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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양기성, ‘맹광제미’ 〈끝〉

기자명 조정육

수행의 시작은 바로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 양기성, ‘맹광제미’ 만고기관첩, 18세기, 종이에 색, 38×30cm, 삼성리움미술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소설을 버무려놓은 글이라 생각했다. 논픽션으로 생각하기에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조선시대의 일이었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를 살았던 분의 얘기였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전을 쓴 사람이 스님을 직접 모시거나 곁에서 지켜 본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하여 글을 썼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물속을 걸어가는 달’(김진태 저)을 읽었을 때 느낌이 그랬다. 수월(水月,1855~1928) 스님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경허 스님의 제자 수월
신분 숨긴 채 보림 수행
어떤 상황이든 변함 없이
아낌없는 보살행을 실천

수월 스님은 경허 스님의 제자다. 흔히 수월, 혜월(慧月), 만공(滿空) 세 사람을 일러 경허의 세 달이라 부른다. 경허 스님의 제자 중 세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인물인 데다 모두 법명에 달을 뜻하는 월(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만공 스님의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첫 번째 사연은 이러하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수월 스님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서산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으로 출가를 했는데 이곳에는 경허 스님의 친형인 태허(太虛) 스님이 주지로 있었다. 출가 후 수월 스님은 행자가 되어 나무꾼생활을 했다. 1887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수월 스님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레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고 있었다. 입으로는 부지런히 천수다라니를 외우며 밤늦게까지 방아를 찧었다. 그때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태허 스님이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무심히 방앗간을 들여다보던 태허 스님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월 스님이 돌확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잠들어 있었는데 방앗공이가 허공에 그대로 떠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태허 스님이 수월 스님을 끌어냈다. 그 순간 방앗공이가 떨어지면서 다시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태허 스님은 수월 스님의 수행력을 확인하고 난 다음 날에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시켰다. 법사는 경허 스님이었다.

믿을 수 없는 얘기는 계속되었다. 출가 후에도 수월 스님은 경허 스님의 가르침대로 죽기 살기로 천수다라니를 외웠다. 나무를 하든 밥을 하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언제나 천수다라니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그를 기특하게 본 덕분일까. 특별히 이레 동안의 용맹정진이 허락되었다.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천수다라니를 외웠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잊고 오로지 천수다라니를 외운 지 이레 만에 몸에서 불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방광(放光)을 체험했다. 그리고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 불망념지(不妄念智)를 얻었으며, 수마(睡魔)를 물리쳤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후의 삶은 이때 얻은 체험을 보림하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수월 스님은 천장암을 떠나 신분을 숨긴 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보림 수행에 들어갔다.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 등에서 지내다가 방광이나 이적을 통해 신분이 드러나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함경도 갑산으로 가서 경허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근처에 있다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갔다. 간도는 일제의 수탈에 시달린 동포들이 살 길을 찾아 떠나온 곳이었다. 그곳에서 수월 스님은 낮에는 소먹이 일꾼 노릇을 하며 품삯을 받아 주먹밥을 만들었다.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짚신을 삼았다. 수월 스님은 주먹밥과 짚신을 간도로 넘어 온 동포들을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에 온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내라는 말 없는 격려였다. 아낌없는 보살행의 실천이었다.

좋은 일을 하면 꼭 마장이 끼게 마련이다. 한때 수월 스님은 젊은 스님이 운영하는 절에서 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짚신삼기와 주먹밥보시는 멈추지 않았는데 그 행동이 막행막식을 일삼는 젊은 스님 눈에 몹시 거슬렸다. 젊은 스님은 수월 스님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렸다. 밤새 고생해서 만든 주먹밥을 집어던져버리는가 하면 짚신을 불태워버렸다. 그러기를 여섯 해 동안 계속했다. 그때 수월 스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한 순간도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젊은 스님 때문에 보림을 이룬 셈이 되어 감사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보림을 도와준 스승과 6년을 함께 했으니 그 생활이 기쁘고 즐거웠다.

