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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자의 시작, 보시바라밀

기자명 원빈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5.12.21 18:09
  • 수정 2015.12.21 18:10
  • 댓글 1

며칠 전에 대중들과 함께 ‘금강경’ 사경집에 법보시 참여자의 이름과 발원내용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만 있고, 발원 내용이 없는 법우가 있어서 발원내용을 알기 위해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자신 있고 당당한 발원은
집착 없는 베풂 완성해
환희로운 무주상보시 통해
보시행 즐거움 체득하길

“금강경 법보시 발원 내용을 알려주세요.”
“무주상보시인데 제가 상을 낸 것 같습니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조계종단이니만큼 많은 절에서 ‘금강경’에 대한 강의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무주상보시’라는 수행 덕목을 계속 들어서일까? 많은 법우들이 ‘무주상보시’라는 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상에 사로잡힘으로 인해 보시바라밀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부작용도 가끔씩 목격되는데 이것은 약이 독이 되어버리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여덟의 모음 중 ‘빠하라다 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아수라 빠하라다에게 불법이 가지고 있는 공덕을 바다가 가진 8가지 특성을 통해 비유설법하시는 내용이 있다. 그 중 큰 바다는 점차 기울어지고 점차 비탈지고 점차 경사지지, 갑작스럽게 절벽이 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통해 교법의 차제성을 드러내고 계신다.

해안가에서 바닷물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너무 수심이 깊어져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 같다면 과연 그 바다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서서히 깊어져야 안심하고 편안하게 바다의 즐거움을 느끼고 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교법은 철저하게 차제성을 띄고 있다. 청자가 감당하지 못할 진리의 무게로 그들의 신심을 결코 짓누르지 않는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로 ‘눈 있는 자 누구나 와서 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바로 교법을 믿고 이해할 수 있는 즐거움이 생겨나는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부처님은 초심불자에게 무주상보시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가셨던 인도 사회는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문화가 보편적이었고, 그 형식 또한 형성되어 있었다. 공양을 올리는 자가 수행자에게 성의껏 음식, 약, 옷, 잠자리를 공양하고 그 공양 올린 공덕을 자신의 발원에 회향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공양을 올리면 대체로 자신의 발원을 자연스럽게 수행자에게 말하고, 수행자는 그 발원이 이루어지길 축원해주는 것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보시를 만약 초심자에게 요구한다면 바다 수영에 익숙한 이에게는 상관없겠으나 수영을 못하는 이에게는 갑자기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는 두려움이 되어 보시바라밀의 바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다.

부처님의 방식은 참으로 상식적이고 자상하다. 덧셈 뺄셈을 못하는 아이에게 결코 미적분 풀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덧셈 뺄셈을 잘 했다고 칭찬하시고 북돋아주셔서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공부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앙굿따라니까야’ 넷의 모음 속 ‘숩빠와사 경’에서는 청신녀 숩빠와사의 음식 공양을 받으신 후 그녀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네 가지 공덕을 설법하시어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모든 불자들을 기쁘게 해주신다. 음식을 공양하는 것은 공양 받는 자에게 수명을 주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며, 행복과 힘을 주는 것이기에 공양자 역시 이생과 내생에 인간과 천상에서의 수명, 아름다움, 행복과 힘을 누릴 수 있게 됨을 설법하시니 공양자는 크게 환희롭고 기뻐서 점점 더 환희로운 보시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모든 불자의 시작은 보시바라밀에서 시작된다. 쪼그라든 인색한 마음으로는 결코 광대한 교법과 수행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인색함의 독을 제거하는 보시바라밀 수행을 행할 때 처음부터 무주상보시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힐 필요가 전혀 없다.

▲ 원빈 스님
행복명상 지도법사
보시바라밀을 행함이 즐겁고 익숙해지면 목숨을 보시하는 것조차 밥 두 숟가락 보시하는 것처럼 집착없이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이루어지는데 그때가 바로 보시바라밀이 완성되는 때이고 무주상보시가 나타나는 때다. 이렇게 무주상보시는 억지로 집착해서 행하는 것이 아닌 환희로운 보시행을 통해 드러나는 것임을 기억해야겠다. 보시의 인연이 주어질 때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보시행의 즐거움을 꼭 체득하는 불자들이 많아지길 거룩하신 부처님전에 축원한다.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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