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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투르판 베제크릭 석굴 [끝]

실크로드의 악마들이 폐허로 만든 ‘아름다운 집’

▲ 베제크릭 석굴은 화염산 협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광기 어린 탐험가들에 의해 발견된 뒤에는 갈가리 찢겨져 폐허로 남아 있다.

참혹하다. 짓이겨진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다. 벽에서 파여진 손과 눈, 그리고 처참하게 뜯긴 몸체가 차가운 바닥을 헤맨다. 도려내진 것들이 남긴 윤곽선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날아올 것 같다. 텅 빈 모퉁이 어둠속에서 웅크려있던 유령이 핏물 배인 눈으로 순례자를 노려본다. 그것은 욕망과 광기에 앗겼던 부처님을 되찾으려 100년을 배회해온 과거의 영혼이었다. 탐욕의 잔재를 어루만지며 가련한 영혼들에 말을 건넨다. 부처님이 이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주시길, 함께 기원한다. 인간의 무지를 참회하는 기도가 베제크릭(백자극리극, 伯孜克里克) 31호굴 폐허에 오래도록 울려 퍼진다.

고창국 왕실사원으로 만들어져
20세기 초 대대적인 약탈당해
독일인 르콕, 두 차례 방문해
230여개 상자 분량 유물 갈취

베제크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염산(火焰山) 협곡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고 통행로에 높은 벽까지 설치됐기 때문에 접근은커녕 존재조차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애초에 고창국(高昌國) 왕실 사원으로 조성됐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침입을 막겠다는 목적이었겠지만 실크로드에 위치한 다수의 석굴들처럼 약탈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그 약탈이 비극적일만큼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0세기 초,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은 ‘각국 탐험가들이 펼쳤던 국제적 경쟁의 무대’였다. 중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도둑들이 집안을 활보하는 꼴에 불과했을 터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등의 탐험가들은 실크로드를 샅샅이 뒤지며 다량의 유물을 건져 올렸다. 그 가운데 독일인 폰 르콕이 있었다. 독일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투르판에 탐험대를 보냈다. 2차 탐험대 대장이었던 르콕은 1904년 11월18일 고창에 도착해 베제크릭 석굴 남쪽 끝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석굴들은 수백년 동안 계곡에서 흘러내린 모래에 입구가 막혀있었다. 르콕이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가자 마법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몇 분 전 완성한 듯 완벽하게 보존된 벽화들이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르콕은 동료에게 소리쳤다. “이 벽화를 온전하게 가져갈 수 있다면 탐험은 성공할 것이다!”(폰 르콕 ‘사막에 묻힌 중국령 투르키스탄의 유물들’)

▲ 베제크릭 석굴을 둘러싸고 있는 화염산.

31호굴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턱밑까지 차올랐던 숨을 가라앉히며, 타오르는 화염산을 바라본다. 베제크릭 석굴은 화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요새처럼 견고하다. 입구에서 석굴들이 운집한 테라스에 닿기 위해서는 좁은 언덕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한다. 테라스에 발을 딛어야만 비로소 석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니 ‘잘 숨겨놓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베제크릭은 발견됐고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전락해 갈가리 찢겨졌다. 31호굴 역시 원래는 본행경도(本行經圖), 열반경변도(涅槃經變圖), 공양도 등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탐험가(혹은 도둑)들이 대부분 절단해 버렸고, 그나마 남은 초라한 벽화들도 뜯어가지 못하도록 흙으로 덧칠해버렸다. 안내인이 순례단을 33호굴로 이끈다. 저곳에 들어가면 또다시 붉은 눈의 유령을 만날 것인가.

르콕은 베제크릭 석굴을 통째로 들어내 베를린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착실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는 예리한 칼로 벽화 둘레에 자국을 낸 뒤 곡괭이와 망치로 구멍을 뚫었다. 거기에 얇은 톱을 밀어 넣어 벽화를 벗겨냈다. 잘라낸 벽화는 널빤지와 지푸라기로 단단하게 포장했다. 베제크릭 석굴과 인근 유적지에서 쓸어 담은 유물은 상자 103개에 담겨 베를린으로 보내졌다. 1905년 이곳을 다시 찾은 그는 상자 128개 분량의 유물을 재차 갈취했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르콕 탐험대는 베제크릭에 이런 글을 새겨 넣었다. ‘이 땅의 것들을 베를린으로 옮기다’

▲ 39호굴 내부의 흙무더기. 탐험가들이 제단을 파헤친 흔적이다.

