이라 하는데 첫 부처님 머리 위에 섰다. 순간, 함부로 발을 놀릴 수 없다.

▲ 3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형상이 세 부처님 모습과 닮았다 해 삼불봉이라 한다.

옛 선조들이 고향 땅에 흐르는 물 한 줄기, 산 하나에도 각별히 신경 써 이름 지은 이유 알겠다. 사물에 혼을 불어 넣으려 한 것이다.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보라고! 이 봉우리 삼불봉이라 인식한 순간 발가락 하나 어지럽게 두지 않으려 하지 않나? 사물의 이름 하나가 사람 인식을 변화시켜 마음까지 움직이고 있다. 삼불봉은 저 먼 곳에 서 있는 천황봉과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의 웅장함을 강샘치 않고 그대로 안아 주고 있다. 참으로 품 넓은 봉우리다.

관음봉 지나 연천봉 고개 이르러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갑사요, 왼쪽으로 내려가면 신원사다. 오늘은 계룡산 산신제단 중악단이 있는 신원사로 걸음할 참이다. 그 길 가다보면 대나무숲 울창한 곳에 ‘옛 임금’ 백제의 의자왕 기리는 고왕암(古王庵)에 닿을 수 있다.

백제 의자왕!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의 아들(삼국유사)이요 ‘효성 지극하고 우애 돈독해 중국의 증자와 같은 ‘해동 증자’란 별칭(삼국사기)을 얻을 정도로 즉위 전까지만 해도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은 인물. 나라 기운 저물어 갈 무렵 의자왕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쫓겨 계룡산(지금의 고왕암)에 몸을 숨겼으나 결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잡혀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한다.

학계 이야기 하나 들어보자. 2008년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됐다. 예식진은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으로 백제 웅진(공주) 출신 인물이라고 한다. 누굴까? 역사학자들은 1060년 송(宋)에서 편찬한 당(唐, 618∼907년)의 역사책 ‘구당서’ 소정방편에서 ‘예식’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려와 항복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도 이와 유사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여 가니라….”

왕권 강화에 너무 치중해 실권한 책임, 한 나라를 위태롭게 한 책임 왜 없겠나. 그렇다 해도 일흔 줄에 접어든 노인 왕이 3000 궁녀 치마폭서 놀다 제 스스로 항복하고는 한 나라를 통째로 중국에 넘겨줬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인해 조롱거리로 전락할 왕은 아니라고 고왕암이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 명성황후가 재건한 계룡산 산신재단 중악단은 저 신원사 경내에 있다.

지금쯤이면 오뉘탑도 한 낮의 따듯한 햇살 받을 터다. 사실 오라비 탑은 익산미륵사지 석탑을 모방했고, 누이 탑은 정림사지 5층 석탑 모양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

백제 성왕이 웅진(공주)시대를 접고 사비(부여) 시대를 열었을 당시 도성 중심에 정림사가 있었고, 그 도량에 지금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었다. 웅장한 기운과 목탑의 섬세함을 두룬 갖춘 백제문화의 진수라 평가받아 국보로 지정된 그 탑이다. 그런데 그 탑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사실을 비(탑)에 새겼다는 ‘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버젓이 새겨져 있다. 소정방의 백제침략 치적이 1층 탑신 사면을 둘러싸고 있으니 애통할 뿐이다.

상원 스님이 초암 지은 곳에 제자 회의화상이 오뉘탑과 함께 절을 창건한 후 청량사라 했었는데 동학사는 거기서 태동됐다. 비구니스님들의 정진도량인 동학사는 한 때 망국의 한을 달래주는 절이기도 했다. 백제 멸망시킨 신라가 망하자 유차달이 지금의 동학사 자리에 동계사(東鷄祠) 짓고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신라 충신으로 정평난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냈다. 훗날 동계사를 확장한 후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다’ 해서 절 이름을 동학사(東鶴寺)라 했다고 한다.

▲ 관음봉 오르는 계단서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힘차게 뻗어 있다. 성곽을 닮은 능선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해 ‘자연성능’이라 불리는 능선도 저 줄기에 포함된다.

고려 잃은 사람들의 초혼제도 저 산사서 올려졌다. 정몽주, 이색, 길재 삼은의 초혼제가 저 절에서 봉행됐고, 조선의 김시습 또한 사육신의 초혼제를 동학사서 지냈으며, 세조는 단종을 비롯해 자신의 권좌를 빼앗으려다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지었다. 당시의 초혼각은 모두 불탔으나 숙모전이 그 애틋함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 잃은 애환이 유독 짙게 배인 산이다. 그렇기에 또한 그 상처 보듬고 치유하려는 산이기도 하다. 원통함에만 빠져 있으면 새 길을 걸을 수 없다. 나라의 흥망성쇠로 빚어진 그 아린 슬픔들은 저 설산에 묻어야 한다. 그래야 봄에 잔설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새로운 역사 쓰며 새 전설 꽃피울 수 있지 않겠나! 삼불봉과 관음봉이 이 산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계룡산 동학사 주차장. 동학사 일주문을 지나 10여분 걸으면 계곡 옆 세진정에 이른다. 세진정 지나기 전(그냥 지나쳐 무작정 오르면 관음봉 고개에 닿는다) 오른쪽에 서 있는 안내판을 따라 1.6km 오르면 남매탑이다. 삼불봉 고개서 안내판(금잔디 고개로 가면 갑사 가는 길이다)을 확인하고 삼불봉을 오른 후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자연성능. 관음봉을 지나 연천봉 고개에 이르면 안내판을 확인(반대편은 갑사로 가는 길이다)한 후 신원사로 내려오면 된다. 동학사 주차장서 연천봉 고개까지는 약 6.5km.(산행시간 4시간30분) 신원사까지의 하산길은 2.7km. 겨울산인 만큼 종주시간은 6시간30분 정도 잡는 게 좋다. 동학사, 갑사, 신원사는 봉우리 하나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다. 안내판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고개를 넘을 경우 목적지와 다른 절로 내려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것만은 꼭!

 
동학사 3층석탑: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대웅전 앞에 있다. 아쉽게도 옥개석만 남아 있고 탑신은 상실되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신원사 중악단: 계룡산신 제단이란 뜻으로 계룡단으로 불려왔으나 조선 고종 때 묘향산과 지라산 제단을 상악단과 하악단으로 정한 후 두 산의 가운데 있다 해 중악단으로 불려오고 있다. 보물 제1293호.

 

 

 
명성황후 방: 중악단으로 들어서는 대문 옆에 있는 방이다. 명성황후가 중악단 재건 후 기도하며 머무른 공간이다. 숙박도 가능하다.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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