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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정진의 지혜로 밝힌 하화중생의 미학

  • 불서
  • 입력 2015.12.21 18:03
  • 수정 2015.12.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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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없는 얼굴’ / 청화 스님 지음 / 인간과문학사

▲ ‘물이 없는 얼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애시당초 우러를
하늘이 없어
그의 얼굴에는
작은 모래 한 알만
떨어져도
동그랗게 파문이 이는 물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하고 순수한 물
이 물이 없는 얼굴에
집을 짓고 사는 벌레가 있는데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피일까? 메뚜기일까?
오늘 매화꽃 띄운 차 한 잔 권하며
사람이 대체 무어냐고 묻고 싶은
저 물이 없는 얼굴, 물이 없이 없는 얼굴들…

                           -‘물이 없는 얼굴’ 전문

전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이 그동안의 수행에서 얻은 지혜를 언어 이전의 언어, 그 비언어적 선어로 드러냈다. 지난 2009년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이은 두 번째 시집 ‘물이 없는 얼굴’을 통해서다.

시로 표상된 공간은 미지의 세계로 불린다. 그래서 수행자의 시 쓰기는 더욱 어려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 미지의 세계를 만나기 위해 마음이 언어화 과정을 초월해야 한다. 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화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는 일은 물론 언어도단과도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언어화 과정에서 일탈한 명상의 차원, 곧 선적 상황에서 언어를 찾을 때 불립문자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터져 나오는 언어가 바로 선시이며 게송이다.

이 언어화 과정을 멈춘 상태를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다. 또 경계도 없고 색과 소리도 없으며 냄새도 없다. 바로 공(空)의 상태이기 때문에 무엇도 담을 수 없고 그 무엇도 버릴 수 있다.

▲ 청화 스님이 ‘사람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시집 ‘물이 없는 얼굴’을 펴냈다.

청화 스님 시는 진아(眞我)의 정체성 탐색과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미학으로 표현된다. 출가 수행자로 살아온 53년의 정진력과 부처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암울한 시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시대의 아픔을 껴안았던 그 마음까지 담았다. 그리고 그 속에 지금 이 시대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흘러가는 데 대한 안타까움까지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물이 없는 얼굴’에서 스님 시의 면목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스님은 ‘물’을 시제로 한 다른 시에서 물을 ‘흘러가는 나’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풀잎처럼 단풍잎처럼” 물에 띄워 보낸 것이 아니라, “갈 것이 다 가고 더 갈 것이 없으면 비로소 동그만히” 남은 ‘온전한 나’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서 ‘삶의 지혜인 불법’을 ‘물’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 ‘물’도 ‘불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물이 없는 얼굴’은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를 확대하면 그 사람들은 양심이 없는 사람, 욕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물이 없는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일까? 불교적으로 돌아보면 수행자로 살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익히고 전하는 데 소홀한 이들이 있을 터이고, 재가불자를 자처하면서도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데는 관심 없이 복만 구하고 목청 높여 남을 비방하며 악다구니 쓰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둘러보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무던히 애쓰는 역사인식 무지자들이나, 상생의 가치를 외면한 채 사회적 약자들을 험지로 내모는 기득권 세력이 그 ‘물이 없는 얼굴’을 가진 이들에 다름 아니다.

스님은 또 “이놈/ 속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았거늘/ 아무 물이나 마시고 살아서야 쓰겠느냐”고 스스로 내면을 살피고 반성하면서 출가자로서의 삶을 담금질하는가 하면, 세월호 침몰의 참사를 애도하면서 “이 나라에 무엇이 있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이기적 모습으로 일관한 기성세대를 경책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그 죄를 고백하며” 자책한다.

출가수행자의 선심과 하화중생의 원력을 만날 수 있는 스님의 시편들에서 불자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문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9000원.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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