33호굴의 침울한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 대신 너저분하게 엉킨 흙벽만을 볼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의 왕 100명이 열반을 애도하고 있는 벽화는 남아있긴 하지만 바래지거나 벗겨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39호굴은 차마 눈을 뜨고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다. 벽화를 벗기는 기술이 부족했을 초창기의 흔적인지, 떼어냈다기보다 차라리 손톱으로 할퀴다 포기해버린 것 같은 처참함이었다. 게다가 굴 가운데 흙무덤은 제단을 파헤쳤지만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냥 되묻은 흔적이라고 하니, 이정도면 무지라기보다 악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워낙 훼손이 심한 탓인지 안내인의 감시도 느슨하다. 안서(安西) 유림굴(楡林窟),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는 카메라를 만지기만 해도 눈을 부릅뜬 안내인이 손을 휘저어 꽤 난감했었다. 이곳에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도 누구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 손톱으로 할퀸 듯 처참하게 뜯겨진 벽화.

르콕 다음으로 영국의 스타인,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일본의 오타니가 베제크릭 석굴을 방문했다. 이들이라고 달랐겠는가. 각국 탐험대는 이곳을 무(無)의 공간으로 환원시켰다. 남은 것들은 그저 타다 남은 재처럼 바스락거리며 광기 어렸던 그날의 순간을 간신히 상기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탐험가들 혹은 도둑들, 그도 아니면 실크로드의 악마들이 가져간 유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민속학 박물관 관장이 된 르콕은 특별실 13개에 ‘투르판 컬렉션’으로 알려진 전시관을 만들었다. 그는 철제로 만든 틀에 시멘트를 발라 대형 벽화들을 고정시켰다. 15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형 벽화 등을 궤짝에 넣어 이동시켰지만 시멘트가 칠해진 대형 벽화는 그러질 못했다. 그는 대형 벽화에 덮개를 씌우고 모래주머니를 쌓아올렸다. 1943년 11월23일부터 1945년 1월15일까지 이어진 일곱 차례의 폭격이 박물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모래주머니에 눌린 유리가 파편이 되어 흘러내렸다. 르콕이 모래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광채를 뿜어내던 벽화들은, 그렇게 유리에 찢긴 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오타니의 ‘수집품’들은 르콕의 경우와 달리 파손되진 않았지만 세계 각지에 흩어지는 쓸쓸한 신세가 됐다.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던 오타니가 저택과 함께 일부를 팔아버렸고, 또 다른 일부는 채광권을 얻고자 조선총독부에 기증해버렸다. 나머지는 수용할 장소가 없어 만주의 여순 총독에게 증여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실크로드 유물 1700여 점이 보관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 만년설이 녹은 물을 자양분 삼아 자라나고 있는 생명들.

메마른 폐허를 서성이다 심한 갈증을 느끼며 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먹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헐거워진 구름 사이로 햇살이 얼굴을 내밀며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을 녹여준다. 테라스 난간으로 이동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거진 숲이 협곡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아! 이곳에도 생명이…. 시뻘건 흙을 뚫고 솟아오른 짙푸른 생명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라봐주지 않는다 하여도 늘 여기에 있었음이고, 깎고 잘라냈어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음이다. 그 장구한 흐름에 잠시 몸을 맡기었을 뿐이면서도 영원을 꿈꾸다 추락해버리고 마는 것은 미욱한 중생심의 발로에 불과하지 않을는지.

떠남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낯선 곳을 갈망하며 짐을 꾸리지만 막상 당도하여서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함은 왜일까. 딛고 선 자리를 살아내지 못한다면 닿으려는 욕망으로 살아지게 될 터이니, 극락정토에 있다 한들 어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순례라는 이름으로 낯선 장소에 도착해 수많은 순간과 직면했지만 그것들에서 목격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불멸을 꿈꾸며 경계를 짓던, 바로 나 자신이었다. 베제크릭 폐허가 마음을 옥죄었어도 생명은 장구하게 이어질 것이고 시방세계 곳곳에 가지를 뻗어나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제 몫의 삶을 살아낸다면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향유하게 될 것이다. 참담한 흔적들을 더듬는 동안 여위었던 마음에서 자그마한 숨결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 마침내 향기를 전해온다.

▲ 스님들이 순례지에서의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순례단은 다시 열반하시는 부처님이 계셨던 33호굴로 들어가 지도법사 혜총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스님은 “홀로 열반에 드는 게 아니라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발원이 우리가 실크로드를 순례했던 목적”이라며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중생에게 회향하는 삶이 되도록 하자”고 말했다. 텅 빈 모퉁이 어둠속에서 웅크려있던 유령이 일어나 햇살 속으로 걸어간다. 그 뒤를 따라 생명이 넘실대는 세상 속으로, 우리는 그 찬란한 빛의 세계로 천천히 스며들어간다.

늘 자애로운 마음으로 순례단을 품어주신 혜총 스님과 묵묵히 모든 일정을 진행해주신 조계종 교육부장 진각 스님, 그리고 순례단에 행복한 웃음을 선사해 주신 성전 스님 등 50여명 스님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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