그런 스님이었으니 마음속에 미움이나 원망 같은 감정은 아예 들어앉을 수가 없었다. 수월 스님의 마음이 얼마나 맑고 투명했으면 셰퍼드보다 더 사납다는 만주 개들도 스님 앞에만 가면 조용히 입 다물고 순하게 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호랑이도 수월 스님 앞에서는 순한 양으로 변했다. 증언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장을 보러 갈 때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스님이 절에 있을 때 호랑이는 법당 뒤 소나무 곁에서 강아지처럼 놀았다. 호랑이들이 사람을 해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소박한 초옥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두 손을 모은 채 앉은 자세가 자못 공손하다. 초옥 밖에서는 한 여인이 밥상을 높이 들고 서 있다. 조신한 자태가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한 듯하다. 그들은 어떤 사이일까. 부부라기에는 서로 너무 깍듯하고 남이라기에는 오고가는 눈빛이 너무 다정하다. 손님 같은 부부가 있을까.
한나라 때 얘기다. 현사(賢士)인 양홍(梁鴻)은 자가 백란(伯鸞)이었는데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았다. 그의 처 맹광(孟光)의 자는 덕요(德曜)다. 그들은 함께 패릉산(覇陵山)에서 밭 갈고 길쌈하며 은둔하며 지냈다. 어느 날 양홍이 왕실을 비방하는 시를 지어 쫓기게 되었다. 부부는 오(吳)나라로 건너가 방앗간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타지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살림살이는 궁색했다. 궁색할 때 부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양홍과 맹광은 긍정적인 쪽을 택했다. 그들은 서로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대신 존경하고 아끼며 살았다.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의 아내 맹광은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 남편을 맞이하는 자세도 지극했다.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로 들어 올려 남편에게 공손히 바쳤다. 이때부터 ‘거안제미(擧案齊眉)’는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는 어진 아내를 비유할 때 쓰게 되었다. 또한 금슬이 좋은 부부를 가리켜 ‘양맹(梁孟)’이라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양홍(梁鴻)’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그림은 ‘거안제미’에 대한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거안제미’ 대신 ‘맹광제미’라고 적었다. ‘맹광제미’는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들어 있는 작품으로 작가는 양기성(梁箕星,?~1755)이다. ‘만고기관첩’은 ‘이 세상의 온갖 기이한 광경을 담은 화첩’이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잘 알려진 명문을 선별하여 그에 맞는 그림을 함께 수록한 화첩이다. 즉 시문과 시편, 효자와 군신, 고사에 관련된 내용을 적고 그림을 곁들였다. ‘만고기관첩’의 글씨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로 유명한 윤순(尹淳)이 썼다. 그림은 장득만, 장계만, 한후방, 한후량, 양기성, 진재해 등 당시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이 참여했다. 내용은 다르지만 똑같은 제목의 ‘만고기관첩’이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도 소장되어 있다. ‘맹광제미’를 그린 양기성은 두 소장처의 ‘만고기관첩’에 가장 많은 그림을 남겼다. 삼성리움미술관 소장본 29폭 중 15폭을, 야마토분카칸 소장본 24폭 중 18폭을 그렸다. 정조가 열람할 수 있도록 어람용으로 제작한 화첩인 만큼 바위와 뒷산에는 청록색이 주조를 이룬다. 청록산수는 궁중채색화의 특징이다.

거안제미는 금슬이 좋은 부부를 지칭하지만 그 배경에는 아내의 희생과 남편에 대한 공경심이  전제되어 있다. 둘 다 유교를 상징하는 코드다. 과연 이 낡은 가치관은 우리시대에도 쓰임새가 있을까.

수월 스님이 화엄사에 있을 때였다. 화엄사는 만주의 나자구에 있는 절인데 이곳에서 수월 스님은 8년을 보내고 열반에 들었다. 화엄사는 나자구에 사는 조선 동포들이 지은 소박한 절이었다.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나 마음이 아플 때 스님을 찾아왔다. 수월 스님은 천장암 용맹정진 이후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신통력을 얻었다. 수월 스님을 만나거나 만나기를 희망한 사람들이 병에서 해방됐다. 수월 스님의 소식을 들은 젊은 스님들은 수행하러 왔다. 어떤 상황이든 수월 스님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누더기를 입은 채 묵묵히 일을 했고 탁발을 다녔으며 아픈 사람을 고쳐주었고 짚신을 삼고 주먹밥을 만들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수월 스님의 손은 사람 손 같지가 않았다. 밭일, 나무하는 일, 물 긷는 일, 장 보는 일까지 모든 일을 예순 일곱 살 수월 스님이 도맡아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수월 스님은 일 한 티를 내지 않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어쩌다 젊은 스님들이 수월 스님을 돕기 위해 일하려고 하면 스님은 간곡한 어조로 당부했다. 

“정진이나 햐. 지발 들어가 공부나 햐.”

젊은 수행자들이, 자신이 천장암에서 맛 본 세계를 직접 체험하기를 바라는 자비심에서 나온 소리였다. 수월 스님은 단지 만주에서만 알려진 동네 스님이 아니었다. 천장암에서 대비삼매에 든 이후 가는 곳마다 이적을 일으켜 불교계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동산, 효봉, 청담, 금오, 태전 등의 남쪽 스님들이 수월 스님을 찾아 만주에 가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그런 분이 여전히 머슴처럼 일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다.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생각조차도 없는 보살행이었다.

거안제미는 남존여비사상을 강요하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관념이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밥상을 눈썹높이까지 들어 올려 가며 남편한테 순종하라는 말인가.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못한 남편에게 아침밥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 수월 스님의 전기를 읽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머슴살이를 한 품삯으로 남에게도 저렇게 보시하는데 내 남편에게 밥상 좀 차려주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목에 힘을 주었을까. 부부사이에 거래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조금 더 베풀어주고 희생한다는 것이 창피하고 속상해야 할까. 상대방을 공경한다는 것은 정말 낡은 사고방식일까. 버려야 할 유산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거안제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 가정에서조차 하심하지 못하고 보살행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불자라고도 할 수 없다. 수행은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위해주고 챙겨주는 것이 수행이다. 경전 한 권을 줄줄 외우는 것보다 한 문장이라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고 그 수행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림이다. 그 시작은 지금 바로 이 자리다. 내가 여자든 남자든 젊든 늙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현재 있는 자리에서 상대방을 위해 정성을 다해 거안제미를 하는 것이 수행이고 보림이다. 수월 스님의 삶이 그렇게 말한다. 

수월 스님은 마지막에 떠날 때도 딱 그분답게 가셨다. 1928년 여름 안거 후였다. 일흔 네 살이 된 수월 스님은 여름 내내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로 져 왔다. 그리고 개울가에 가서 깨끗이 목욕한 후 맨몸으로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가 올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나도 그리고 법보신문 독자님들도 수월 스님처럼 평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기를 기원한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실천하는 삶이기를. 기원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아름다운 정토세상에서 다시 뵙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조정육 합장.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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